세계가 높이 평가한 그였건만
조국에선 음악조차 '감옥' 살았다
[책 만들기 31년, 한 출판인의 비망록 2] 음악가 윤이상 ①
텍스트만보기   김언호(eounhokim) 기자   
▲ 1988년 독일 윤이상 선생 자택에서 선생과 인터뷰하고 있는 필자.
ⓒ 한길사

"정치 이데올로기란 계절에 따라 무성하다가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지만 민족문화란 창공처럼 푸르고 엄숙하고 영원합니다."

1988년 10월 6일 베를린 자택으로 방문한 나에게 윤이상 선생은 말했다.

"나는 하루 한 시간도 내 조국 내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민족 성원들 속에 나는 서 있습니다. 짐승도 죽을 때 제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 조상들이 살았고, 위대한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내 땅에 묻히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고향 땅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나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그 엄혹한 80년대에 나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은 감동적이었고 선생의 정정한 목소리는 나의 영혼을 흔들어놓았다. 세계가 그의 음악을 연주하고 연구하는데, 막상 그의 조국에서는 연주도 되지 않고 논의하고 연구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윤이상 선생과 나, 서로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다

▲ 1988년 <윤이상-루이제 린저의 대담>에 실린 윤이상 선생의 자필편지.
ⓒ 한길사
마침 윤이상 선생은 DMZ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음악제를 열자는 안을 내놓았다. 남과 북의 음악인들이 민족과 국토의 분단과 전쟁을 상징하는 바로 그곳에서, 음악으로 평화를 노래하자고 남과 북에 제의한 것이었다.

나는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음반을 직접 출반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음악전문 출판사 또는 음반회사들이 그걸 하지 않으니 우리가 해보자는 것이었다. 한길사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이지만, 음반도 사실은 또 다른 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또 출판사가 음반을 기획하기도 하지 않는가.

나는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베를린에 머물면서 윤 선생을 만나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음반을 직접 만들어 한국에 소개하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선생은 흔쾌히 나의 제안에 동의했다. 실은 윤 선생도 나의 이러한 제안을 매우 놀라워하셨다. 한국의 이런저런 언론들이 선생의 동정에 대해 보도는 하고 있었지만, 그 보도들은 선생의 생각과 행동을 늘 왜곡하곤 했다. 선생은 사실은 한국의 미디어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음악전집을 펴내겠다는 나의 제안은 여러 의미에서 선생님에게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윤이상 선생을 만나러 가는 나는 다소 긴장했다. 1956년 6월 유럽으로 유학 간 지(처음에는 프랑스로 갔다)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어떤 모습일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음악가 윤이상 선생은 한국적인 편안한 할아버지였다. 베를린 숲 속에 있는 자택의 문 앞에서 선생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맞아주었고, 집안의 풍경은 한국의 여느 곳과 같았다. 이웃집에 들러 즐겁게 환담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선생에겐 약간의 경상도 악센트가 남아 있었다. 선생은 나를 고향의 후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젊은 시절 통영의 풍경을 떠올리는 듯, 고향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꿈꾸는 소년 같았다.

나는 윤이상 선생과의 첫 만남에서 또 다른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마침 10월 8일과 9일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는 연속으로 '윤이상 음악회'가 열렸는데 선생의 초대로 그 음악회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음악회가 열릴 때는 주최 측이 선생을 오게 함으로써 관객들의 열띤 갈채를 받게 되는데, 그날도 그러했다.

음악회가 끝난 후엔 연주자들과 회식을 했는데, 윤이상 선생은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출판인인데, 나의 음악전집을 기획하기 위해 왔다'고. 나는 그때 윤이상 선생의 작품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세계적인 오보에 연주자 하이츠 홀리거와 하프 연주자 우어줄라 홀리거 부부와 마주 앉아 저녁을 같이 했다.

10월 10일 나는 하루 종일 선생과 인터뷰하는 기회를 가졌다. 선생은 동베를린 사건을 비롯해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여러 가지를 털어놓았다. 나는 선생의 뜨거운 예술정신과 민족애에 감동했다. 선생과의 긴 인터뷰는 나의 첫 베를린 방문의 절정이었다.(인터뷰 내용은 이어지는 2편에서 자세하게 소개한다.)

<윤이상 선집>에서 <윤이상 음악전집>으로

나의 윤이상 선생 인터뷰는 막 창간된 <한겨레신문>에 게재됐다. 윤이상 선생의 예술관·민족관에 대해서 한국신문으로서는 가장 본격적으로 소개한 기사였을 것이다. 나는 이미 우리가 펴내는 월간 <사회와 사상> 88년 10월호에 윤이상·송두율 대담으로 '윤이상의 예술세계와 민족관'을 게재했다. 윤이상 선생의 음반을 내야 되겠다는 구상을 하면서 기획된 기사였다. 베를린으로 윤이상 선생을 방문하기 직전에 발행되었는데, 송두율 교수와의 대담에서 선생은 자신의 예술과 철학에 대해 깊이 있는 언급을 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참으로 격조 있는 대담으로, 윤이상의 예술사상을 최초이자 체계적으로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윤이상 선집> 정도로 구상했다. 그러나 베를린으로 가서 선생을 뵙고는 <윤이상 음악전집>을 기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단 귀국했다가 1989년 2월 구정을 할애해 다시 베를린으로 갔다. 아내 박관순도 동행했다. 우리가 베를린을 방문하는 기간에 함석헌 선생님이 서거하셨다. 그래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선생의 작품과 자료가 방대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작업이 필요했다.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되어야할 작품해설도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독일에 유학 중인 한정숙씨(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최성만씨(현 이화여대 독문학 교수), 홍은미씨(음악학) 등이 윤이상 선생 댁으로 모였다. 홍은미씨는 나중에 윤이상 선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 1주일 동안 출근하는 것처럼 윤이상 선생 댁에 모여 구성을 짜고 어떤 해설을 어떻게 붙일까를 토론했다. 물론 윤이상 선생과 함께였다. 기왕에 발표된 '윤이상 연구'를 조사했다.

하루를 할애해 윤이상 선생의 사진들을 정리했다. 선생은 대단한 기억력과 에너지를 갖고 계셨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6시까지 사진을 살펴보고 사진설명을 붙이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선생은 50장이 넘는 오래된 사진들의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계셨고, 그 사진설명을 척척 해내는 문장가였다.

하루는 선생의 안내로 베를린예술대학의 윤이상 아카이브를 방문했다. 전임연구자를 두어 선생의 음악에 관한 모든 연구와 자료를 집성시키는 연구소였다. 윤이상 선생은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했다. 베를린예술대학은 윤 선생의 아카이브를 설립해서 학교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진을 비롯한 이런 저런 자료들을 갖고 귀국했다. 윤 선생이 윤이상 아카이브에서 확보해준 CD도 함께였다.

▲ 1972년 오페라 <심청> 초연 후 축하연에서. 왼쪽부터 다우메 올림픽 준비위원장, 윤이상, 심청을 맡은 수키스, 바이에른 주지사.
ⓒ 한길사
윤이상 오리지널 음반 김포공항에 6개월간 억류

그러나 윤이상 선생이 확보해준 오리지널 CD 등을 김포공항에서 압수당하고 말았다. 김포공항 당국은 갖고 들어갈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허가' 없이는 그 어떤 음반도 펴낼 수 없는 시대였다. 문공부에 이야기를 해보았자 소용없었다. 결국 '윤이상음악'은 김포공항에 6개월 이상 유치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오리지널 음반은 윤이상 선생의 운명처럼 조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되돌아가야 했다. 최성만씨가 일시 귀국했다가 독일로 돌아가는 편에 그것을 찾아서 윤이상 선생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민족의 위대한 음악예술가 윤이상의 작품은 6개월 동안 '감옥'을 살았던 셈이다.

나는 정치 또는 정치상황과는 당초부터 무관했다. 어떻게 보면 무관심하다고나 할까. '공안정국'을 예측할 수 있는 정보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한 출판인으로서 내고 싶은 책, 펴내야 된다고 생각하는 책을 기획했다. 세계가 높이 평가하고 연주·연구하는 윤이상의 음악을, 다른 전문가들이 소개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선 것이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당국은 나에 대해 '심각한 대책'을 준비했다고 했다. 금기시된 윤이상을 만나러 다니고 그의 사상과 예술관을 소개하고 있었으니, 공안정국을 만드는 공안당국자들로서는 내가 얼마나 비위에 거슬리는 존재였겠는가.

내가 윤이상 선생을 만나 음악전집을 준비하고 있을 그때 중앙일보사는 윤이상 선생의 귀국과 윤이상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준비해온 사진자료까지 음악회 준비를 위해 전달했다. 선생 자신도 이제는 귀국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시대가 이미 '문민' 쪽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88년 10월에 윤이상 선생을 만나고 돌아온 나는 선생의 귀국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윤이상선생 귀국준비위원회'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예총의 전봉초 회장과 서울대 이강숙 교수를 만나 귀국하는 윤이상 선생을 환영하는 위원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의논드린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와 사상> 89년 4월호에 윤이상 선생의 '정중동(靜中動): 나의 음악예술의 바탕'을 실어 윤이상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도모시켰다. 이 글은 1985년 윤이상 선생이 튀빙겐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서 행한 강연이었다. 이 연설은 윤이상 선생의 음악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정치상황은 공안정국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한길사의 <윤이상전집> 작업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연주되어 녹음되어 수집 가능한 곡들을 모으면 LP판 15매 정도는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레코드 재킷에 실릴 해설과 정보를 번역하는 작업은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있는 최성만·홍은미씨 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레코드 재킷의 그림은 판화가 이철수씨에 의해 시안이 제작되고 있었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에 대한 음악적 해석과 각 곡들에 대한 전문가의 해설 그리고 윤이상 선생 자신의 해설들이 번역되거나 새로 씌어졌다. 자세한 연보작업도 진행되었다. 아직 국내에 윤이상의 음악에 대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준비한 내용들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귀국'도 무산, '음악전집'도 무산

그러나 결국 윤이상 선생의 '음악전집'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윤이상 선생의 귀국도 무산되고 음악회도 더 시간이 흘러야 가능했다. 선생은 그때 귀국이 성사될 것으로 본다면서 흥분해 있었다. 통영 그 앞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고도 했다. 자기가 태어난 지리산 산청의 그 마을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지리산에 와서 어머니를 만났고, 그래서 그 지리산에서 선생은 태어났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1년 6개월 동안 출국정지당해야 했다. 왜 출국정지를 당해야 했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렇게 되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 1991년 한길사에서 출간된 <윤이상의 음악세계>.
ⓒ 한길사
우리는 결국 레코드 출판을 위해 준비한 원고들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1991년 2월 최성만·홍은미 편역으로 나온 <윤이상의 음악세계>가 그것이었다. 634쪽이나 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윤이상 선생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나는 선생과의 인터뷰를 200자 원고지 80여 매로 정리해 이 책에 수록했다.

선생의 귀국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선생이 참석하는 음악회가 계속 시도되었지만, 한참 후에 주인공 없는 음악회가 가능했을 뿐이었다. 나는 선생과 전화는 가끔 했다. 선생은 한국에서 나온 책을 보내달라고도 했다. 우리 출판사가 펴낸 책들을 보내드렸다. 우리 책을 보면서 고향을 더 그리워했을까.

선생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일본의 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건강이 조금 회복되었을 때 배를 타고 대마도 쪽까지 왔다고 했다. 일본의 한 방송국 취재진들과 동행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바다에서 멀리 고향 땅을 바라보았다는 것이었다.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참으로 고단한 생애

베를린에서 뵈었을 때 선생은 계속 고향 이야기를 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했다. 정말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다. 선생의 그 간절한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1995년 11월 3일 이국땅 베를린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한 음악예술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생애였다. 세계로부터 권위 있는 상들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선생의 삶과 정신은 참으로 고단했다.

이제 윤이상에 대한 '편견'은 해소되어가고 있고 선생의 고향 통영에서는 선생을 기리는 음악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선생의 음악을 연주하는 젊은 연주자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나는 윤이상 선생의 예술정신과 민족 사상을 기리기 위해 한 출판인으로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일을 해보자 하고 있다. 2005년에는 윤신향 박사의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을 펴냈다. 앞으로도 윤이상 음악연구에 대한 책을 계속 기획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윤이상 연구자들에게도 집필을 부탁하고 있다.

▲ 2005년 한길사에서 출간된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
ⓒ 한길사
예술마을 헤이리에서 2005년에 이어 2006년에도 윤이상평화재단에서 기획한 윤이상음악회가 열렸다. 나는 지난 1994년부터 헤이리 프로젝트를 여러 장르의 문화예술인들과 손잡고 진행하고 있는데, 이 헤이리에서 윤이상 선생의 음악회가 열리게 됨은 아마도 윤이상 선생과의 그 어떤 인연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민족분단의 그 경계지대에 존재하는 예술마을 헤이리에서 우리는 민족이 낳은 위대한 음악예술가 윤이상의 예술사상·평화사상을 더욱 소중하게 펼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야말로 평화를 구현하는 힘이다. 윤이상 선생은 나에게 문화와 예술의 힘을 일깨워주고 있다.

올해는 윤이상 선생의 탄생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윤이상평화재단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3월 14일에는 90주년기념사업을 후원하는 음악회모임도 있었다. 우리는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민족의 큰 음악가 윤이상을 갖고 있다. 오늘도 선생의 정정한 말씀이 나의 귓전에 쟁쟁하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
[책 만들기 31년, 한 출판인의 비망록 2] 음악가 윤이상 ②
텍스트만보기   김언호(eounhokim) 기자   
1988년 10월 10일 윤이상 선생과의 인터뷰는 막 창간된 <한겨레신문> 1988년 10월 27일자에 전면으로 게재됐다. 세계가 연주하고 연구하는 그의 음악예술이 막상 조국에서 왜곡되고 막혀 있는 상황에서, 그가 사랑하는 민족에게 그의 음악예술을 소개하고자 찾아간 한 출판인에게 선생은 민족과 예술에의 열정과 신념을 말씀했다. 다음은 당시 인터뷰의 주요 내용이다.

"동베를린 사건 이후 내 음악이 바뀌었다"

▲ 1967년 동베를린 사건 당시의 윤이상 선생.
ⓒ 한길사
- 1956년에 선생님이 유럽에 오신 이후 30년이 더 지났습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작곡활동을 시작해서 이제 세계정상을 지키고 계신데, 선생님의 음악이 최근에 들면서 구조가 단순해진다 할까 어떤 격렬함으로부터 조용해진다 할까, 더욱 동양적인 것으로 흐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0월 8일과 9일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연주된 작품들 가운데서도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작곡하신 작품은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이는 선생님의 음악세계 또는 사상의 어떤 변화라고 할 수 있나요?
"1968년의 동베를린사건은 나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동베를린사건을 소화시키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70년대 초반의 작품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이 시기의 내 음악에는 격렬한 정신이 표출됐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거침으로써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삶에 있어서 통일적인 정신과 논리가 이루어진다고나 할까요. 나이가 차차 들면서 더욱 나의 음악언어가 간소화되고 직설적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는 7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나타납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하겠습니다."

-동베를린사건이라는 분단 민족만이 겪을 수 있는 체험을 통해 선생님의 음악 또는 선생님의 삶에 어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겁니까?
"동베를린사건 이전에는 나는 동양의 음악가로 동양적 정신, 동양적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심미적 작품을 쓴 것이 사실입니다. 지식인적인 예술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나는 해방 전에도 항일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적도 있고 해방 직후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선 바 있습니다. 나는 민족과 나라를 위해 내 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동베를린사건이라는 개인적·집단적 체험은 민족문제·분단문제를 더욱 구조적이고도 깊이, 온몸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작품으로 그것을 형상화시켜야 한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나의 음악예술이 도교사상 또는 동양정신에 토대를 둔다는 것, 동양인 또는 한국인으로서 생득적으로 갖고 있는 이런 정신적 유산 또는 토대는 오늘의 세계와 인류, 조국과 민족이 당면하는 문제와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한 예술가는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문화권·정치권과 운명적으로 연계되어 있겠습니다만, 동베를린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는 그 극악한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작품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장자의 꿈을 소재로 한 오페라 '나비의 꿈', 클라리넷 독주곡 '율'(律)과 낙랑고분의 사신도를 주제로 한 '영상'(이마주)을 만들었지요.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물 사발이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손을 불어가면서 음보를 적어나갔지요. 나의 생명을 유지하는 정신적 위안은 '음악'을 생각하고 찾는 것이었습니다. 현실로부터 해방되고 꿈과 환상으로부터 자유를 찾아내고 위안을 얻어내는 것이었지요. 나는 그곳에서 인간정신의 숭고함과 절대적 순수, 꿈과 이상의 화합을 추구했습니다."

"나의 예술 나의 삶은 정의에 바탕을 둔다"

-선생님의 음악을 창출해내는 힘이랄까 정신적 유산이 있다면?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놓을 뿐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붙이지만, 어디 예술이 개인의 것입니까, 이 우주의 흐름이지요. 나는 우리 조상들의 이 같은 예술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내가 오늘 국제적으로 이름난 작곡가가 되었지만, 이것은 내가 민족의 뛰어난 예술적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예술적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동양의 그 어느 민족보다도 통할한 도교사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음악은 이 전통을 그대로 갖고 있고, 바로 이 전통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 자라났기 때문에 오늘의 내 음악이 존재합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꿈'이 성황리에 연주가 되었고 본에서는 연주에 모여든 사람들이 연주가 끝나고 윤이상 석방하라면서 횃불행진까지 했다고 해요. 예술가의 책임이랄까 자세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내 나이 이제 일흔 하나입니다. 나는 일제를 체험하고 해방과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민족의 근·현대사와 세계의 돌아감도 보고 있습니다. 또 남과 북도 잘 아는 편입니다. 유럽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이남과 이북을 똑같이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북과 이남은 똑같은 나의 조국입니다. 북쪽에도 남쪽에도 똑같은 민족의 피가 흐릅니다."

-선생님의 예술은 평화의 예술, 정의의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선생님의 민족에 대한 관심, 통일운동에의 헌신도 바로 이와 같은 평화와 정의의 예술가로서의 당연한 삶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나의 삶과 정신, 나의 예술은 정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류에의 신뢰가 바로 평화이고 이 평화는 동양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교향곡을 다섯 개 썼는데 지난해 베를린 시 750주년기념 위촉작품인 '교향곡 5번'을 사람들이 '평화의 교향곡'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나의 작품들에서 시종 흐르는 것은 바로 정의와 평화정신입니다. 가난한 조국에서 태어난 한 예술가로서 조국의 민주화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그리고 분단된 국토와 조국을 통일하는 일에 나서는 것은 한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더 나아가 전 세계 특히 제3세계의 수난 받는 민중에 대한 관심도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예술이란 진실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실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진실한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예술만이 창조적이고 남이 모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술이란 시대정신을 간파하고 그것을 옹호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럽의 수많은 음악예술가들이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기를 던졌습니다. 쇼팽이 그러했고 바그너와 베르디가 그러했습니다."

▲ 1974년 도쿄에서 김대중 구출운동의 일환으로 윤이상 음악회를 열 때의 기자회견 모습. 부인 이수자 여사와 함께 있다.
ⓒ 한길사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

- 선생님이 제안하신 남북음악제도 민족과 조국에 대한 열정,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한 예술가로서 신념의 표출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통일운동이 고조되고 있는 시기에 선생님의 휴전선에서의 남북음악제 제안은 참으로 신선한 지혜를 주는 것 같습니다.
"한 음악예술가로서 민족의 재통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다보니 바로 이 같은 구상을 하게 된 겁니다. 잠재적으로는 이와 비슷한 생각이 늘 있었겠지만, 구체적으로는 3년 전부터입니다. 휴전선은 민족분단의 실체일 뿐 아니라 분단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정치적 대결뿐 아니라 무력대결의 첨예한 현장입니다. 바로 그 대치의 현장에서 남과 북이 만나자는 것입니다."

- 선생님의 남북음악제는 그 진전에 따라서 대단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 더 구체적으로는 음악과 음악가가 어떤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지 자못 궁금하기도 합니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흔히 정치에 비해 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하나의 예술작품 또는 예술행위는 참으로 놀라운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민족의 혼과 양심을 불러일으키고 민중을 깨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핀란드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관현악 '핀란디아'는 핀란드 국민으로 하여금 민족독립운동의 혼을 불러일으킨 작품입니다. 체코의 스메타나가 지은 '나의 조국'은 체코 민중들을 순결한 애국심으로 불타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휴전선에서 민족의 음악, 민족의 소리를 울리게 해서 민족화해의 광장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한반도의 휴전선이란 우리 민족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는 것일 뿐 아니라 평화를 위협하는 인류공동의 문제입니다."

-잠자고 있는 민족의 영혼을 깨우치려는 이 음악제에 대비해 어떤 곡을 만드셨습니까?
"나는 이 음악제를 위해 지난해에 '나의 땅 나의 조국이여'라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45분가량 되는 이 교성곡은 남한의 양심적인 민족시인들의 작품이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민족과 조국의 영원함을 노래하면서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애국적인 혼이 담겨 있습니다."

- 선생님은 유럽에 계시지만 한국의 상황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작곡까지 하셨습니다.
"80년 광주민중항쟁 진압 소식을 접한 나는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상상도 못할 비극이 내 조국에서 일어나고 있음에 정신을 잃을 뻔했어요.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습니다. 민족에게 새로운 정의와 평화가 도래할 것을 기원하는 심정으로 나는 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 선생님은 철저한 사형폐지론자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예술사상으로 보아도 너무나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까? 지상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것은 참으로 큰 죄악입니다. 폭력범·살인범이라도 활동을 못하게 하면 되지 죽이면 안 됩니다. 고깃대가리를 자르는 것이나 황소머리에 징을 박는 것과 똑같은 짓을 어떻게 인간에게 합니까? 사형제도는 눈에는 눈 식으로 하는 야만시대의 보복행위입니다. 법과 국가는 국민들의 보호자여야 합니다. 보복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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