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철학의 빈곤, 종교·과학서 급감
한국은 아동서와 번역서가 출판시장을 주도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박맹호)가 1일 발표한 '2007년 출판 통계'는 출판계의 이런 현실을 재확인해 준다. 아동서는 168%가 증가한 반면 종교·과학 서적의 신간 발행부수는 무려 전년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문화선진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널뛰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출판가 일각에선 "부모세대가 입시 압박감을 대물림해 도서시장의 '아동 비만'을 낳고 있다"거나 "빈곤한 출판 철학이 번역물을 범람시키고 지식 경쟁력을 죽이고 있다"며 우려한다.
출판협회가 지난해 국립도서관·문화관광부·국회도서관 등에 납본한 도서자료 집계 결과, 지난해 발간된 신간 도서는 모두 4만1094종, 1억3250만3119부로, 2006년에 비해 발행 종수는 9.7% 감소했으나 전체 발행부수는 17.1%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아동 분야의 발행부수는 5674만7059부로 전체의 50.16%나 됐고, 만화(15.99%) 문학(15.31%) 학습참고서(11.85%) 사회과학(8.22%) 분야 도서 순으로 발행부수가 많았다.
아동도서의 신간 부수는 전년보다 168.9%, 철학 분야는 25.3% 늘었다. 반면 이 두 분야를 제외한 전 분야의 신간 발행부수가 전년보다 하락한 가운데, 종교(-54.2%) 순수과학(-48.7%) 기술과학(-27.3%)은 감소 폭이 두드러졌다. 아동서의 폭발적인 증가도 문제이고, 종교서·과학서의 급감도 문제다.
- ▲ 지난해 6월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어린이들이 아동도서를 구경하고 있다. 국내 출판시장에서 아동서와 번역서 비중은 높아진 반면 종교·과학서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특정 쏠림 현상이 다품종 소량생산을 방해
출판협회는 "386 세대가 자녀 독서교육을 강조하고 홈쇼핑·방문을 통한 전집 판매 등이 확대돼 아동서 강세가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며 "초판 납본 통계만으로 전체 출판시장 동향을 읽을 수는 없지만 전반적인 출판 경기 불황과 젊은층의 독서 기피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종교·과학 분야의 신간 부수 발행 급감은 뜻밖이다. 기독교 서적을 내는 규장의 김응국 편집장은 "특정 도서에 대한 독자의 쏠림과, 불경기에 타격을 입은 중·하위권 출판사들의 출간 부진에 따른 결과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과학도서 출판사인 사이언스 북스 노의성 편집장은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교양과학 도서 시장에 2006년 출판사들이 대거 뛰어들어 경쟁이 심화되고 자연도태가 이뤄진 결과가 이듬해 반영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반면 김기태 세명대 미디어창작학과 교수는 "다품종 소량 생산이란 전반적 흐름이 계속되고 있었고, 이전에도 정권 교체기나 올림픽 같은 큰 이슈가 있는 해에 발행부수가 현저히 떨어지곤 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괜찮아질 것이다"며 낙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국내 아동서 시장, 비정상 비대
한편, 전체 발행종수 중 번역서의 비중은 2006년과 비슷한 23.1%로 여전히 높았다. 번역서 중 아동서가 2811종으로 가장 많았고, 만화(2646종) 문학(2349종) 사회과학(1433종)이 뒤를 이었다. 국가별로는 일본(4544종) 미국(3753종) 영국(970종) 프랑스(775종) 독일(681종) 중국(350종) 순이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국내 아동 도서시장은 성인 시장과 비교해도, 외국과 비교해도, 모두 비정상으로 비대하다"면서 "독서 교육이 책 읽는 습관을 일찍 길러줄 수는 있지만 대입 논술 같은 강박감 때문이라면 책 읽는 즐거움으로 이어질지 의문스럽다"고 했다. 출판시장을 주도하는 학습참고서·아동서는 일본의 경우 판매량 측면에서 하위권이며, 일본처럼 문고본을 활성화해 성인들이 쉽게 책을 접할 수 있도록 백원근 선임연구원은 덧붙였다.
외국서적 번역판이 전체 종수의 4분의 1, 베스트 셀러 목록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역량 있는 국내 필자를 발굴하는 대신 쉬운 번역서를 택해 외서 의존도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국내 저자들의 저서를 주로 내는 휴머니스트 선완규 주간은 "우리도 시장을 국내에 국한해서는 안 되고 장기적 안목으로 우리의 지식과 가치에 기반한 유능한 필자를 외국 시장에 소개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입력 : 2008.02.04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