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돌고돌면 돈이 된다

구전신화→소설→영상→게임→테마파크 순환 패턴… 반지의 제왕 등 高부가 창출 문화콘텐츠로

‘경성스캔들’ ‘원스어폰어타임’ ‘라듸오데이즈’ ‘모던보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모두 일제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다.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 줄줄이 쏟아지는 작품들이다. 이들은 시대적 배경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념지향적인 내용을 탈피하고 당대의 풍속사와 일상사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이들에겐 독립군 아니면 친일파라는 이분법이 없다. 엄혹한 제국주의의 칼날을 피해 비극적인 사랑을 나누는 주인공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술 마시고 연애하며 멋을 내고 돈을 버는 평범한 생활들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배경과 설정의 영화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일까. 당대 대중의 흥미를 돋우는 이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태어나서 이제야 ‘짠~’하고 나타난 것일까. 이야기산업이 최고의 부가가치산업으로 떠오른 시대다. 이야기의 탄생과 순환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이야기, ‘구전’으로 탄생해 테마파크에서 영생하다

돈이 회전하면 이윤을 낳고 이야기가 돌고 돌면 돈이 된다. 이윤 낳는 돈은 자본이고 돈을 낳는 이야기는 문화콘텐츠다. 이야기는 태초에 입에서 시작됐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온 이야기는 처음엔 글로, 다음엔 영상으로 부활해 돈을 낳는다. 게르만족의 설화에 기초한 ‘반지의 제왕’이 대표적이다. 거인 지그프리트 신화는 바그너시대에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로 이어졌고 라인 강의 황금 반지를 얻기 위한 영웅의 서사는 J.R.R 톨킨의 1954년작 소설 ‘반지의 제왕’의 근간이 됐다. 소설은 세계적으로 1억부 이상이 팔렸고 이를 스크린에 옮긴 피터 잭슨 감독의 3부작 ‘반지의 제왕’시리즈는 29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영화 한편으로 뉴질랜드는 ‘프로도 효과’라고 불리는 막대한 부가가치를 얻었다. 이야기 하나가 나라의 경제를 바꾼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구전신화→소설→영상→게임→테마파크(관광지)’로 이어지는 현대 이야기산업의 흐름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해리포터’ 시리즈나 ‘나니아연대기’ ‘황금나침반’ ‘베오울프’ 등은 이 순환 과정의 일부를 거쳤다. ‘서유기’ ‘삼국지’ 등 아시아 공동의 유산으로 발전한 중국의 이야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영상에 옮겨졌다. 국내에선 이무기설화에 기초한 ‘디워’나 단군설화에 바탕한 ‘태왕사신기’를 들 수 있다.


▶이야기를 사냥하라


고대 설화나 대규모 서사만이 이 같은 이야기 순환과정을 거쳐 꽃피는 것은 아니다. 보다 일상적이거나 역사의 단락에 불과한 이야기들의 생성과정은 좀더 현실적이고 순환 사이클도 짧다.


최근 붐을 이루는 식민지 시대극의 발원지는 학계다. 대개가 ‘학술연구→출판(소설, 논픽션)→영상’의 순환경로를 보여준다.


199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는 젊은 인문학도 사이에서 일제시대의 신문, 잡지 등 옛 출판물을 강독하는 모임이 불 붙듯 만들어졌다. 살림출판사의 강심호 기획팀장은 “당시 젊은 연구자들은 심심하면 둘러앉아 당시 신문이나 ‘학지광’ ‘조광’ ‘삼천리’ 등 잡지들을 읽었다”며 “이 잡지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여성월간지나 ‘선데이서울’같은 대중지 성격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 결과가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연애의 시대’ ‘학교의 탄생’ ‘황금광 시대’ ‘경성기담’ ‘럭키경성’ 등 2000년 이후 봇물을 이룬 출판물들이다. 영화 ‘모던보이’의 곽신애 PD는 “관련 연구서가 출판되면서 대중에게 그 시대에 대한 학습효과와 정서적인 기반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정치적, 사회적 맥락은 다르지만 영.정조 시대도 비슷한 조명과정을 거쳤다. 1993년 소설 ‘영원한 제국’이 히트한 이후 ‘방각본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원행’‘정약용 살인사건’ ‘조선왕독살사건’ ‘바람의 화원’ 등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연구서들이 출판가에 유행했고 ‘이산’ ‘정조 암살 미스터리-8일’ ‘한성별곡’ 등 드라마가 뒤따랐다. 영화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 다수 기획 중이다. 출판이 영상콘텐츠에 끼치는 영향이 커지자 일부 영화사에서는 아이디어개발팀이나 기획팀을 두고 수시로 출판가의 동향을 체크하기도 한다. 일부 인기 출판물의 경우에는 영화사들끼리 저작권을 선점하려는 신경전이 치열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부가가치 극대화하는 이야기산업의 순환구조 만들어야


이야기의 순환구조라는 측면에서 볼 때 국내 문화 콘텐츠산업의 문제는 그 주기가 매우 짧다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이용되고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 한때 ‘반짝 유행’이나 트렌드가 됐다가 사라지곤 한다. 반면 할리우드와 일본의 경우에는 소설이나 만화 등을 통해 한번 생명을 얻은 이야기는 영상매체를 거쳐 캐릭터, 게임, 관광, 테마파크사업으로 이어져 부가가치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된다. 결국 이야기산업의 세계화 시대에 승부는 단순히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뿐 아니라 그 활용도를 극대화할 수 있는 확대 재생산의 순환구조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렸다.

이형석 기자(suk@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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