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기사에도 두달 할애 ... 논쟁성 강하고 문체 유려 


[기획특집1_ 한국 서평의 현주소]해외 서평지의 구성
 
 2008년 01월 29일 (화) 11:30:33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외국 유명 서평지는 어떻게 서평을 꾸려갈까. 인상적인 외국 서평지를 찾아 개요와 특징을 살펴봤다. 서평자들은 교수라기보다 신문기자, 관료 등의 전문가 그룹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각 글의 길이는 타블로이드 신문 3~4면을 훌쩍 넘길 만큼 길었다. 신문에서 섹션으로 나오는 서평지는 대중성을, 서평전문신문은 학술성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뉴욕타임즈> 리뷰팀이 만드는 <뉴욕타임즈 북리뷰>는 주간 32면 섹션으로 별매한다. 1부당 가격은 1.5달러, 연간 구독료는 65달러다. 서평은 픽션과 논픽션으로 구분, 페이지 곳곳에 에세이를, 칼럼은 뒤편에 배치했다. 판형은 280x305mm로 일반 콤팩트 판보다 짧은 정방형에 가깝다. 한 호에 픽션 6권, 시집, 논픽션 11권 내외를 평한다. 뉴욕타임즈 리뷰팀은 18명 기자와 9명 편집자로 운영되고 있다. 리뷰기사 하나를 출고하는데 약 2달을 할애한다고 한다. 리뷰팀은 매주 600여권의 책을 배달받는다. 이 중에 실용서를 제외한 300권 정도를 추린 뒤, 두 차례에 걸쳐 25~30권 내외로 서평 후보를 선정한다.

책 선정 기준은 분야마다 달랐다. 픽션은 글쓰기의 질, 논픽션은 새로운 주제나 가치, 저자의 새로운 시각 등이 중심이 된다. 각 서평은 전문가에 의뢰하는데, 리뷰팀은 서평자가 저자, 출판사, 에이전트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지 반드시 점검한다고 한다. 서평자의 원고가 도착하면 편집진이 재검토해 공정한가, 전문적인가, 수준이 높은가 등을 따져본다. 일간지인 만큼, 서평의 목적은 독자들이 책을 사서 읽게 만들거나 대화의 소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서평전문지 <런던리뷰 오브 북스>는 학술지 냄새를 물씬 풍긴다. 타블로이드 44개면에 걸쳐 빽빽한 텍스트를 담는다. 사진도 별로 쓰지 않고 제목도 6단어를 넘지 않는다. 주제를 우선에 두고 관련서적 몇 권을 엮은 서평이 대부분이다. 소논문 형식의 학술에세이를 다수 싣고 있다. 1부당 가격은 4.95달러, 연간 구독료는 42달러다. 필자는 영국의 유명대학 교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학술서 저자나 시민운동가, 편집자가 글을 쓴다. 14명의 편집자와 8명의 편집위원이 활동하고 있다.

<뉴욕리뷰 오브 북스>는 영미권을 아우르는 서평전문신문이다. 6개월간 격주로 발행하다 출판계가 뜸한 계절에는 월간으로, 책이 쏟아지는 3월에는 월 3회 발행한다. 1부당 가격은 5.5달러, 연간 구독료는 65달러다. 에디터는 7명이며, 16명의 기자가 활동하고 있다. 필자들 중에는 교수는 물론, 유명 신문사 기자나 방송국 PD, 칼럼리스트들이 많다. 출판편집자나 관료도 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총 84개면 타블로이드로 발행되지만 기사 꼭지 수는 20개 안팎이다. 기사 하나가 타블로이드 신문지 2~3개면, 어떤 글은 4~5면에 걸쳐 게재되기도 한다. 하나의 기사에 여러 권의 유관서적들이 묶여 있다. 미국 학술서를 주로 다루는 <크로니클 리뷰>는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에듀케이션>의 섹션이다. 매주 신문과 함께 발행된다. 20개면에 5~6권의 책을 다루는데, 필자의 주제의식을 중심에 둔다. 학술 에세이를 강화하고 학술신간을 작게라도 많이 넣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크로니클 리뷰>만을 담당하는 편집자는 5명이다.

박인찬 숙명여대 교수(영문학)는 외국의 서평지에 대해 “다양성이 눈에 띈다”고 평했다. “서평의 수준이나 책의 종류가 다양하다. 서평의 길이도 기획별로 다양해 눈길을 끈다. 신문에 실리는 서평 중 사회과학 쪽 기사는 학술논문 수준인 것도 있다. 리뷰를 하면서도 논쟁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외국 서평지는 정보전달과 주장논박이 뚜렷하게 분리돼, 전자는 짧고 다양하게 후자는 유사한 신간을 엮어 통합적인 시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서평 문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문학자로서 볼 때 뉴욕타임즈 북리뷰의 문장은 대중적이고도 맛깔이 난다. 아무리 심각하고 난해한 주제도 좋은 표현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학자만이 아니라 작가 수준의 필자풀이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교수신문이 한국의 서평자 및 편집자로부터 추천받은 외국 서평지 중 가장 많이 언급된 매체는 <뉴욕타임즈 북리뷰, NewYorkTimes Book Review>였다. 그 뒤를 이어 <런던 북 리뷰, London Review of Books>,<뉴욕리뷰 오브 북스, The NewYork Review of Books>, <타임즈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The Times Literary Supplement>, <가디언 북리뷰, Guardian books Reviews>, <퍼블리쉬어즈 위클리, Publishers Weekly> 순이었다. 비영어권으로는 <르몽드, Le Monde>가 꼽혔다. 주로 유명 일간지의 섹션이나 서평전문 주간신문이 주를 이뤘다.

학회지 서평도 많이 추천받았다. <뉴 리터러리 히스토리, New Literary History> <포스트모던 컬쳐, Postmodern Culture>, <아메리칸 리터러리 리뷰, American Literary Review>, <리뷰오브 컨템포러리 픽션, review of contemporary fiction>, <필로소피아 내츄럴리스, Philosophia naturalis>, <랭귀지 북 리뷰, Language Book Reviews>, <바운더리즈, Boundaries>, <포지션즈, Positions>, <클래시컬 리뷰, Classical Review>, <폴리티컬 시오리, Political Theory>, <모던 픽션 스터디즈, Modern Fiction Studies> 등을 꼽아줬다. 주로 미국 대학에 근거를 둔 저널들은 서평실을 따로 두고 있다. 서평실에는 각종 서평전문신문과 일간지, 학술지들이 정리돼있다. 서평실 전담직원만 2~3명을 배치, 서평을 통한 연구를 전담하고 있다.

>>한국의 서평지는?

한국에는 학술전문 서평전문지가 없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서 서평이 잘 이뤄지고 있는 매체를 자유롭게 꼽아달라’는 질문에 서평 관련 전문가들은 교수신문을 포함한 각종 신문과 계간지들을 열거했다.

추천을 해준매체들은 다들 서평을 다루고 있지만 중심으로 내세우지는 못하고 있다. 신문들도 학술서를 전문적으로 다루거나, 서평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는 드물다. 신문의 책 관련 섹션도 서평 전문이라기보다 신간소개 수준이 주를 이루고 있다. <출판저널>은 1987년 창간해 매월 5일과 20일, 격주간으로 발행하다 지금은 월간으로 발행되고 있다. 서평전문가들이 <출판저널>을 많이 추천한 것은 학술서를 다루는 서평이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필자들도 서평하는 책의 학문분야 전공 교수들이 쓰고 있다. 학술서 한 권에 대한 서평은 원고지 8~10매 내외다.

격주간 출판평론지 <기획회의>는 <송인소식>이라는 출판계 소식지가 원류다. 출판계 내부에서 읽히다 보니, 보다 딱딱한 면이 있지만 깊이 있게 책을 평하는 편이다. 서평 필자는 학계보다 출판계가 많아 책 자체의 평가를 전문적으로 다룬다는 평이다.
일간지 서평들은 대체로 간독했음이 드러난다. 신간이 나오자마자 성급하게 서평기사가 나온다. 기자가 책의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서 책 사이사이에 비치는 어구를 끌어오는 글이 대부분이다. 책의 논리구조나 해당 분야의 흐름을 짚어주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한겨레>는 대체로 서평을 길게 쓴다. 일간지 중에 책과 관련해 가장 많은 12면을 쓴다. 충분한 지면을 확보해야 깊이 있는 서평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이 가진 이슈의 흐름, 학술의 계보를 짚어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강성만 한겨레신문 기자는 “특별히 서평에 무엇을 넣어야 한다는 것은 없다. 다른 신문 기자와 마찬가지로, 좋은 글을 쓰려고 하면 계보를 그리거나 심도 깊게 살피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평은 5명의 기자가 담당한다. 매주 들어오는 150여권의 책을 놓고 회의를 통해 매주 쓸 책을 고른다고 한다.

학술지 <한국사연구>의 경우, 매 호 끝에 2편의 서평을 싣고 있다. 전문분야 연구자가 책의 내용을 분석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분량은 원고지 50매 안으로 대부분 편집위원들이 청탁을 해서 메운다. <한국사연구> 편집위원 문중양 서울대 교수는 “학술지를 다양하게 만들기 위해 서평을 많이 넣으려하지만 적극적으로 원고를 내는 경우는 드물다. 서평이 연구업적에 포함되지 않는데다 비평을 꺼리는 학계 풍토 때문에 잘 안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일간지 중에는 <한겨레>가 많이 추천됐고, <조선일보>도 언급돼 있었다. 계간지나 학술지는 <출판저널>이 많이 언급됐다. 이어 <과학철학>, <기획회의>, <리뷰>, <북새통>, <사회비평>, <서평문화>, <안과밖>, <창작과 비평>, <한국정치사상학회지> 등이 추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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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리내어 몸으로 읽는 현대판 서당 만들 것”
입력: 2008년 02월 18일 17:33:18
 
ㆍ경복궁 옆 책방 ‘길담서원’ 여는 박성준 교수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가면 자하문으로 향하는 큰 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왼쪽에 인왕산, 정면에 북악산이 보인다. 이따금 지나는 곳이라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날 따라 저 산들의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궁금해진다. 그렇게 200~300쯤 걸었을까. 우리은행 주차장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 그 ‘길’ 끝은 옛 서울의 모습을 간직한 한옥집 ‘담’으로 막혀 있다. 통인동 155번지. 이곳이 바로 책방 ‘길담서원’이 터를 잡은 곳이다. 평화운동가인 박성준 성공회대 겸임교수(68)는 기자를 보자 면구스러워했다. 찾아오는 사람을 막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인터뷰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탁자 위에는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 놓여 있었다.


“그냥 작은 옹달샘 하나 판다는 생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문도 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성공회대 NGO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강의하는 박교수는 이달 25일 인문학 책방을 열기 위해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인 그는 소문대로 자상했다. “제가 끓이는 커피 맛있습니다”라며 손수 커피를 끓여 내왔다. 책방은 아직 어수선했다. 집에서 가져온 그의 책장과 책들이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고, 내부 수리가 진행 중이었다. 책방 이름이 왜 ‘길담’일까.

“‘길’이는 우리 아이 이름이고, ‘담’이는 제 친한 후배의 아이 이름입니다. 둘을 합한 거지요. 그 댁에서 먼저 제안했고 ‘길담서원’이라고 소리내 불러보니 울림이 좋아서 동의했습니다. 다양한 의미로 읽히더군요. ‘길에 관한 담론’ 또는 길(吉)한 이야기(談), 즉 ‘굿 뉴스(복음)’로도 읽히더군요.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이 동네엔 ‘길’과 ‘담’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경복궁 담을 따라 가면 ‘길’은 자하문 밖으로 열립니다. ‘길‘과 ‘담’은 떠남과 머무름, 열림과 닫힘, 비움과 채움입니다. 우리는 길을 떠나야 하지만 언제나 길 위에서만 살 수는 없고 담으로 둘린 안식처가 필요하지요. ”

길담서원에서는 인문·사회과학과 문학, 예술, 아동 분야의 책들을 다룰 생각이다. 생태, 생명, 우정과 자치를 강조하는 책들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비치해 둘 생각이라고 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책만 취급할 순 없겠죠. 전문 연구자들의 자문을 받아 좋은 책을 선별하고, 특별히 ‘이달의 책’ 코너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책방 하면 망한다던데…’라며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지인들이 많지만 아름다운 가게의 박원순 변호사, 원불교 서울교구장 이선종 교무, 녹색평론의 김종철 대표, 창비의 백낙청 교수, 김지하 시인 같은 분들께 책방 일을 의논드렸고 따뜻한 격려를 받았습니다.”

박교수는 이곳을 단순한 서점으로 운영할 생각이 아니다. 대화가 있는 공부방, 그리고 차와 음악이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우리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고전을 소리내 몸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리(文理)가 트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체득할 수 있는 현대판 서당이 될 겁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영어교육만 하더라도 생활영어, 영어회화가 마치 영어교육의 본령인 것처럼 여기는데, 고전적 가치가 있는 인문·사회과학의 양서를 풍부하게 읽는 가운데 덩달아 귀도 열리고 입도 열리고 생각도 깊어지는 공부가 진정한 영어공부가 돼야 합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책방 주인이 된 것은 어쩌면 그에게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통에 부모와 헤어져 남의 책을 베끼며 독학으로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다. 1968년에는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13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렇게 지난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책’은 늘 인생의 동반자였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수업 도중에 영양실조로 쓰러졌습니다. 학교의 보호를 받으며 심부름 하는 아이로 일하면서 겨우 졸업했어요. 중학교 진학은 못했어요. 어느 여자중·고등학교의 급사로 일하며 숙직실에서 기거했지요. 남의 책을 빌려 밤새워 베꼈어요. 그런 식으로 내가 만든 책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틈틈이 공부했습니다. 4·19 나던 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요, 금지된 사회과학 책들을 접하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책들도 베끼기 시작했어요. 저는 책을 베끼는 데 비범한 능력이 있었거든요(웃음). 그러다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니까, 내가 베껴 쓴 책들이 모두 증거품이 됐어요. 그래서 과도하게 무거운 15년형을 받았죠. 감옥에 있을 때에도, 출옥한 후에도 책을 벗삼아 살았어요. 그러니 책방주인이 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3년 전부터 그는 책방을 여는 꿈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실현되지 않았다. 한번은 계약금을 치렀다가 돈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심한 감기를 앓은 것이 결심을 굳힌 계기가 됐다.

“한달 가까이 감기에 걸려 외출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어요. 오직 할 수 있는 건 책 읽기뿐이었습니다. 그때 주로 읽은 책들이 녹색평론의 책들이었습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미숙 선생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호모 쿵푸스’ 같이, 공부에 대해 쓴 책들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요, 부산의 ‘인디고서원’에서 매달 추천하는 책들도 봤습니다. ‘아, 참 좋구나, 감기를 앓는 것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구나’ 생각했어요.”

감기가 낫자마자 녹색평론의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에도 가보고, 부산의 인디고서원과 ‘수유+너머’를 찾아갔다. 부산에만 3~4차례 내려갔고, ‘수유+너머’에 가서 젊은 사람들과 탁구를 치며 어울렸다. 그러다가 결국 아내인 한명숙 전 총리에게 ‘책방 개업’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작은 책방이지만 돈이 드는 일이죠. 빚을 얻었는데 저의 신용만으론 어렵고 그 사람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처음엔 가뜩이나 어려울 때 하필이면 장사도 안 되는 책방이냐고 했지만, 제가 행복해하니까 싫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는 13년 넘는 복역기간 중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 다방면의 독서 편력을 거쳐 차츰 신학에 집중했고, 이 공부가 기반이 돼 81년 출소 후 일본에서 민중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가 유니언신학교와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에서 ‘평화’를 화두로 공부하고 수행에 정진했다. 그는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이제야말로 진정한 공부가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민주정부 10년의 경험 이후 우리는 이제 재충전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생각이나 지혜가 동날 때도 됐어요. 진정한 공부가 없이는 이제 안 됩니다. 독서가 없는 마음공부는 공허합니다. 인문학적 책읽기가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논어 위정편에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무의미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子曰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말이 나옵니다. 옳은 말입니다. 90년대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사람들이 사회과학책을 손 놓아버렸지요. 명상, 영성, 마음공부 이런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그것은 당시로서는 의미있는 일이었고 자기 성찰이라는 점에서 일면 발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릇’만 있고 ‘내용’이 없으면 진정한 성찰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사이불학(思而不學)’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유행에 편승해 요즘 처세술이나 명상법 같은 책들이 범람하는데, 그런 책들만 읽으면서 독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한바퀴 돌아서 다시 원점으로 왔다고 봅니다. 개인의 삶도 그렇고 우리 사회도 그렇습니다. 숭례문이 불 타버린 것이 ‘때의 징조’를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박교수는 ‘길담’이 위치한 통인동을 “서울에서도 기운이 좋은 곳”이라고 했다.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등 주요 시민단체뿐 아니라 청와대,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한 주요 관공서들도 모두 걸어서 5~10분 거리에 있다. 그는 “이 좋은 기운에 가장 어울리는 게 바로 책방”이라며 웃었다. 대학가에서도 사라져가는 인문사회과학 책방을 경복궁 근처에 내는 그의 의중이 읽히는 대목이다.

“그분(공무원)들인들 어찌 목마름이 없겠습니까. 저는 그분들을 존중하고 신뢰합니다. 우리 시대가 경박하고 오염됐다면 저도 그 한 부분입니다. 큰 강물도 시원(始原)은 산속에 숨겨진 작은 옹달샘이거든요. 목마른 길손이 우연히 찾아왔다가 목을 축이고, 잠시 쉬었다 돌아가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고, 그 길을 지날 때 다시 들르고 싶어지는 곳. 그런 곳이 됐으면 합니다. 부산에 ‘인디고서원’이 있다면 서울에는 ‘길담서원’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그 지역 특색에 맞는 또 다른 ‘서원’들이 생겨나길 기대합니다.”


박성준 교수는
1940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부모와 생이별한 그의 어릴 적 소원은 “밥 한 그릇 배불리 먹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급사생활을 하며 독학으로 서울대 상대에 입학, ‘경제복지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김근태 의원과 부인 한명숙 전 총리가 동아리 후배다. 67년 한전총리를 미팅으로 만나 결혼한 박교수는 결혼 6개월 만에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출소 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아 2001년부터 성공회대에서 ‘평화학’ 강의를 해오고 있으며 비폭력평화물결과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 글 손제민·사진 우철훈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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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2-20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서점이 주는 편리성 때문에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직접 책을 뒤적이고
품에 안고 오는 맛이 사라졌습니다. '서원'이라는 표현이 절실하게 와 닿네요

글샘 2008-02-21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표지만 보고 작가만 보고 제목만 보고 책을 사게 되기 쉽죠.
적어도 머릿말이나 목차만이라도 읽고 나면 안 샀을 책들도 말입니다.
하기야... 온라인 서점 없었다면, 그나마도 안 봤을 공산이 크지만요.^^
아, 이분이 한명숙 총리 속썩였다던 그 분이군요. ^^

소나무집 2008-02-2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생각을 품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일반 서점에는 안 가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주인의 정성이 깃든 이런 서점이라면 들러보고 싶네요.

달빛푸른고개 2008-02-2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들께..
그간 제가 가본 서점 중에는 지금도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여수 중앙서점(입구쪽을 바라보면 포구가 보이는... 그리고 선창가에 있던 중앙동우체국...), 서귀포 우생당서점(고개를 내려가면 역시 바다가 펼쳐지는), 그리고 충주에 있는 '책이있는글터' 서점이 인상적이더군요. 글터서점은 지역에서 인문학과 좋은 아이들 책을 널리 읽혀보려는 주인장의 생각이 구석구석 배어있는 서점이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마을 늦가을

 

산을 태우던 단풍잎들도 모두 떨어지고

낙엽송만이 군데군데 노란 꽃 무더기

저 건너 성호네 밭의 옥수수 가리

햇살 아래 점점 맑아져 가는 공기를

대추나무 위 까치는  어떻게 느낄가.

염소들 푸른 기 남아 있는 풀들 보면

목 늘이며 쫓아가려는 이 늦가을.

 

 

 

해쑥

동생하고

쑥을 뜯으러 간다

언덕배기 쩔레 덤불 밑

자잘한 아카시아나무 가지 사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덤불 속 옷자란

해쑥을 뜯는다.

검부러기 골라 가며

한 개씩 한 개씩 뜯을 적마다

보드라운 해쑥을 건네주면

옆에서 기다리는 동생은

두 손으로 받으며

화 하고 웃는다

바구니에 담는다.

 

재혁이에時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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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오동꽃

오월이 오면

마당가에 오동꽃이 핍니다.

담 어귀 저 끝에서도

맡을 수 있는 짙은 꽃내.

 

공장 간 누나는 편지에다

지금쯤 오동꽃이 피었느냐고

몇번이나 물었습니다.

 

그 누나 떠올리면

누나에게서

오동꽃 내 나는 것만 같습니다.

 

내 몸 어딘가에도

오동꽃 내 스며들어

이다음 이다음 누군가가

그꽃내 맡을 수 있을까요.

 

2.가을 까치집

올봄 새끼 한배 키우고

내내 비워 둔가을 까치집

잎 떨군 감나무 가지들

꼬옥 감싸고 있다.

 

날마다 쓸고 닦지 않아도 되는

나무 꼭대기 까치네 집

바람으 맞아도 그만

비를 맞아도 그만

까치들 어디서 돌아오지 않는데

 

무슨 보물단지인 듯

잎 떨군 가지로

꼬옥 감싸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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