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특별기획](1)이소선의 ‘80년, 내가 살아온 이야기’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ㆍ“39년을 싸웠는데, 요즘 현실보면 억장이 무너져”
ㆍ이소선-오도엽 대담
참 모질게도 걸어왔다.
이소선씨(오른쪽)와 오도엽씨가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골목을 함께 걸어오고 있다. |정지윤기자
먼저 간 아들을 가슴에 묻고, 그 아들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뛰어든 지 39년. 사람들은 그녀를 ‘노동자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 그녀의 삶은 질풍의 시대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어머니, 할머니의 삶에 다름 아니다. 한국 노동운동사와 한국 현대사의 고갱이다.
신산(辛酸)한 그녀의 팔십 평생을 꼼꼼히 살려낸 이가 있다.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시인 오도엽씨. 지난 2년 동안 이씨와 함께 먹고 자고, 울고 웃으며 이씨가 들려준 이야기를 녹취했다. 그렇게 해서 지난해 나온 책이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후마니타스)이다. 사실 책은 이씨가 가슴 밑바닥부터 토해낸 이야기의 2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오씨는 5일부터 매주 3차례씩(월·목·금) 못다한 이야기들을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풀어낼 예정이다. 진눈깨비가 흩날렸던 지난달 29일 종로구 창신동 봉제골목 한쪽에 자리잡은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이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워냈다.
이소선 “사람이 똑같이 살 때까지, 죽으면 안돼 싸워야해”
오도엽 “어머니 삶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힘을 느낍니다”
오도엽=몸도 안 좋으신데 요즘도 유가협(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어머니들과 싸우러 가시죠.
이소선=무슨 일 있다고 하면 모여서 같이 가야지. 어제도 두 군데나 갔다 왔지. 추도식이 많아. 자식들 죽은 날짜 잊지 않으려고. 지금도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 보면 속이 아파. 내가 노동조합 18년, 유가협 20년을 했어. 주야장천 싸움하면서 얻어 맞고 잡혀가고…. 우리 아들이 죽었는데 우리야 죽으면 뭐 어떠냐면서 싸우지. 사실 시위 도중 경찰에게 많이 맞아서 지금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 오늘 같이 흐린 날은 온 몸이 쑤셔. 그래도 애쓰는 사람들 입장을 봐서 안 갈 수가 없지. 하나 하나 싸우면 안돼. 같이 싸워야지.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오도엽=지금까지 그렇게 해오신 데는 무슨 이유가 있으신 것 같아요. 사람들을 그리워하시고.
이소선=유가협 어머니들이 미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속에 열이 치밀어 돌아가시는 분이 많아. 그래서 ‘나도 아들 죽고 살고 있지 않으냐’고 얘기하고 두세 달 같이 살기도 해요. 서로 위로해주면서 울면 달래고 아프면 약 사주고 안 먹으면 죽 끓여주면서 같이 살지. 그러다 보니 밤에 잠을 못 자. 옛날 생각하다 보면 목숨이 길기도 하고 질기기도 해. 같이 싸운 분들 생각해보면 너무 고맙고 태일이 친구들 보면 얼마나 착한지 그 사람들이 태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지.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나요. 태일이가 얼마나 하다하다 못하니까 죽었겠어. 그때 아무 얘기 말고 자기 말만 들어달라고 하더라고. 자기가 죽은 뒤 어떤 유혹이 올지라도 엄마는 과감히 반대할 수 있다고, 나한테 해당하지 않는 돈이나 물질은 돌 같이 보라고. 말한 거 지켜주겠다고 했어. 현장 나와서 어떻게든 싸워야 된다고 생각했어. 그때 태일이 친구들과 학생들이 같이 해줬지요.
오도엽=어머니는 세상 일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항상 텔레비전을 켜놓고.
이소선=내가 두 달 동안 팔순 잔치 안한다고 했어요. 경제도 이렇고 서민도 죽어가고 비정규직도 많이 생기는데…. 사람들 죽는 거는 극단적이고 순간적이야. 올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잠이 안 와. 1970·80·90년대 이 산을 넘으면 소외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 거라고, 얻어맞고 발로 차이고 감옥 가면서도 헤매고 다녔는데 이제 보니 억장이 무너집디다. 경제는 점점 더 나빠지고 투쟁하는 것도 없어지면서 여러 가지가 작년부터 실망스러웠어. 사람들이 곧 죽게 생겼는데 대운하를 한다 무엇을 한다는데 그 돈 가지고 중소기업을 살리고, 비정규직을 줄일 생각은 안해요. 경제가 악화되면 생기는 건 비정규직이야. 이제는 싸우면 될 거다라는 말도 못나오는 세상이 됐으니까 이제까지 살지 않았으면 그런 거 안 보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고. 없는 사람들이 또 짐승처럼 되어가는 현실이 올까봐 자다가도 놀라.
오도엽=어머니는 항상 ‘내가 이런 음식을 먹고 이런 옷을 입어도 되나’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전태일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셨는지…. 가족까지 그런 굴레에 묶여 있는 것 같고요. 자식들이 무슨 행동을 하면 어머니에게 전화가 오니까요. 어머니도 자식들에게 항상 행동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세요.
이소선=알아서들 하겠지. 도둑질만 안하고 살면.
오도엽=무슨 일이 있으면 몸이 아픈데도 가시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이제는 좀더 젊은 분들이 해야할 부분인데 아직까지 어머니 같은 분이 하고 계시니.
이소선=축소되고 ‘찌끄러기’ 되어가는 게 안타깝지. 옛날 거리로 나간 학생들이 잡혀가면 <전태일 평전>을 보고 운동하게 됐다고 했어요. 국가보안법이 없어지고 감옥 가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더 이상 죽으면 안돼.
오도엽=2년 전 어머니께 인사하러 갔을 때 ‘내가 1, 2년 더 살겠어’ 하셨을 때 전율이 들었습니다. ‘노동자의 어머니’로 항상 쩌렁쩌렁 힘있는 모습이었는데…. 어머니의 기억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노동운동가나 어머니를 잘 알고 있는 분들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전태일의 어머니’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똑같은 고민을 가진 분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거든요. 그때부터 어머니와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몰래 녹음을 했어요.
이소선=어휴, 녹음을 한다고 말이나 했나. 혼자 감추고 했는데. 녹음한다고 했으면 좀더 잘했을 걸.
오도엽=어머니는 오히려 한밤중에 기억력이 좋아지고 이야기하는 힘이 생기시는 것 같아요. 한번 말씀을 하시면 4~5시간을 하시고. 제가 피곤해서 눈을 감을 때마다 ‘니 자냐’며 뭐라 하시고.
이소선=70년대 미싱하던 열네살, 열다섯살 아이들이 밤이면 우리 집에 왔어. 월급을 제대로 못받았지. 나도 태일이 죽고 직접 가보고 나서야 형편을 알았어. 기가 차서…. 얘기를 듣다 보면 너무 한 거야. 태일이가 나한테 좀 가르쳐 준 게 있거든. 잘못 없는데 해고하면 부당노동행위다, 너희가 모여 투쟁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청계노조를 7평 사무실에 만들었지. 그때만 해도 사람 취급을 안했어. 그래서 모여 가지고 농성해 보자고 얘기했지. 몇 년을 잠 안자고 이야기했으니까 이게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밤이면 정신이 나고 낮이면 빌빌해.
오도엽=책 쓰면서 어머니하고 다투기도 했지요. 어머니는 당신이 부각되는 걸 말리셨습니다. 유가협이나 청계노조를 나 혼자 했느냐면서요. 또 사람 관계라는 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데 그런 건 쓰지 말라고.
이소선=그분들 없었으면 내가 무엇을 했겠어. 그래서 지겹도록 고맙다고 했지요. 모든 사람이 집에 발만 디디는 것도 고맙지. 이야기를 같이 한 것도 고맙고. 길에서 만나면 얼마나 고마운지.
오도엽=책에는 구술한 내용의 20분의 1밖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경향신문 연재에선 책에서 밝히지 못했던 얘기들이나 어머니의 소중한 얘기들을 담을 겁니다. 어머니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굵직한 사건마다 하신 역할이 있으시니까 좀 알려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노동운동이나 근현대사 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제가 옆에서 보면 사람들이 어머니를 뵈러 오면 무릎을 꿇고 앞에서 말을 잘 못하고 거리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저녁 먹었는지 챙겨주시고 방에 불 넣고 자는지 챙기고 잔정이 많더라고요. 사람을 그리워하시고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시고.
이소선=사람보다 귀중한 게 또 어디 있겠어.
오도엽=지금 시대가 어렵고, 사회가 후퇴한 거 같다고 하는데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새로운 희망과 힘을 느꼈어요. 어머니 삶이 희망을 주고 응원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어머니 삶은 과거로 묻혀진 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마음가짐과 힘이 될 수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세상이 힘들다가 아니라 세상을 적극적으로 바꿔갈 수 있는 힘이 됐으면 합니다.
이소선=죽는 힘을 다해 싸워야지 죽으면 안돼. 싸우는 것도 다 같이 싸워야지. 내가 노동자도 학생도 같이 싸워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거든. 처음 노조 만들 때 내가 힘이 있었나. 태일이 친구들이 해줬지요. 정보부인지 형사들이 와서 돈 줄 테니 태일이 장례식 하자고 하니까 막 (속이) 끓더라고. 그 아까운 아들, 사랑하는 아들 뼈하고 피를 팔아서 살지 않았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안 받았지. 말 안듣고 버티니까 계속 탄압하고. 태일이 풀빵 사 먹여 줬던 시다들, 태일이가 사랑했던 그 얘들이 태일이 죽었다고 하니까 ‘그 오빠가 죽었다고요’ 하면서 울더라고. 지금 힘없는 사람을 이리저리 발로 차버리고 권력이나 돈 있는 사람 걸어가는 세상 만들자는데 얼마나 야비하고 치사하고 분통터지는지. 사람이 똑같이 같이 살자. 이거 100%는 못하겠지만 양심은 조금 가지고 살아야하지 않겠어.
▶오도엽 서울의 한 대학을 다니다 1989년부터 창원으로 내려가 공장에 다녔다. 오랜 수배와 감옥생활을 겪었다. 97년 ‘굵어야 할 것이 있다’로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고 99년 시집 <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를 냈다. 최근까지 농민과 노동자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에 몰두해왔다.
▶이소선‘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노동자의 어머니’. 1970년 11월13일 “노동자도 사람이다”라며 분신한 아들의 뜻을 이어 청계피복노조를 만드는 등 평생 노동·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그 탓에 180차례 ‘범법자’가 됐고 3번 감옥에 갔다. 86년 창립된 유가협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