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가 찾던 '자루 없는 도끼'는?
‘내 마음 하나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소요산 자재암
  임윤수(zzzohmy) 기자   
▲ 자재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설파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에 대한 설화가 흐르는 곳이다.
ⓒ 임윤수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못 이룰 것이 하나도 없고 안 될 일도 하나 없을 겁니다. 마음대로라면 세상을 호령하는 군주가 못될 것도 없고, 마음에 두고 있는 절색미인과 흥건한 사랑타령 한 번 못 나눌 일도 없습니다.

역시 마음대로라면 요즘 밤잠을 설치게 하는 월드컵대회에서도 그깟 16강이나 4강이 아니라 우승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실상에선 담배를 끊거나 술을 안 마시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거창하게 의지력이니 뭐니 말들을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쉬운 일일수도 있고 어려운 일일수도 있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냥 마음 편하게 '안 먹고 안 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어려울 일도 아닐 텐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마음이니 마음의 실체가 궁금합니다.

이뿐입니까. 세상에 태어나 자각하는 순간부터 마음대로 되었던 일이 한 번인들 있었을까 싶습니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졸음이 쏟아지니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고, 잊어야 하는데 잊어지지 않으니 마음 아닌 마음과 육신을 포함한 매사가 마음가는 길에 걸림돌일 뿐입니다.

▲ 일주문을 들어서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원효폭포가 발길을 맞아준다.
ⓒ 임윤수
마음은 유형도 무형도 아닙니다.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게 마음입니다. 딱히 마음의 실체를 설명하라고 하면 궁색한 설명들이 반복되지만 없다고 단정해 버릴 수도 없는 게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냉철한 판단력을 근거로 한 이성(理性)일 수도 있고, 펑펑 눈물 흘리고 박장대소하게 하는 감성(感性)일 수도 있습니다. 살육을 서슴지 않는 잔인함 일수도 있고, 미물의 상처에도 눈물 흘려주는 온정 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참 변덕스럽습니다. 상대적이란 표현을 쓸 수도 있지만 변덕스럽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 듯싶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물결처럼 상황과 감정에 따라 잠시도 멈추지 못하기에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한국의 고승을 대표하는 한 분이 원효대사입니다. 그 원효대사가 깨달음의 결정체로 남긴 일성(一聲)은 다름 아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어렵게 얘기할 것 없이 '모든 일은 마음이 만들고, 마음에 따라 생긴다', 한마디로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지극히 평범한 말입니다.

▲ 바위와 돌담이 만들어낸 진입로가 절 찾아가는 길을 장식하고 있다.
ⓒ 임윤수
자재암(自在庵)은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逍遙山)에 있는 작은 암자로 654년, 신라 무열왕 1년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합니다. 한 때 소요사나 영원사로 불리기도 했지만, 1909년 성파스님과 제암스님이 절을 중창하며 본래의 절 이름이었던 자재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자재암이 있는 소요산은 그 입구부터가 단풍나무 일색입니다. 한여름 단풍은 그 빛이 푸른색 일색이지만 가을이 되면 일품일 가을단풍이 그려집니다. 설악의 단풍이 좋고 내장산 단풍이 좋다고들 하지만 자재암으로 가는 소요산 자락에서 만나게 되는 단풍 또한 여타의 절경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 한 번 들어가면 깨우치지 않으면 나오지도 않을 듯 출입문이 굳어만 보인다.
ⓒ 임윤수
매표소를 겸한 일주문을 들어서 저만치 시원하게 물줄기 쏟아내는 원효폭포가 보입니다. 움푹 파인 물웅덩이로 물이 내려앉습니다. 어떤 물은 미끄럼 타듯 바위에 기대 흐르고 어떤 물은 내려꽂히듯 곧장 떨어지며 하얀 물방울을 주변에 뿌려 댑니다. 물이 아주 맑습니다. 깊지 않은 웅덩이지만 주변의 산세를 거울처럼 담아 맑게 비추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반질반질 다듬어진 작은 돌들이 알몸으로 드러납니다. 잠시 멈춰 옥죈 신발을 풀어놓고 발을 담그니, 그 시원함과 청아함이 온몸으로 전해집니다.

▲ 자재암 안쪽으로 석굴법당 나한전이 보인다.
ⓒ 임윤수
자재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속리교(俗離橋)를 건넙니다. 속세를 떠나 피안의 세계로 접어든다는 속리교를 건너면 주변부터가 달라집니다. 지금껏 걸었던 진입로가 평평하고 잘 포장된 길이었다면 피안으로 접어든 속리교 저쪽은 가파른 계단에 울퉁불퉁한 바윗길입니다.

속리교를 건너 조금 올라서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이정표를 보니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공주봉으로 올라 소요산 주능선을 타게 됩니다. 자재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좌측으로 나 있는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폭포의 물줄기가 만들어 내는 리듬 없는 타음이 내림목탁소리처럼 들립니다.

자재암은 원효대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던 요석공주의 설화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가 불경을 공부하려던 원효는 잘 알려진 일화처럼,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간밤에 마셨던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骸骨)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고 토악질을 하며 '일체유심조'를 깨닫게 됩니다.

그 일을 계기로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고 "자신의 마음밖에 따로 법이 없음"을 알게 된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평범한 교리로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신분 고하나 귀천에 관계없이 뭇 대중과 어울리며 알기 쉽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니 오줌싸개에 코흘리개까지도 원효를 통해 부처님을 알게 하였다고 합니다.

원효, 자루 없는 도끼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다

그런 원효가 '누가 자루 없는 도끼 빌려주면 하늘 떠받칠 재목 만들겠노라'고 큰소리치다 만난 사람이 김춘추의 둘째 누이인 요석(瑤石) 공주입니다. 여기서 자루 없는 도끼란 생명의 근원지인 어머니들의 생식기인 자궁을 표현한 말인 듯하니, 부부의 연을 원했다고 생각됩니다. 첫 남편을 백제전투에서 잃어 과부가 되었지만 매력 있고 불심 깊었던 요석공주가 원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들의 만남은 인연인지 필연인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 나한전은 자연동굴에 앞면을 쌓아 조성하였다.
ⓒ 임윤수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으며 하늘처럼 떠받칠 재목을 낳으니, 그가 바로 신라 10현 중 한 명인 '설총'입니다. 그러나 어쩌리, 속가의 연을 끊지 않고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는 걸림돌인 걸. 부부의 연을 맺어 여체를 탐욕하며 끈끈한 육신의 정을 나누던 원효는 홀연히 속세와 연을 끊고 수행의 길을 찾아드니, 그 수행의 은둔지가 바로 이 소요산이라 합니다.

졸지에 남편이 속세를 떠남으로 또다시 과부 아닌 과부가 된 요석공주는 원효대사와 사이에 낳은 설총을 데리고 이곳 소요산으로 들어와 공주봉 기슭에 살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흘러간 시대의 여인이지만 지아비에 대한 그리움이 어떠했으며, 홀어미로 자식을 키워야 하는 한탄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요석공주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금의 일주문 근처로 설총을 데려와 아버지인 원효대사가 수도하는 곳을 향해 세 번씩 절을 시키고 학업에 정진토록 하는 인고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 나한전 안으로 들어가면 전면으로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고, 동굴 천장은 연등으로 장엄되어 있다.
ⓒ 임윤수
속리교 건너 이정표가 있던 갈림길, 공주봉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작은 계곡에 흐르는 물에 잠겨있던 바위가 붉은 색을 띠는 것은 혹시 요석공주의 피눈물이며, 아녀자의 한탄이 피멍으로 남은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논리적으로야 바위가 철광석이거나 점토질 바위라 붉게 보인다고 설명되겠지만, 요석공주가 생활하던 공주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라 생각하니 그렇게 생각됩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뒤돌아보니 설총이 절을 올렸다는 일주문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계곡 건너 쪽으로 자재암에 또 다른 자취를 남기셨을 스님들의 흔적인 부도와 탑비가 석축으로 단을 높인 작은 텃밭에 좌선이라도 하듯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 나한전에서 바라 본 자재암은 조용하기만 하다.
ⓒ 임윤수
자재암은 가파른 비탈에 매달린 산제비집처럼 길쭉한 지형에 전각들이 나란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터가 넉넉하진 않으나 궁색하지도 않습니다. <自在庵> 편액을 달고 있는 ┎ 형태의 전각은 협소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뒤쪽 지붕을 덧대 그 처마가 바위에 맞닿아 있습니다.

전각 오른쪽으로 대웅전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또 한 채의 전각이 있습니다. 대웅전 왼쪽엔 삼성각으로 올라가는 사이길 계단이 있습니다. 이렇게 일렬로 늘어선 듯 나란한 전각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쌍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등이 있습니다. 그 안쪽으로 원효대사가 수행하였던 고행의 공간이며 삶의 공간이었던, 바로 그 자연동굴에 조성된 나한전 석굴법당이 있습니다.

▲ 동굴법당 나한전 바로 앞에도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는 폭포수가 있다.
ⓒ 임윤수
석굴법당 입구 오른쪽에 있는 감로수에는 자재암에 얽힌 또 하나의 설화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속세에서 부부의 연과 혈육의 연을 모두 끊고 동굴 앞 초가에서 수행을 하던 원효대사는 다시 한 번 파계의 유혹을 받았으나 이를 극복했다는 설화입니다.

원효, 또 한 번 여인의 유혹에 시험받다

몹시도 비가 나리 던 어느 날 원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참선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때 비를 흠뻑 맞아 여체의 관능적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미모의 여인이 비를 피해 원효가 있는 초가로 들어왔답니다. 그렇게 들어온 여인은 교태스런 미소와 관능적 몸놀림으로 원효를 유혹했지만, 원효는 마음의 미동 없이 수행에만 정진했다고 합니다.

이미 부부의 정을 맺어 애욕의 달콤함을 경험한 원효에게 관능적 여체의 몸놀림은 금욕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유혹이며 충동이었으나 원효는 이를 잘 극복한 것입니다.

원효는 나중에서야 그 교태스런 여인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출현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로부터 수행자로의 의지력을 시험받은 원효대사가 절하나 지으며, '내 마음 하나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自在庵>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나한전 오른쪽으로 촛대처럼 뾰족한 기암이 솟아있습니다. 어림잡아 촛대봉이려니 했더니 옥류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옥류봉 오른쪽으로는 또 하나의 시원스런 폭포가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나한님을 모신 굴법당이 있고, 그 옆이 촛대 형상의 옥류봉이며, 그 옆으로 옥이 흐르는 듯 맑은 물줄기가 끝이지 않는 옥류폭포가 있습니다.

삼라만상이 자재(自在)인데 인간만이 부자재(不自在)로다

쏟아진 물줄기는 내려온 순서 없이 작은 웅덩이에서 얼기설기 섞여 다시 아래로 흐릅니다. 웅덩이 아래로 뻗어 가는 계곡이 워낙 좁다보니 넓지 않은 웅덩이조차 넓게만 보입니다. 넓게 보이고 좁게 보이는 것도 역시 상대적이며 마음먹기에 달린 것임을 알게 됩니다.

▲ 지형을 따라 한일자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 자재암이 자재롭게만 보인다.
ⓒ 임윤수
불끈 솟은 바위도 높은 산에 비하니 그 높이가 별 것 아니고, 높게 보이던 폭포수도 그 위에 오르니 발아래 개울물일 뿐입니다. 원효대사가 깨우침으로 설한 그 '일체유심조'가 입술에서만 맴돌 뿐 자신의 것이 되질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들여다본 물 속 바위는 여전히 붉고, 그 붉은 색이 지아비를 그리워하며 흘린 요석공주의 피눈물로 보이는 건 마음이 그러하기에 그렇게 보였을 겁니다.

흐르는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니 자재(自在)하고, 밝혀진 촛불은 수명 다해 꺼지니 자재(自在)합니다. 삼라만상의 자연은 모두가 자유자재이거늘 별 것 아닌 인간들만이 사소한 것도 마음의 덧에 걸어 그 마음에 갇혀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2006-06-15 15:01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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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Corea'가 'Korea'로 바뀐 건 일본 때문?
"일본 때문이 아니라 발음과 철자법상 이유 때문"
텍스트만보기   박영민(chiwoo1206) 기자   
ⓒ 박영민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맞아 대한민국이 'Corea' 응원 열풍으로 들썩이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제 표기법은 분명히 Korea다. 그렇다면 왜 '붉은 악마'를 비롯한 많은 축구팬들이 Korea 대신에 Corea를 외치고 있는 것일까?

일본이 일제 시대 때 Corea를 Korea로 바꿔버렸다는 이야기가 언제부터인가 떠돌고 이에 반발한 젊은이들이 Corea를 즐겨 쓰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한국(Korea)이 국제 대회에서 자신들(Japan)보다 먼저 입장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근성 때문에 한국의 'C'가 'K'로 바뀌었다는 이러한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존재하지 않던 나라, 한국

1910년 한일병합 이후 1945년 광복 때까지 약 35년간 이 지구상에 한국이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라가 망했어도 민족혼은 살아있었기에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은 늘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존재했지만 국제사회의 현실은 냉혹했다. 당시 국제법상으로 한국은 완전히 망한 나라,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또한 일본은 한국을 단순한 식민지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내선일체와 창씨개명을 통해 완전히 일본화하려고 했다. 아울러 해방 후 미국이 한반도에 38선을 그을 때조차 지도 어디에도 Korea라는 나라는 없었다. 미국은 Japan이라고 표기된 한반도에 38선을 그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한국의 국제 대회 입장 순서 같은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국제 대회에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서 뛰어야 했던 비운의 역사도 그 때문이다.

그대의 자존심이 상하는가?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그대의 민족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Corea에서 Korea로 바뀐 건 발음과 철자법상의 이유

우리나라의 존재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무역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당시 고려는 Corea, Korea, Coree, Korai 등으로 표기됐다. 북유럽 계통의 언어인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에서는 대체로 K로, 남유럽계통의 언어인 프랑스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등에서는 C로 표기되었다.

외국어 표기법에서 나라별·언어별로 발음과 철자법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몇 가지가 어느 정도 혼용되어 쓰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Thank you'를 우리말로 표기할 때 '쌩큐'와 '땡큐'를 모두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Corea와 Korea가 혼용되어 쓰이다가 점차 Korea를 중심으로 국제표기법이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고 한다. 당시에 발행된 잡지에 보면 이와 같은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나라의 이름은 고대에는 Scilla, Korai였고 500여년 동안 Chosen이었다. 지금은 Tai Han(편집자 주 : 대한)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Korea로 계속 부르고 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는 Korea가 철자 K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몇몇 다른 나라들은 여전히 C를 사용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K를 사용한다." ["Preface to first edition : A Chronological Index" 1901, Korea: Fact and Fancy, 1904]

"영어의 C나 K라는 글자는 Korea 언어로 ㄱ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이 글자는 한국어로는 '기역'으로 발음되지만 만약 우리가 C를 사용한다면 그 이름은 '시옷'으로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그 글자의 이런 번역으로서 C의 무용성은 Corea라는 철자법이 채용될 때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 The Korean Repository > 1897년 12월호]


즉 Corea가 Korea로 바뀐 것은 일제의 조작이나 침략에 의해서가 아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와 미국 국무성이 발음과 철자법상의 이유로 결정해 사용하기 시작한 뒤 점차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것이다. 다만 언어의 관행상, 한번 쓰이던 언어가 완전히 소멸되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Korea와 Corea는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함께 사용되고 있다.

Korea도, Corea도 맞다

Korea와 Corea 모두 우리나라를 바르게 표기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은 이 Korea 또는 Corea라는 국호를 무척 싫어했다는 것이다. 조선 왕조 입장에서 볼 때 그 명칭은 이미 없어진 나라(고려)의 국호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조선의 국호는 Chosen(Chosun)'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 민영익은 고종 황제를 'The King of Tah Chosun(대조선 국왕)'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근대국가로서 정체성과 국력이 미약했던 조선 왕조의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Korea 또는 Corea로 남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표기를 Korea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48년 UN본부가 뉴욕에 설치되고 UN총회가 그 곳에서 열리면서부터다. 이와 달리 1945년부터 1947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UN 총회가 열렸을 때는 한국은 Coree(혹은 Corea)로 표기됐다.

총회가 열리는 나라의 언어로 국호를 기록하다보니 파리에선 불어인 Coree로, 뉴욕에선 영어인 Korea로 표기했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다. 국제행사 때 한국 정부는 Korea라는 표기법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지난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때 이탈리아어의 한국 표기인 Corea가 쓰인 것과 같은 이유이다.

식민의 잔재는 피해의식만으로 청산되지 않는다. 식민 정책이 이 땅에 심어놓고자 한 것이 바로 열등감과 피해의식이었다.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물리쳐야 한다. 새로운 역사는 민족의 자신감 및 도전하고 창조하는 열정으로 다시 쓰일 것이다.

글쎄, Corea면 어떻고 Korea면 어떤가? 모두 우리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Scilla도 우리나라고 Chosen도 우리나라다. 우리는 모두 다 사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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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하다 징해 | 생각하기 2006/06/12 12:06 
  http://wnetwork.hani.co.kr/so38/3466  

그때도 세상은 온통 월드컵으로 난리였다.

그떄도 거리는 온통 붉은 물결로 넘실댔다.

 

그리고 두 개의 죽음이 있었다.

 

총과 대포가 쓰이며 많은 이들이 피 흘렸던 죽음과

손 쓸 새도 없이 무참히 찢겨져버린 어느 두 소녀의 죽음.

 

한 죽음은 온 국민이 슬퍼하며 추모했지만, 다른 죽음은 너무도 늦게 알아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분노했고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였다.

 

오는 6월 13일은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여중생 신효순, 신미선 양의 4주기이다.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는 이를 기리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촛불문화제가 있었다.

 

이날은 종일 비가 왔다. 지겹게도 왔고, 그래서 아무데도 가지 않고 마냥 집에만 있고 싶던 그런 날이었다.

 

솔직한 심정은, 다 귀찮았고 그냥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고 싶었다. 그래도 "촛불집회에 집중하자!"는 지침에 따라야하니까 '에휴..그냥 가야지 뭐..' 이런 맘으로 나는 광화문으로 갔다. 가는 길에도 비는 참 많이 왔고,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설마 이정도로 비가 오는데 하겠어...? 사람들이 과연 올까..?' 나는 반신반의하며 광화문에 도착했다. 그러게 비가 퍼붇는 와중에도 운영진분들이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 무대를 설치하고 점검하고 계셨다. 그리고,, 동아일보 앞은 각양각색의 우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마다 피를 피해가며 행사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징하다 , 징해!!"

 

나도 모르게 이 말부터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열정과 분노는, 악천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곳으로 모이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두 소녀의 영정에 꽃을 바치는 순서가 되자,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버렸다.

하늘이 감복했는지 거짓말처럼 그쳐버린 비를 보며 나는 또 한번 놀랐다.

 

사실 나는 집회에 참여할 때는 '내가 진정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참여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굉장히 확고하게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법안 관련 집회에 참가하자는 제의를 받으면 "그래, 그 뜻과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나는 갈 수 없다."라고 거절한다.

 

2002년 당시 나는 분명 분노했다. 그러나 그 크기는 크지 않았다. 난 단지 진실을 알고 싶어서 한겨레21을 봤고, 인터넷을 뒤졌다. 촛불집회? 가야할 것 같았지만 가지 않았다. 내 할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

 

사람은 한순간에 변하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2002년의 나와 다를 바가 별로 없다.

 

지금껏 내가 필넷에서 쓴 글을 보면, 이번 추모제 참가를 꺼렸다는 얘기에 "그럼 그동안 혼자 정의로운 척  한거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또 한번 솔직해진다면, 분명 두 소녀의 죽음에는 안타까워하고 슬퍼했지만 그 분노는 크지 않았고 참가하고 싶다는 의지 또한 불분명했기에 나는 무척 투덜대며 갔었다.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무척 놀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자. 금요일밤, 심야토론보다 월드컵 개막식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집중한다. 비 내리는 광화문으로 모이기보다는 집에서 쉬기를 원한다. 누구나 내 밥그릇이 더 중요한 세상이다. 이 사람들이 과연 비겁한 걸까? 아니다, 철저히 내게 이익이 무엇인가를 따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럼 또 이런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민족의 운명이 바람앞의 등불같은 상황에서 나만 잘 살면 된다고? 그렇다면, '민족 공동체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다.'라는 걸 설득시켜야한다는 거다. 그저 '주한미군은 물러가라!',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자!'라고 외치기만 할 게 아니라 좀더 전투적으로 알리고 이해시켜야한다는 것이다.

 

남들과 평택 얘기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얘기는 "그거 근데 외부세력이 쓸데없이 나서는 거 아니냐?", "한총련애들이 앞장서지 않냐?"이다.  "왜 외부세력이 나서는 걸까?"에 대한 얘기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렵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분들이 계시기에 세상은 이래저래 변화해 간다. 하지만 더이상 '그들만의 싸움'이 되어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다.

 

한번에 "와-!!"하고 불붙는 우리의 근성은, 쉽게 촛불을 밝히고 미군을 규탄했지만 쉽게 그 촛불을 꺼뜨리기도 했다.

 

4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져야 한다. 전 국민적 지지 없이는 제2,제3의 효순이 미선이가 나올 수 밖에 없다. 대추리, 도두리가 대한민국 전역이 될 수 밖에 없다. 모든 영역이 IMF때와 마찬가지라는 한미 FTA가 체결될 수 밖에 없다.

 

"징하다 징해"라고 느꼈던 , 그래서 내가 감동했던 그 근성과 열정을 밖으로도 좀 돌려달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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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에 '권장 대상' 적어 주세요!
우리 아이들에게 책 골라주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장익준(goket) 기자   
아이들 책 고르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아무래도 부모 마음이라는 것이 일단 교육 효과를 따지게 되고, 교육 찾다가 너무 딱딱해서 아이가 흥미를 잃을까 염려도 하고, 그래서 좀 재미난 것을 찾다가 다시 교육 효과를 따지며 방황하는 식이다.

가능하면 서점을 찾아 직접 보고 고르려고 하지만, 어떨 때는 서평을 믿고 그냥 인터넷 주문을 하기도 하는데 예상과 다른 책이 도착해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미리보기로 앞쪽을 보고 주문을 했는데, 뒤쪽에 아이 나이에 비해 강도 높은 내용이 있어 당황한 일도 있었다.

서점을 운영하는 친구 말을 들어보면, 경기 침체도 있고 사회 분위기도 가라앉은 편이어서 딱 세 종류의 책만 나간다고 한다. '학생들 참고서', '어른들 재테크', 그리고 '아이들 책'인데 특히 아무리 절약하는 사람도 아이들 책은 사기 때문에 아이들 책 펴내는 출판사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래저래 아이들 책 고르기는 갈수록 어려워질 모양이다.

부모들은 일단 안전하게 권장도서를 중심으로 손이 가기 마련이고, 서평란에서 좋게 평가한 책들, 다른 부모들이 추천하는 책들을 고르게 마련이다. 또 마음에 드는 출판사를 몇 정해서 그 출판사들 책만 사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들 책을 고르는 입장에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 '이게 내 아이에게 맞을까'하는 문제다. 대략 살펴보고 결정하기는 하지만 몇 살 정도 되는 아이에게 알맞다거나, 어떤 책을 읽은 아이라면 읽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이 붙어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 <동아일보>는 어린이 책 서평에 '권장 대상'을 표시하고 있다.
ⓒ <동아일보> 홈페이지 화면캡쳐.
지금도 몇몇 서평란과 인터넷 서점들에서는 부분적이나마 이런 안내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서평의 경우 '읽히면 좋을 나이'를 표시하고 있고, 인터넷 서점 'YES24'의 경우 유아들 책을 '나이 별'로 소개하고 있다. 또 '교보문고'의 경우 자체 개발한 '리드(READ) 지수'를 바탕으로 책에도 등급을 매기고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등급을 주고 있다.

▲ 'YES24'는 유아용 책의 경우 나이 별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 YES24 홈페이지 화면캡쳐
▲ '교보문고'는 자체 개발한 '리드(READ) 지수'를 바탕으로 책을 추천한다.
ⓒ 교보문고 홈페이지 화면캡쳐
내가 제안하는 것은 여러 언론 매체나 인터넷 서점 등에서 서평을 쓰시는 분들이 책을 소개할 때 가능하면 '책을 추천하면 좋을 나이'를 밝혀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꼭 공인된 기준이 없더라도 여유 있는 범위로 제안해 준다면, 아이들 책을 고르는 많은 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각 출판사들도 '보도자료'를 낼 때나 책에 띠를 두르거나 할 때 '권장 나이'를 밝혀 준다면 책 판매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책을 사서 보신 부모님들도 자기 아이와 함께 책을 보고 내린 평가를 적극적으로 올리면 좋겠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책을 살 때 다른 부모들의 평가가 전문가 서평보다 요긴한 경우가 많은데, 선수(?)들이 제시한 권장 대상을 부모들과 아이들이 가다듬어 나간다면 이게 바로 이른바 '웹 2.0'이 아니겠는가.
기자는 국어능력인증시험(KET)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2006-06-10 19:26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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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보다 더 무서운 미군의 무기, "인종주의"
브라이언 드 팔마의 <전쟁의 사상자들>(1989년)

   
이라크 하티타에서 미해병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이 공개되면서 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미 미국 언론들도 하티타의 학살을 베트남 전쟁 당시 발생했던 미라이 마을 학살 사건과 비교하면서 이라크 전쟁의 도덕성에 대해 뒤늦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1968년 3월 16일, 미군 1개 중대가 베트남 중부 산악 지대의 미라이 마을에 들어가 마을 주민들을 광장에 몰아넣고 무차별 학살한 사건으로 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 중 최악의 사건으로 남아있다. 미군은 반나절만에 504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군 당국은 사건을 보고 받고도 국내의 반전여론에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 해 사건을 은폐한 사실이 추가로 밝혀져 미국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 사건은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을 상징하게 됐고 이후 반전평화운동은 더욱 확산됐다.

베트남 전쟁 뿐이 아니다. 하티타 사건의 보도와 때를 맞춰 AP통신은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미국의 오랜 주장을 뒤엎을 수 있는 문서를 발굴 공개했다.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해 공격할 수 있는 상부의 명령이 존재했다는 내용의 이 문서를 통해 노근리 학살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미군이 20세기 후반 개입한 대규모 전쟁, 한국, 베트남, 이라크 모두에서 미군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미군은 이 모든 ‘학살’이 전쟁 중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전쟁범죄가 미라이 마을 학살 사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는 단 한명이었지만 미라이 학살과 같은 해인 1968년 11월에 발생한 강간사건이 이듬해 10월 미국 주간지를 통해 보도됐을 때 그 비도덕성과 잔혹함에 많은 이들이 몸을 떨었다.

토니 미서브 하사가 지휘하는 5명의 미군 수색대는 장거리 정찰에 나가면서 인근 마을에서 처녀를 납치했다. 목적은 작전 기간인 5일 동안 끌고 다니며 강간하기 위해서였다. 처녀를 윤간한 병사들은 계획했던 대로 복귀하기 전 총살해 ‘증거’를 인멸했다.

그러나 병사들 중 한명인 스벤 에릭슨 일병이 죄책감에 못 이겨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중대장에게 털어놨으나 문제가 커질 것을 두려워 한 중대장은 없었던 일로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번엔 스벤슨 일병의 배신 사실을 알게 된 동료들이 오히려 살해위협을 하자 그는 군 수사기관에 범죄사실을 신고했다. 군사재판을 통해 범죄사실이 입증됐지만 미라이 사건과 마찬가지로 군당국은 내용이 민간에 흘러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사건은 발생한지 1년이 지나, 미라이 사건이 2년 만에 폭로되기 한달 전에 미국인들에게 공개됐다.

* * *

<언터쳐블>, <스카페이스> 등 사실에 기초한 영화를 선호하는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가 이 강간살인사건을 영화로 옮겼다. 1989년 제작된 영화 <전쟁의 사상자들>에서 마이클 J. 폭스는 스벤슨 일병역을, 숀 펜은 미서브 하사 역을 맡았다.

영화는 관련된 모든 인물들을 실명으로 처리했고, 영화 앞뒤에 미국으로 돌아온 스벤슨 일병이 사건의 참혹한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삶을 지속하는 장면을 덧붙인 것 이외에는 최대한 사건을 재현하고 있다. 다만 영화의 시간관계상 5일 동안 5명의 군인이 한명의 여성에게 저지른 잔학한 행위가 수사보고서처럼 상세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당시 사건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범죄행위와 시간까지 자세히 나와 있으니 아마 각본을 쓰기 위한 자료조사는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미국의 치부를 드러냈기 때문은 아니다. 영화는 1987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을 필두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할리우드의 자기고백 시리즈 중의 하나다. 80년대 후반 할리우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긴 침묵을 깨고 전쟁에 대한 영웅주의적 해석이나, ‘우리도 피해자’라는 식의 변명이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미군과 전쟁 자체에 대한 환멸을 담은 일련의 영화들을 쏟아냈다.

<전쟁의 사상자들>은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쟈켓>, 베리 레빈슨의 <굿 모닝, 베트남>, 존 어빙의 <햄버거 힐>, 패트릭 던컨의 <찰리 모픽> 등과 같은 시기에 발표됐다. 어쩌면 이처럼 비슷한 테마의 영화들이 유행처럼 제작됐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이 할리우드의 자기비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이후 <위 워 솔저스>처럼 영웅적이고 애국적인 베트남 전쟁 영화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스릴러의 대가로 이름 높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이 엉뚱한 실망을 안고 돌아간 것도 영화가 큰 평가를 받지 못한 원인 중 하나다. 감독으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감독이 그리려고 했던 것은 스릴러의 긴장감이 아니라 도덕성의 긴장이었던 것이다.

전쟁영화 답지 않게 영화를 통 털어 단 한명만 죽는 다는 사실도 관객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굳이 전쟁영화가 아니더라도 수십명이 간단하게 죽어나가는 할리우드의 영화의 강도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는 지루한 전쟁영화로 비쳐졌을 것이다. 이 경우 한계치에 다다른 할리우드의 선정성과 잔혹성을 탓해야 하겠다.

그러나 영화가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마이클 J. 폭스의 낮은 연기력이었다. 강간을 주도한 미서브 하사역의 숀펜과 함께 전통적인 선악구도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 것은 감독의 한계지만, 그 구도 안에서조차 숀펜의 연기에 압도되면서 방향을 찾지 못한 주인공은 영화를 산으로 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심하게 말하면 옷만 군복으로 갈아입었을 뿐이지 <백 투 더 퓨쳐>의 철부지 고등학생의 이미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주인공의 불만족스러운 연기 덕분에 영화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 병사의 개인적인 투쟁에 과도하게 초점이 맞춰지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작품이 돼버렸다.

   
▲ 미군 현장 조사단이 촬영한 학살 후의 미라이 마을, 전날 있었던 해방전선의 습격에 복수하기 위해 미군은 "작정하고" 미라이 마을에 들어갔다.
 
* * *

스벤슨 일병이 폭로한 강간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미라이 학살사건과 함께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에 실려 있다. 베트남 전쟁이 얼마나 부도덕한 전쟁이었는지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이 사건의 보고서를 소설 중간에 끼워 넣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 전쟁보다 더 광할한 지역에,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미군이 투입됐던 2차세계대전에서는 이런 식의 미군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다. 2차세계대전은 파시즘을 격멸하는 민주주의 전쟁이었고, 병사들의 도덕성도 더 높아서 그랬던 걸까?

해답은 노근리 학살과, 미라이 학살, 하티타 학살에 대한 미군 보고서에 들어있다. 이 사건들이 모두 “적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우발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도 군복을 입은 나치와 군복을 입지 않은 나치를 구분할 수는 없었다. 요컨대 미국과 미군이 가지고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이 이 전쟁범죄의 기본 원인인 것이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을 때 이미 일본군 스스로 자기 나라 국민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미군에게는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만약 미군이 일본 본토로 진격했다면 유럽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히틀러가 몇 달을 더 버텼다면 과연 트루먼 대통령이 히로시마 대신 함부르크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렸겠느냐는 의문은 과도한 의심이 아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편협한 나라였다는 증거가 남아있다. 전쟁기간동안 모든 일본계 미국인들을 서부의 수용소에 몰아넣은 것이다. 미국 시민권이 있는 일본계 이민자들이 스파이 행위를 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독일계 이민자들에게는 이런 의심이 제기되지 않았다. 이 일본인 수용소의 이야기는 알란 파커 감독이 1990년 <폭풍의 나날>이라는 영화로 제작했다.

미군의 전쟁범죄는 결코 우발적인 상황이 아니다. 인종주의로 무장한 미군이 가는 곳 그 어디서든 참혹한 학살은 계속 될 것이다.

2006년 05월 31일 (수) 12:19:03 장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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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6-06-1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패권의 몰락 - 혼돈의 세계와 미국>(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한기욱 정범진 옮김, 창비, 2004년 05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