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세상은 온통 월드컵으로 난리였다.
그떄도 거리는 온통 붉은 물결로 넘실댔다.
그리고 두 개의 죽음이 있었다.
총과 대포가 쓰이며 많은 이들이 피 흘렸던 죽음과
손 쓸 새도 없이 무참히 찢겨져버린 어느 두 소녀의 죽음.
한 죽음은 온 국민이 슬퍼하며 추모했지만, 다른 죽음은 너무도 늦게 알아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분노했고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였다.
오는 6월 13일은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여중생 신효순, 신미선 양의 4주기이다.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는 이를 기리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촛불문화제가 있었다.
이날은 종일 비가 왔다. 지겹게도 왔고, 그래서 아무데도 가지 않고 마냥 집에만 있고 싶던 그런 날이었다.
솔직한 심정은, 다 귀찮았고 그냥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고 싶었다. 그래도 "촛불집회에 집중하자!"는 지침에 따라야하니까 '에휴..그냥 가야지 뭐..' 이런 맘으로 나는 광화문으로 갔다. 가는 길에도 비는 참 많이 왔고,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설마 이정도로 비가 오는데 하겠어...? 사람들이 과연 올까..?' 나는 반신반의하며 광화문에 도착했다. 그러게 비가 퍼붇는 와중에도 운영진분들이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 무대를 설치하고 점검하고 계셨다. 그리고,, 동아일보 앞은 각양각색의 우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마다 피를 피해가며 행사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징하다 , 징해!!"
나도 모르게 이 말부터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열정과 분노는, 악천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곳으로 모이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두 소녀의 영정에 꽃을 바치는 순서가 되자,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버렸다.
하늘이 감복했는지 거짓말처럼 그쳐버린 비를 보며 나는 또 한번 놀랐다.
사실 나는 집회에 참여할 때는 '내가 진정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참여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굉장히 확고하게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법안 관련 집회에 참가하자는 제의를 받으면 "그래, 그 뜻과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나는 갈 수 없다."라고 거절한다.
2002년 당시 나는 분명 분노했다. 그러나 그 크기는 크지 않았다. 난 단지 진실을 알고 싶어서 한겨레21을 봤고, 인터넷을 뒤졌다. 촛불집회? 가야할 것 같았지만 가지 않았다. 내 할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
사람은 한순간에 변하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2002년의 나와 다를 바가 별로 없다.
지금껏 내가 필넷에서 쓴 글을 보면, 이번 추모제 참가를 꺼렸다는 얘기에 "그럼 그동안 혼자 정의로운 척 한거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또 한번 솔직해진다면, 분명 두 소녀의 죽음에는 안타까워하고 슬퍼했지만 그 분노는 크지 않았고 참가하고 싶다는 의지 또한 불분명했기에 나는 무척 투덜대며 갔었다.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무척 놀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자. 금요일밤, 심야토론보다 월드컵 개막식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집중한다. 비 내리는 광화문으로 모이기보다는 집에서 쉬기를 원한다. 누구나 내 밥그릇이 더 중요한 세상이다. 이 사람들이 과연 비겁한 걸까? 아니다, 철저히 내게 이익이 무엇인가를 따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럼 또 이런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민족의 운명이 바람앞의 등불같은 상황에서 나만 잘 살면 된다고? 그렇다면, '민족 공동체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다.'라는 걸 설득시켜야한다는 거다. 그저 '주한미군은 물러가라!',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자!'라고 외치기만 할 게 아니라 좀더 전투적으로 알리고 이해시켜야한다는 것이다.
남들과 평택 얘기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얘기는 "그거 근데 외부세력이 쓸데없이 나서는 거 아니냐?", "한총련애들이 앞장서지 않냐?"이다. "왜 외부세력이 나서는 걸까?"에 대한 얘기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렵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분들이 계시기에 세상은 이래저래 변화해 간다. 하지만 더이상 '그들만의 싸움'이 되어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다.
한번에 "와-!!"하고 불붙는 우리의 근성은, 쉽게 촛불을 밝히고 미군을 규탄했지만 쉽게 그 촛불을 꺼뜨리기도 했다.
4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져야 한다. 전 국민적 지지 없이는 제2,제3의 효순이 미선이가 나올 수 밖에 없다. 대추리, 도두리가 대한민국 전역이 될 수 밖에 없다. 모든 영역이 IMF때와 마찬가지라는 한미 FTA가 체결될 수 밖에 없다.
"징하다 징해"라고 느꼈던 , 그래서 내가 감동했던 그 근성과 열정을 밖으로도 좀 돌려달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