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Corea'가 'Korea'로 바뀐 건 일본 때문?
"일본 때문이 아니라 발음과 철자법상 이유 때문"
텍스트만보기   박영민(chiwoo1206) 기자   
ⓒ 박영민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맞아 대한민국이 'Corea' 응원 열풍으로 들썩이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제 표기법은 분명히 Korea다. 그렇다면 왜 '붉은 악마'를 비롯한 많은 축구팬들이 Korea 대신에 Corea를 외치고 있는 것일까?

일본이 일제 시대 때 Corea를 Korea로 바꿔버렸다는 이야기가 언제부터인가 떠돌고 이에 반발한 젊은이들이 Corea를 즐겨 쓰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한국(Korea)이 국제 대회에서 자신들(Japan)보다 먼저 입장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근성 때문에 한국의 'C'가 'K'로 바뀌었다는 이러한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존재하지 않던 나라, 한국

1910년 한일병합 이후 1945년 광복 때까지 약 35년간 이 지구상에 한국이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라가 망했어도 민족혼은 살아있었기에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은 늘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존재했지만 국제사회의 현실은 냉혹했다. 당시 국제법상으로 한국은 완전히 망한 나라,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또한 일본은 한국을 단순한 식민지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내선일체와 창씨개명을 통해 완전히 일본화하려고 했다. 아울러 해방 후 미국이 한반도에 38선을 그을 때조차 지도 어디에도 Korea라는 나라는 없었다. 미국은 Japan이라고 표기된 한반도에 38선을 그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한국의 국제 대회 입장 순서 같은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국제 대회에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서 뛰어야 했던 비운의 역사도 그 때문이다.

그대의 자존심이 상하는가?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그대의 민족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Corea에서 Korea로 바뀐 건 발음과 철자법상의 이유

우리나라의 존재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무역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당시 고려는 Corea, Korea, Coree, Korai 등으로 표기됐다. 북유럽 계통의 언어인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에서는 대체로 K로, 남유럽계통의 언어인 프랑스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등에서는 C로 표기되었다.

외국어 표기법에서 나라별·언어별로 발음과 철자법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몇 가지가 어느 정도 혼용되어 쓰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Thank you'를 우리말로 표기할 때 '쌩큐'와 '땡큐'를 모두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Corea와 Korea가 혼용되어 쓰이다가 점차 Korea를 중심으로 국제표기법이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고 한다. 당시에 발행된 잡지에 보면 이와 같은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나라의 이름은 고대에는 Scilla, Korai였고 500여년 동안 Chosen이었다. 지금은 Tai Han(편집자 주 : 대한)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Korea로 계속 부르고 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는 Korea가 철자 K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몇몇 다른 나라들은 여전히 C를 사용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K를 사용한다." ["Preface to first edition : A Chronological Index" 1901, Korea: Fact and Fancy, 1904]

"영어의 C나 K라는 글자는 Korea 언어로 ㄱ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이 글자는 한국어로는 '기역'으로 발음되지만 만약 우리가 C를 사용한다면 그 이름은 '시옷'으로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그 글자의 이런 번역으로서 C의 무용성은 Corea라는 철자법이 채용될 때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 The Korean Repository > 1897년 12월호]


즉 Corea가 Korea로 바뀐 것은 일제의 조작이나 침략에 의해서가 아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와 미국 국무성이 발음과 철자법상의 이유로 결정해 사용하기 시작한 뒤 점차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것이다. 다만 언어의 관행상, 한번 쓰이던 언어가 완전히 소멸되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Korea와 Corea는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함께 사용되고 있다.

Korea도, Corea도 맞다

Korea와 Corea 모두 우리나라를 바르게 표기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은 이 Korea 또는 Corea라는 국호를 무척 싫어했다는 것이다. 조선 왕조 입장에서 볼 때 그 명칭은 이미 없어진 나라(고려)의 국호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조선의 국호는 Chosen(Chosun)'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 민영익은 고종 황제를 'The King of Tah Chosun(대조선 국왕)'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근대국가로서 정체성과 국력이 미약했던 조선 왕조의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Korea 또는 Corea로 남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표기를 Korea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48년 UN본부가 뉴욕에 설치되고 UN총회가 그 곳에서 열리면서부터다. 이와 달리 1945년부터 1947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UN 총회가 열렸을 때는 한국은 Coree(혹은 Corea)로 표기됐다.

총회가 열리는 나라의 언어로 국호를 기록하다보니 파리에선 불어인 Coree로, 뉴욕에선 영어인 Korea로 표기했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다. 국제행사 때 한국 정부는 Korea라는 표기법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지난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때 이탈리아어의 한국 표기인 Corea가 쓰인 것과 같은 이유이다.

식민의 잔재는 피해의식만으로 청산되지 않는다. 식민 정책이 이 땅에 심어놓고자 한 것이 바로 열등감과 피해의식이었다.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물리쳐야 한다. 새로운 역사는 민족의 자신감 및 도전하고 창조하는 열정으로 다시 쓰일 것이다.

글쎄, Corea면 어떻고 Korea면 어떤가? 모두 우리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Scilla도 우리나라고 Chosen도 우리나라다. 우리는 모두 다 사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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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하다 징해 | 생각하기 2006/06/12 12:06 
  http://wnetwork.hani.co.kr/so38/3466  

그때도 세상은 온통 월드컵으로 난리였다.

그떄도 거리는 온통 붉은 물결로 넘실댔다.

 

그리고 두 개의 죽음이 있었다.

 

총과 대포가 쓰이며 많은 이들이 피 흘렸던 죽음과

손 쓸 새도 없이 무참히 찢겨져버린 어느 두 소녀의 죽음.

 

한 죽음은 온 국민이 슬퍼하며 추모했지만, 다른 죽음은 너무도 늦게 알아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분노했고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였다.

 

오는 6월 13일은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여중생 신효순, 신미선 양의 4주기이다.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는 이를 기리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촛불문화제가 있었다.

 

이날은 종일 비가 왔다. 지겹게도 왔고, 그래서 아무데도 가지 않고 마냥 집에만 있고 싶던 그런 날이었다.

 

솔직한 심정은, 다 귀찮았고 그냥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고 싶었다. 그래도 "촛불집회에 집중하자!"는 지침에 따라야하니까 '에휴..그냥 가야지 뭐..' 이런 맘으로 나는 광화문으로 갔다. 가는 길에도 비는 참 많이 왔고,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설마 이정도로 비가 오는데 하겠어...? 사람들이 과연 올까..?' 나는 반신반의하며 광화문에 도착했다. 그러게 비가 퍼붇는 와중에도 운영진분들이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 무대를 설치하고 점검하고 계셨다. 그리고,, 동아일보 앞은 각양각색의 우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마다 피를 피해가며 행사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징하다 , 징해!!"

 

나도 모르게 이 말부터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열정과 분노는, 악천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곳으로 모이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두 소녀의 영정에 꽃을 바치는 순서가 되자,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버렸다.

하늘이 감복했는지 거짓말처럼 그쳐버린 비를 보며 나는 또 한번 놀랐다.

 

사실 나는 집회에 참여할 때는 '내가 진정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참여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굉장히 확고하게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법안 관련 집회에 참가하자는 제의를 받으면 "그래, 그 뜻과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나는 갈 수 없다."라고 거절한다.

 

2002년 당시 나는 분명 분노했다. 그러나 그 크기는 크지 않았다. 난 단지 진실을 알고 싶어서 한겨레21을 봤고, 인터넷을 뒤졌다. 촛불집회? 가야할 것 같았지만 가지 않았다. 내 할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

 

사람은 한순간에 변하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2002년의 나와 다를 바가 별로 없다.

 

지금껏 내가 필넷에서 쓴 글을 보면, 이번 추모제 참가를 꺼렸다는 얘기에 "그럼 그동안 혼자 정의로운 척  한거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또 한번 솔직해진다면, 분명 두 소녀의 죽음에는 안타까워하고 슬퍼했지만 그 분노는 크지 않았고 참가하고 싶다는 의지 또한 불분명했기에 나는 무척 투덜대며 갔었다.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무척 놀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자. 금요일밤, 심야토론보다 월드컵 개막식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집중한다. 비 내리는 광화문으로 모이기보다는 집에서 쉬기를 원한다. 누구나 내 밥그릇이 더 중요한 세상이다. 이 사람들이 과연 비겁한 걸까? 아니다, 철저히 내게 이익이 무엇인가를 따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럼 또 이런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민족의 운명이 바람앞의 등불같은 상황에서 나만 잘 살면 된다고? 그렇다면, '민족 공동체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다.'라는 걸 설득시켜야한다는 거다. 그저 '주한미군은 물러가라!',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자!'라고 외치기만 할 게 아니라 좀더 전투적으로 알리고 이해시켜야한다는 것이다.

 

남들과 평택 얘기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얘기는 "그거 근데 외부세력이 쓸데없이 나서는 거 아니냐?", "한총련애들이 앞장서지 않냐?"이다.  "왜 외부세력이 나서는 걸까?"에 대한 얘기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렵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분들이 계시기에 세상은 이래저래 변화해 간다. 하지만 더이상 '그들만의 싸움'이 되어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다.

 

한번에 "와-!!"하고 불붙는 우리의 근성은, 쉽게 촛불을 밝히고 미군을 규탄했지만 쉽게 그 촛불을 꺼뜨리기도 했다.

 

4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져야 한다. 전 국민적 지지 없이는 제2,제3의 효순이 미선이가 나올 수 밖에 없다. 대추리, 도두리가 대한민국 전역이 될 수 밖에 없다. 모든 영역이 IMF때와 마찬가지라는 한미 FTA가 체결될 수 밖에 없다.

 

"징하다 징해"라고 느꼈던 , 그래서 내가 감동했던 그 근성과 열정을 밖으로도 좀 돌려달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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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에 '권장 대상' 적어 주세요!
우리 아이들에게 책 골라주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장익준(goket) 기자   
아이들 책 고르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아무래도 부모 마음이라는 것이 일단 교육 효과를 따지게 되고, 교육 찾다가 너무 딱딱해서 아이가 흥미를 잃을까 염려도 하고, 그래서 좀 재미난 것을 찾다가 다시 교육 효과를 따지며 방황하는 식이다.

가능하면 서점을 찾아 직접 보고 고르려고 하지만, 어떨 때는 서평을 믿고 그냥 인터넷 주문을 하기도 하는데 예상과 다른 책이 도착해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미리보기로 앞쪽을 보고 주문을 했는데, 뒤쪽에 아이 나이에 비해 강도 높은 내용이 있어 당황한 일도 있었다.

서점을 운영하는 친구 말을 들어보면, 경기 침체도 있고 사회 분위기도 가라앉은 편이어서 딱 세 종류의 책만 나간다고 한다. '학생들 참고서', '어른들 재테크', 그리고 '아이들 책'인데 특히 아무리 절약하는 사람도 아이들 책은 사기 때문에 아이들 책 펴내는 출판사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래저래 아이들 책 고르기는 갈수록 어려워질 모양이다.

부모들은 일단 안전하게 권장도서를 중심으로 손이 가기 마련이고, 서평란에서 좋게 평가한 책들, 다른 부모들이 추천하는 책들을 고르게 마련이다. 또 마음에 드는 출판사를 몇 정해서 그 출판사들 책만 사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들 책을 고르는 입장에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 '이게 내 아이에게 맞을까'하는 문제다. 대략 살펴보고 결정하기는 하지만 몇 살 정도 되는 아이에게 알맞다거나, 어떤 책을 읽은 아이라면 읽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이 붙어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 <동아일보>는 어린이 책 서평에 '권장 대상'을 표시하고 있다.
ⓒ <동아일보> 홈페이지 화면캡쳐.
지금도 몇몇 서평란과 인터넷 서점들에서는 부분적이나마 이런 안내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서평의 경우 '읽히면 좋을 나이'를 표시하고 있고, 인터넷 서점 'YES24'의 경우 유아들 책을 '나이 별'로 소개하고 있다. 또 '교보문고'의 경우 자체 개발한 '리드(READ) 지수'를 바탕으로 책에도 등급을 매기고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등급을 주고 있다.

▲ 'YES24'는 유아용 책의 경우 나이 별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 YES24 홈페이지 화면캡쳐
▲ '교보문고'는 자체 개발한 '리드(READ) 지수'를 바탕으로 책을 추천한다.
ⓒ 교보문고 홈페이지 화면캡쳐
내가 제안하는 것은 여러 언론 매체나 인터넷 서점 등에서 서평을 쓰시는 분들이 책을 소개할 때 가능하면 '책을 추천하면 좋을 나이'를 밝혀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꼭 공인된 기준이 없더라도 여유 있는 범위로 제안해 준다면, 아이들 책을 고르는 많은 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각 출판사들도 '보도자료'를 낼 때나 책에 띠를 두르거나 할 때 '권장 나이'를 밝혀 준다면 책 판매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책을 사서 보신 부모님들도 자기 아이와 함께 책을 보고 내린 평가를 적극적으로 올리면 좋겠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책을 살 때 다른 부모들의 평가가 전문가 서평보다 요긴한 경우가 많은데, 선수(?)들이 제시한 권장 대상을 부모들과 아이들이 가다듬어 나간다면 이게 바로 이른바 '웹 2.0'이 아니겠는가.
기자는 국어능력인증시험(KET) 시행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2006-06-10 19:26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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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보다 더 무서운 미군의 무기, "인종주의"
브라이언 드 팔마의 <전쟁의 사상자들>(1989년)

   
이라크 하티타에서 미해병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이 공개되면서 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미 미국 언론들도 하티타의 학살을 베트남 전쟁 당시 발생했던 미라이 마을 학살 사건과 비교하면서 이라크 전쟁의 도덕성에 대해 뒤늦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1968년 3월 16일, 미군 1개 중대가 베트남 중부 산악 지대의 미라이 마을에 들어가 마을 주민들을 광장에 몰아넣고 무차별 학살한 사건으로 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 중 최악의 사건으로 남아있다. 미군은 반나절만에 504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군 당국은 사건을 보고 받고도 국내의 반전여론에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 해 사건을 은폐한 사실이 추가로 밝혀져 미국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 사건은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을 상징하게 됐고 이후 반전평화운동은 더욱 확산됐다.

베트남 전쟁 뿐이 아니다. 하티타 사건의 보도와 때를 맞춰 AP통신은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미국의 오랜 주장을 뒤엎을 수 있는 문서를 발굴 공개했다.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해 공격할 수 있는 상부의 명령이 존재했다는 내용의 이 문서를 통해 노근리 학살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미군이 20세기 후반 개입한 대규모 전쟁, 한국, 베트남, 이라크 모두에서 미군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미군은 이 모든 ‘학살’이 전쟁 중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전쟁범죄가 미라이 마을 학살 사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는 단 한명이었지만 미라이 학살과 같은 해인 1968년 11월에 발생한 강간사건이 이듬해 10월 미국 주간지를 통해 보도됐을 때 그 비도덕성과 잔혹함에 많은 이들이 몸을 떨었다.

토니 미서브 하사가 지휘하는 5명의 미군 수색대는 장거리 정찰에 나가면서 인근 마을에서 처녀를 납치했다. 목적은 작전 기간인 5일 동안 끌고 다니며 강간하기 위해서였다. 처녀를 윤간한 병사들은 계획했던 대로 복귀하기 전 총살해 ‘증거’를 인멸했다.

그러나 병사들 중 한명인 스벤 에릭슨 일병이 죄책감에 못 이겨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중대장에게 털어놨으나 문제가 커질 것을 두려워 한 중대장은 없었던 일로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번엔 스벤슨 일병의 배신 사실을 알게 된 동료들이 오히려 살해위협을 하자 그는 군 수사기관에 범죄사실을 신고했다. 군사재판을 통해 범죄사실이 입증됐지만 미라이 사건과 마찬가지로 군당국은 내용이 민간에 흘러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사건은 발생한지 1년이 지나, 미라이 사건이 2년 만에 폭로되기 한달 전에 미국인들에게 공개됐다.

* * *

<언터쳐블>, <스카페이스> 등 사실에 기초한 영화를 선호하는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가 이 강간살인사건을 영화로 옮겼다. 1989년 제작된 영화 <전쟁의 사상자들>에서 마이클 J. 폭스는 스벤슨 일병역을, 숀 펜은 미서브 하사 역을 맡았다.

영화는 관련된 모든 인물들을 실명으로 처리했고, 영화 앞뒤에 미국으로 돌아온 스벤슨 일병이 사건의 참혹한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삶을 지속하는 장면을 덧붙인 것 이외에는 최대한 사건을 재현하고 있다. 다만 영화의 시간관계상 5일 동안 5명의 군인이 한명의 여성에게 저지른 잔학한 행위가 수사보고서처럼 상세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당시 사건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범죄행위와 시간까지 자세히 나와 있으니 아마 각본을 쓰기 위한 자료조사는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미국의 치부를 드러냈기 때문은 아니다. 영화는 1987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을 필두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할리우드의 자기고백 시리즈 중의 하나다. 80년대 후반 할리우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긴 침묵을 깨고 전쟁에 대한 영웅주의적 해석이나, ‘우리도 피해자’라는 식의 변명이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미군과 전쟁 자체에 대한 환멸을 담은 일련의 영화들을 쏟아냈다.

<전쟁의 사상자들>은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쟈켓>, 베리 레빈슨의 <굿 모닝, 베트남>, 존 어빙의 <햄버거 힐>, 패트릭 던컨의 <찰리 모픽> 등과 같은 시기에 발표됐다. 어쩌면 이처럼 비슷한 테마의 영화들이 유행처럼 제작됐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이 할리우드의 자기비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이후 <위 워 솔저스>처럼 영웅적이고 애국적인 베트남 전쟁 영화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스릴러의 대가로 이름 높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이 엉뚱한 실망을 안고 돌아간 것도 영화가 큰 평가를 받지 못한 원인 중 하나다. 감독으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감독이 그리려고 했던 것은 스릴러의 긴장감이 아니라 도덕성의 긴장이었던 것이다.

전쟁영화 답지 않게 영화를 통 털어 단 한명만 죽는 다는 사실도 관객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굳이 전쟁영화가 아니더라도 수십명이 간단하게 죽어나가는 할리우드의 영화의 강도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는 지루한 전쟁영화로 비쳐졌을 것이다. 이 경우 한계치에 다다른 할리우드의 선정성과 잔혹성을 탓해야 하겠다.

그러나 영화가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마이클 J. 폭스의 낮은 연기력이었다. 강간을 주도한 미서브 하사역의 숀펜과 함께 전통적인 선악구도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 것은 감독의 한계지만, 그 구도 안에서조차 숀펜의 연기에 압도되면서 방향을 찾지 못한 주인공은 영화를 산으로 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심하게 말하면 옷만 군복으로 갈아입었을 뿐이지 <백 투 더 퓨쳐>의 철부지 고등학생의 이미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주인공의 불만족스러운 연기 덕분에 영화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 병사의 개인적인 투쟁에 과도하게 초점이 맞춰지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작품이 돼버렸다.

   
▲ 미군 현장 조사단이 촬영한 학살 후의 미라이 마을, 전날 있었던 해방전선의 습격에 복수하기 위해 미군은 "작정하고" 미라이 마을에 들어갔다.
 
* * *

스벤슨 일병이 폭로한 강간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미라이 학살사건과 함께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에 실려 있다. 베트남 전쟁이 얼마나 부도덕한 전쟁이었는지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이 사건의 보고서를 소설 중간에 끼워 넣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 전쟁보다 더 광할한 지역에,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미군이 투입됐던 2차세계대전에서는 이런 식의 미군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다. 2차세계대전은 파시즘을 격멸하는 민주주의 전쟁이었고, 병사들의 도덕성도 더 높아서 그랬던 걸까?

해답은 노근리 학살과, 미라이 학살, 하티타 학살에 대한 미군 보고서에 들어있다. 이 사건들이 모두 “적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우발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도 군복을 입은 나치와 군복을 입지 않은 나치를 구분할 수는 없었다. 요컨대 미국과 미군이 가지고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이 이 전쟁범죄의 기본 원인인 것이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을 때 이미 일본군 스스로 자기 나라 국민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미군에게는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만약 미군이 일본 본토로 진격했다면 유럽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히틀러가 몇 달을 더 버텼다면 과연 트루먼 대통령이 히로시마 대신 함부르크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렸겠느냐는 의문은 과도한 의심이 아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편협한 나라였다는 증거가 남아있다. 전쟁기간동안 모든 일본계 미국인들을 서부의 수용소에 몰아넣은 것이다. 미국 시민권이 있는 일본계 이민자들이 스파이 행위를 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독일계 이민자들에게는 이런 의심이 제기되지 않았다. 이 일본인 수용소의 이야기는 알란 파커 감독이 1990년 <폭풍의 나날>이라는 영화로 제작했다.

미군의 전쟁범죄는 결코 우발적인 상황이 아니다. 인종주의로 무장한 미군이 가는 곳 그 어디서든 참혹한 학살은 계속 될 것이다.

2006년 05월 31일 (수) 12:19:03 장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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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6-06-1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패권의 몰락 - 혼돈의 세계와 미국>(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한기욱 정범진 옮김, 창비, 2004년 05월 17일)

 

2012년 4월, K씨의 개 같은 하루

한-미 FTA를 반대하는 학자가 그린 ‘체결 5년 뒤 대한민국의 가상 시나리오’… 미 보험사에 의료보험료 내려 뛰어가다 게릴라로 전락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다

▣ 심광현 한미FTA저지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장

04시30분, 보험은행사의 벨소리 공습에 잠이 깨다

전화기 소리가 깊은 잠을 깨운다. 금속 소리는 점점 커진다. 밤새 번역 일을 하고 겨우 잠들었는데 단잠을 깨우는 이 소리가 정말 싫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기 전에 가졌던 휴대폰 소리의 부드러운 컬러링이 그립다. 지금 전화를 받지 않으면 PSC보험은행사에서 준 문자수신기로 연락처가 남겨질 것이고, 응답 전화를 하려면 초당 수백원 하는 전화비를 내야 한다. 그렇다고 연락하지 않으면 내 책임으로 돌릴 것이다. 억지로 받는다.

아니나 다를까. PSC보험은행사 여직원이 오늘까지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4등급으로 낮출 수밖에 없다고 상냥하게 말한다. 잠이 번쩍 깬다. 하루만 참아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다. 오늘 일과 시간 내로 반드시 계열사 은행으로 이달치 보험료를 내야 딸아이 아토피 연고 보조금을 지급하겠단다. 어쩔 수 없다. 임대주택 청약적금이라도 깨야겠다.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미국 쌀이 홍수처럼 들이닥치자 논은 다 넘어가고 아버지는 농약을 드셨고 어머니는 화병에 쓰러지셨다. 그땐 국립학교라 학비도 쌌는데 지금은 오히려 국립대학 출신이라고 학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싼 티가 나 학원 이미지 버린다나. 그나마 아파트 수위 자리로 연명하는 내 신세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울화가 치미니 좀 정신이 든다. 마루로 나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려다 그만둔다. 물이 거의 없다. 1ℓ 한 병에 3만원인데 딸애가 아토피라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고 해서 나나 아내는 물도 마시기 어렵다. 병원도 못 데려가는데 물이라도 마시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 아내를 불렀는데 답이 없다. 황급히 집을 나서자 싸늘하고 매캐한 공기가 폐부를 쑤신다. 버려진 애완견들이 떼지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05시10분, 살인적 추억에 시달리며 집을 나서다

새벽이 다가오는데도 하늘은 캄캄하기만 하다. 2007년 체결된 한-미 FTA 이후 미국의 폐기물 산업체들이 도처에 자리잡자 맑은 날씨와 깨끗한 공기는 구경하기 힘들다. 4월이면 황사가 겹쳐 하루 종일 캄캄한 채 살아야 한다. ‘유해폐기물협약’을 미국 기업이 어겼으니 고발해야 한다며 서명을 받으러 왔던 시민단체 회원이 생각났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오히려 기업 활동을 방해한다며 미국 폐기물 회사는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ICSID)에 시민단체와 환경부를 제소해 수백억원의 벌금을 타갔을 뿐이다. 이뿐이랴. 노조 결성했다고 제소, 영화 제작 보조금 지급했다고 제소, 천연기념물 항목을 줄이지 않았다고 제소, 심지어 우리나라에 진출한 미국 기업이 망하자 한국의 제도가 미비해서 그런 것이니 책임지라며 제소한다. 이 모든 재판에서 한국 정부는 판판이 깨졌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서민들 지갑에서 빠져나간다. 앗!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첫 버스를 놓치겠다.

아직 잠이 덜 깼나 보다.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어차피 하루살이 인생인 것을. 하지만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열이 받는다. 마지막 해에 4천만원이나 들여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것도 이전에는 잘나가던 교대를 나왔는데도 교사는커녕 학원 강사도 못해먹고 있는 내 처지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그때 공부를 못해 미국으로 도피 유학 갔던 친구놈은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 미국 대학 분교 대비반 학원을 강남에 차리더니 1년에 수십억원을 번다. 그나마 나는 하사관 3년 해서 모은 돈으로 졸업이나 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꼭두새벽인데도 30분 간격으로 다녀 콩나물시루짝 같은 만원버스를 간신히 잡아타고 서초동 아파트에 도착했다.

06시30분, 아파트 수위실에서 상념에 잠기다

교대를 하고 나자 다시 피로가 엄습한다. 피붙이가 무섭긴 무섭다. 요즘은 환경호르몬 때문에 애 낳기도 힘들다. 겨우 얻은 딸애도 아토피 때문에 고생이 너무 심하다. 이전에도 아토피가 심했지만 치료약 구하기 힘든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1개에 수십만원이다. 그나마 난 보험이 3등급이어서 3분의 2 가격에 살 수 있는 게 다행이다. 한-미 FTA 이후 재정 형편에 따라서 보험 등급이 나뉘었다. 보험 3등급 미만이면 감기약도 수십만원을 줘야 구할 수 있다. 그나마 나와 처가 함께 돈을 버니 3등급은 유지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다행히 오늘은 아내에게 일이 있었나 보다. 이전에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는 미국 법인이 학교를 인수한 뒤 실직하고 고교 동창 집에 파출부로 나가고 있다. 엊그제 나도 몇 달 만에 동창과 소주 한잔 했는데 요즘은 사창가에 아이 데리고 나오는 젊은 주부가 많다고 한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뒤 멕시코가 그랬다고 할 땐 설마 했는데 이젠 남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누가 그 젊은 주부를 비난하랴! 다만 내 아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에 감사드릴 뿐이다.


△ 품질은 비슷하지만 15~20% 싼 미국쌀이 4월부터 식탁에 오른다. 평택시 농수산물 비축창고에서 인부들이 부산으로 수입된 미국산 쌀포대를 쌓고 있다.(사진/한겨레 김태형 기자)

매일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보험 3등급을 유지하는 데 아내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한 달에 수백만원 하는 유아원에 아이를 보낼 수 없는데 아내가 아이를 볼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보낼 생각을 하면 갑갑하기만 하다. 질 낮은 공립학교에 보낸다 해도, 한 달에 수십만원인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할까. 월 100만원이 넘는 중·고등학교는 또 어찌 보낼까? 억대에 이르는 대학 학비는 상상하기도 싫다. 그래도 아내는 함께 열심히 벌면 되지 않냐며 희망을 가져보자고 한다.

07시30분, 나비부인을 들으며 다시 절망에 빠지다

<나비부인>의 <어떤 갠 날>의 날카로운 소프라노 소리가 아침 공기를 가로지르며 귓전을 때렸다. 아내가 교사로 일할 땐 우리 부부도 심심치 않게 오페라 공연을 보러 다녔다. 수위실에 첫 출근 하던 날 바로 앞집에서 흘러나오던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먼 옛날의 일일 뿐이다. 3만원에 이르는 거액의 관람료가 아니라도 할리우드 영화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 이젠 영화도 보기 싫다. 반토막난 스크린쿼터를 그나마 유지하겠다더니 한-미 FTA 체결 뒤에는 아예 없애버려 1년에 간신히 몇 편 개봉되는 한국 영화는 꼭 보러가려 했지만, 아이가 생긴 뒤에는 한 번도 못 갔다.

지금 아이들한테 한국 영화가 한때 아시아에서 제일 잘나갔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영화는 미국에서만 만들어지는 줄 아는 아이들이 더 많다. 하긴, 나도 ‘한류’란 말이 있었는지 벌써 가물가물하다. 그나마 텔레비전에서 가끔씩 2000년대 초반 영화를 보는 재미에 산다. 그런데 5분 상영하고 5분 광고하는 채널밖에 없어서 한 편을 2~3일에 나누어 봐야 한다. 그러면 어떠리. 영화광인 아내는 지금도 강동원만 보면 마음이 설렌다고 한다. 그래서 비교적 중간 광고가 별로 없는 영화 채널 하나만이라도 신청하자고 하지만 한 채널당 월 요금이 10만원이 넘고 1천만원이 넘는 일체형 텔레비전을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 그 텔레비전을 사면 회사가 보유한 채널들을 절반 가격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없는 형편이라도 구미가 당기긴 한다. 물론 공짜 채널이 없는 건 아니다. 미국 ABC 채널은 어떤 텔레비전에서라도 볼 수 있다. 난 이 채널이라도 보자고 하지만, 아내는 결사코 반대한다. 공용어가 된 영어 공부를 위해서라도 난 봤음 하지만, 아내는 우리가 이런 나락으로 떨어진 게 다 미국놈들 때문이라면서 ‘미국’ 하면 화부터 낸다. 하지만 미국과 관련 없는 게 지금 어디 있을까? 하나에서 열까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대통령이나 장관도 미국 유학생이 아니면 될 수 없는 세상인데.

15시30분, 은행 전용 버스를 타다

라면 한 그릇으로 아점을 때운 뒤, A씨와 교대를 하고 황급히 달려나섰다. 한낮인데도 하늘은 여전히 캄캄하다. 한때 법률사무소들이 득실거리던 법원 앞거리는 썰렁해지고 군데군데 미국 법률회사의 대형 간판이 걸린 고층건물들이 서 있을 따름이다. 이전에는 그리도 많던 은행들도 모두 통폐합되어 동에 하나씩 있어 은행에 가려면 걸어서 갈 수 없다.

15시45분, 영어 방송에 오리무중

한시라도 빨리 가려고 PSC은행 소속 버스 전용차선이 있어 거의 막히는 일이 없는 미국 회사 버스를 탔는데 낭패다. 전용차선이라 평시면 10분이면 갈 거리인데, 도통 움직이지 않는다. 10분마다 두 배로 요금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진다. 돈도 돈이지만, 은행 마감 시간이 지나면 보험료를 못 내는 게 더 큰 문제다. 3등급과 4등급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10분 구간에 1만원이긴 해도 지하철을 타는 건데, 잘못했다. 서비스 질을 높인다며 정부가 외국 회사에 지하철을 넘겼을 때 노조가 파업하는 걸 보고 이기주의자들이라 탓했던 내가 지금도 부끄럽다.

그건 그렇고 왜 버스가 이리도 가지 못할까? 기사에게 물으니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라디오를 틀어보라고 하자 어차피 소용없을 거란다. 그래도 틀어보라고 승객들이 아우성이라 기사는 구시렁거리면서 라디오를 켠다. 이리저리 돌리지만 온통 영어 방송이다. 그나마 한국 방송은 광고 전용 방송뿐이다.

16시05분, 보도 없는 차도를 전력질주하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내려달라고 했다. 오래전에 보도는 없어져 차도만 남은 도로는 온통 꽉 막혀 있다. 전력질주를 하는데 빌딩 2~3층마다 러닝머신을 타는 피트니스 클럽의 외국인들과 성형미인들을 힐끔 보면서 달리니 더 멀미가 날 것 같다.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갈까. 드디어 언덕 너머로 PSC은행 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언덕을 넘어서니 차가 왜 막히는지 알겠다. 한-미 FTA 이후 게릴라가 되어 산으로, 지하로 들어갔던 농민들이 도심 시위를 나온 것이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어디에 그리들 숨어 있다 쏟아져나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신기함도 잠시, 수천 명의 경찰들과 수백 명의 PSC은행 사설 경찰들이 농민들을 에워쌓다.

난 건물 안에 용무가 있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라고 애원하듯 소리치며 경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때 갑자기 경찰들이 대치하고 있던 농민들에게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내리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 가족이 우선 살고 봐야지.

16시28분, 개 같은 내 인생

막 은행 빌딩으로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 농민 무리에서 보인다. 아버지? 아버지가 아닌가! 분명히 군대에 있을 때 농약을 마시고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고개를 흔들어봐도 분명 아버지다. 시위대로 다가가려 했으나 전면의 대형 시계가 보인다. 이제 1분 뒤면 은행 문은 닫힌다. 아니야. 보험 등급은 다시 돈을 내면 되지만 아버지가 맞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지 않은가! 그 순간 아버지는 개처럼 끌려가고 만다. 아! 어떻게라도 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멀어진다. 그때 ‘띵동’ 문자가 왔다. “보험 4등급 처리되었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는다. 개 같은 내 인생. 개 같은 한-미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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