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가장 먼저 만나는 산사, 봉정암
[길 위에서 쓰는 편지 5] 설악산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을 넘다
텍스트만보기   이명주(sindart) 기자   
6월의 시작과 함께 우리 국토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지고 싶듯, 내 나라 내 땅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소란한 사람 마을을 잠시 벗어나 자연에게 사는 법도 배우고요. 이 글은 사람살이에 적응 못하고 또 홀로 떠나는 여식을 묵묵히 응원해주시는 어머니를 위해 길 위에서 쓰는 편지입니다. 이 여행이 끝나면 사람 도리, 자식 도리 하며 사는 평범한 딸이 되고 싶습니다. - <기자 주>

3일째 계속 되는 비를 뚫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휴식은 충분히 취했고 마냥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건 장대비 속을 걷는 일보다 더욱 곤욕처럼 느껴졌습니다. "비 오는데 산에 가겠냐"고 하시는 숙소 관리아저씨의 걱정을 뒤로 한 채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한계령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굽이굽이 휘어진 도로를 따라 한계령 휴게소에 이르니 다행히 궂은 날씨는 한풀 꺾여 가랑비가 내렸지만 6월이란 계절이 무색할 만큼 서늘했습니다. 훅 끼쳐오는 소름에 화장실로 가서 가지고 온 옷들을 모두 겹쳐 입은 다음 설악산 대청봉을 향한 등정을 시작했습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는데 안내원이 "어느 쪽으로 하산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오를 생각만 하고 미처 내려올 생각은 안 했던 제가 어느 쪽이 좋으냐 물었더니 안내원은 "오색길로 내려와야 오늘 안에 내려올 수 있습니다"라며 걱정스런 눈길을 보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지요, 설악산 정상까지는 초행길인데다 동행할 이도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여정은 상상도 못한 채 대수롭지 않은 듯 발길을 옮겼습니다.

결정한 건 단 한 가지, 정상도 정상이지만 언젠가 한국의 절을 주제로 한 TV 프로그램에서 '하늘 아래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산사'라고 소개되었던 봉정암에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설악의 전경들

▲ 한폭의 그림 같은 설악의 풍경
ⓒ 이명주
수많은 등산객들이 오래도록 밟고 밟아 난 길 외에는 사람에게 길들여진 적 없는 설악의 자연에 연신 사진기를 누르고, 탄성을 자아내면서 한참을 올랐습니다. 그 푸르름은 말할 것도 없고, 길이 높아질수록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들이 발 아래로 펼쳐졌습니다. 높은 산을 올라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 깊고 고요한 산길을 오르고 올라, 나무들이 하늘을 열어줄 때쯤 만나는 광활한 자연 앞에서의 숨 막힘!

이때만큼은 고장 난 사진기가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사각 플레임 안에 만족스런 그림이 나타나질 않아 설악의 풍경을 가슴에 새기려는 듯, 가는 중간 중간 오래도록 서서 그것을 음미했습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요? 가랑비마저도 오래 전에 그쳤고 환한 햇살에 새들의 지저귐은 간드러지기만 한데 길은 끝이 없었습니다. 의기양양하던 기세는 온데 간데 없고 무거워진 다리는 종종 꺾이기까지 하고 목은 계속 타왔습니다. 어디쯤 보일 거라 생각한 약수터나 간이매점도 없고, 설상가상 전날 얼려둔 물통을 숙소에 두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흐르는 샘물을 음료수 삼아 하조대에서 출발하기 전 슈퍼에서 산 김밥 한 줄을 나무둥치에 앉아 점심으로 먹었습니다.

해발 천 미터 이상의 '자연샘물'은 달디 달았고, 자르지 않은 김밥인지라 우엉이 잘리지 않고 쑤욱 뽑혀져 나오는데도 마냥 꿀맛이라 우걱우걱 씹어 단숨에 먹었습니다. 배를 채우고 단 바람에 흥얼거리고 있으려니 다람쥐들이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곁에 모여들어 기웃거렸습니다. 지난번 울산바위 오를 때도 느꼈지만 설악산 다람쥐들은 마치, 어릴 적 동네에 찾아오던 엿장수처럼 사람을 만만히 여기는 듯합니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봉정암'

드디어 대청봉 지점이 멀지 않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왔습니다. 허허,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너무 지친 탓이었을까요, 반가운 탓이었을까요? 이정표를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도 두 갈래 길 중 대청봉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귀때기청봉(해발 1.578m, 서북능선 최고봉)으로 들어서고 만 것입니다. 한낮 땡볕은 뜨겁기만 한데 귀때기청봉으로 가는 길은 험준한 바위산이라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습니다.

한참만에야 뒤에서 한 무리의 사람 기척이 들려 반가워하고 있는데 성큼성큼 바위산을 건너온 아저씨 한 분이 어딜 가는 길이냐 물어 "대청봉에 간다"고 했더니 "이럴 줄 알았다, 여긴 귀때기청봉 가는 길이니 어서 돌아서 가라"고 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들어선 귀때기청봉의 정상이 탐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자칫하다간 목적한 대청봉을 가기도 전에 해가 질 위험이 있어 온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 참으로 무모하고 걱정스런 일을 저지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와중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삶에서도 열성을 다해 갔지만 길을 잘못 택해 뒤돌아서야할 때가 있잖습니까? 그간 들인 노력이 아깝고도 허무해 틀린 길인지 알면서도 밀어붙이려는 마음이 생기기 십상이나 결국 깨달은 순간 돌아서는 것이 최선책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귀때기청봉을 내려와 대청봉으로 다시 향했습니다.

드디어 대청봉 바로 아래 캠프에 도달했습니다. 눈앞에 해발 1707m 설악의 정상이 보이는데 왠지 마음은 그 아래 봉정암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매번 뭔가에 정성을 들이다가 성과를 바로 앞에 두고도 쉬이 손을 놓아버리는 제 습성이 발동한 것일까요? 오기가 날 만도 한데 한 치 미련도 없이 길을 돌려 봉정암으로 내려갔습니다. 오래전 돌 하나, 흙 한 점 모조리 한 사람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수백, 수천 번을 지고 날라 만들었을, 하늘 아래 가장 높은 봉정암의 모습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봉정암에서 평온함과 영검한 기운을 느끼다

대청봉을 뒤로 하고 봉정암을 향해 길을 돌리자 우측으로 보이는 설악의 능선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사람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게 된 건 아마도 벅찬 자연에의 감탄에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잘나 이름을 떨치고 돈도 버는 것 같지만 묵묵히 존재하는 자연에서 거저 얻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인심 좋은 부부 등산객이 건네준 물 한 통을 오래 전에 다 비우고 출발하고부터 처음으로 매점 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봉정암 가는 길 몇 십 미터 지점에 있는 그곳은 매점과 산장을 겸하여 긴 머리 하나로 질끈 묶은 청년과 그의 어머니인 듯한 여인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음료수 가격이 산 아래보다 거의 3~4배나 비쌌지만 초코파이와 비타민 음료 하나를 냉큼 사서 먹었습니다. 군복무 시절, 군인들이 왜 그리 초코파이를 동경하는지 그 심정이 이해되는 듯했습니다. 물도 물이지만 초콜릿이 발라져 있는 말랑한 그 빵이 어찌나 맛있던지요!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산을 내려가니, 마침내 거인의 손으로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듯한 기암괴석과 우거진 숲에 둘러싸인 봉정암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이 곳은 신라 시대인 643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창건하였는데 그 후 원효, 보조, 지눌 등 유명한 고승들이 머물며 수도 정진한 곳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6·25 전쟁 이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건되었고 한국 전쟁 당시에는 화재로 소실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봉정암은 아직도 산 밑에서 운반해온 발전기로 한정된 전력을 사용해 생활해야 하는, 세인의 관점에선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지만, 이 곳에 하루 동안 머물면서 느낀 건 산 아래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평온함과 영검한 기운이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연이 닿으면 시간을 정하지 않고 산사에서 머물고 싶어졌습니다.

봉정암의 맑은 기운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

▲ 가을의 봉정암 모습
ⓒ 이명주
대충 경내를 둘러보고 나니 저녁 공양 시간이 되었습니다. 불도, 음식도 귀한 곳에 봉정암 찾은 모든 이들에게 미역국과 오이무침 곁들인 밥이 나왔습니다. 그릇도 귀한지라 미역국에 밥을 말고 오이무침까지 섞어 숟가락 하나로 후루룩 떠먹는 형상이었지만 국 한 모금 남기지 않고 다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엔 자신이 사용한 그릇과 수저를 네 단계로 나누어진 세척대에서 깔끔하게 씻어 다시 다음 사람을 위해 제자리에 갖다놓았습니다. 절에서 공양을 할 때마다 느끼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밥 먹고 물 쓰는 법을 절에서 하듯 교육하면 참으로 이로울 듯합니다. 하루를 묵고 갈 터라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을까 하고 한 스님에게 부탁드렸더니 전기가 너무 귀해서 사정을 봐줄 수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말을 해놓고도 생각이 부족했다 싶어 영 겸연쩍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큰스님의 강연시간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보름이라 저번 낙산사에서처럼 봉정암에도 각지의 불자들이 단체로 찾아와 스님의 법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번 오기도 힘든 곳이니, 스님 말씀 한 자라도 더 듣기 위해 절 마당도 개의치 않고 오밀조밀 모여 앉은 신도들 사이에 조용히 섞여 앉았습니다. 구수하고 재미있게 풀어가는 큰 스님의 법문에 사람들은 연신 큰 소리로 웃어대고 '관세음보살'을 외쳤습니다.

밤이 되자 철야기도 하는 사람은 법당에 모이고, 만만치 않았던 여정에 녹초가 된 사람들은 배정된 방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저는 봉정암 맑은 기운 탓인지, 산 아래서 지고 온 복잡한 심경 때문인지 몸은 피곤한데 정신만은 말짱해 밤새 숙소와 법당을 오고갔습니다.

밤 10시에 일제히 소등했다가 새벽 다섯 시, 아침을 깨우는 스님의 목탁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사찰 전체에 불이 밝혀졌습니다. 아침 공양 메뉴 역시 어제와 같은 미역국과 오이무침이었습니다. 입이 까칠하여 전날과는 달리, 영 밥이 넘어가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을 깨끗이 비웠습니다.

이틀간의 설악산 등정을 마치다

아침 공양이 끝나자 점심으로 주먹밥을 나눠받고 단체로 온 방문객들은 하산할 준비를 하는 사이, 저는 대청봉을 향했습니다. 언제든 다시 못 오랴만, 또 한번 온 길을 다시 기약하기 힘든 것이 사람 일이니 한 번은 보고가야 할 듯해서였습니다. 내려올 때는 금세 내려왔다 싶었던 길을 다시 올라가려니 만만치 않았습니다. 내려온 길을 다시 오르려니 간사스레 '어제 둘러보고 올 걸' 싶기도 하고, '그냥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났지만 그 사이 대청봉 정상을 찍었습니다.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뿌듯함이 한점 더해졌습니다. 본래는 대청봉에 올랐다가 다시 봉정암으로 내려가 하루 정도 더 머물 마음이었으나 당최 같은 길을 또 걸으려니 싫증도 나고, 꾀도 나서 오색길을 택해 하산했습니다.

내려가는 게 더 수월하다는 생각에 가볍게 시작한 하산길이지만 오색길은 올라오는 것은 엄두도 안 날만큼 험했습니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길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돌계단, 나무계단이 사람을 더욱 지치게 했습니다. 오전 9시에 시작한 하산길이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이틀간의 설악산 등정을 끝내고 저는 지금 주문진 해수욕장 근처에 와 있습니다. 바다가 눈 앞에 펼쳐져 있지만 몸도 머리 속도 젖은 소금 주머니 같고 어떤 것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당장 내일 계획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지쳐 있습니다. 이만 말을 멈춰야겠습니다. 기력이 회복되면 다시 편지하겠습니다. 그래도 참으로 뿌듯한 산행이었습니다! 또 씩씩한 마음으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휴식에 전념하겠습니다. 다음 편지에서 뵙겠습니다.
다시 오라는 뜻이었을까요? 고장난 사진기로나마 고이 간직하고 싶어 가득 담아온 사진들이 한순간 날아가버렸습니다. 어떤 완벽한 그림도, 사진도, 글도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따올 순 없을 듯하니 꼭 한번 제가 걸은 그 길을 걷길 바랍니다.
2006-06-23 21:01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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꼿 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김태수 지음 / 황소자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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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기생들은 1패, 2패, 3패로 나뉘어 살아남기 경쟁을 벌이던 상황이었다. 1패는 궁중 어전에서 가무를 하는 일급 기생을 일컫는 말이었다.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면서 은밀히 매음도 하는 은군자 또는 은근짜를 부르는 말이었다. 3패는 술좌석에서 잡가나 부르며 매음하던 탑앙모리를 통칭했다.
-16쪽

(고무신)

고무신들이 하나같이 내구성을 강조한 것은 막강한 경쟁 상대인 짚신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볏짚으로 만든 짚신은 너무도 잘 닳았다. 한 사람이 일년에 70켤레를 신었다는 통계가 있는 걸 보면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바닥은 울퉁불퉁해서 편치 않았고 비만 오면 스펀지처럼 물기를 빨아들여 축축한 데다 쇠망치처럼 무거워졌다.(34)

고무 부문 노동자의 연평균 임금은 1931년 당시 152원 44전으로 월평균 12원 70전 정도였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조악한 수준이었다.(43)

-34 외쪽

(성병약)

공개적으로 매춘이 이뤄지지 않았던 한반도에 창기 같은 직업적 매춘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개항 이후였다. 개항과 동시에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인 독신 남성을 겨냥해 매춘 여성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1910년까지 조선에 들어온 일본 직업여성 8,157명 중 절반 정도인 4,093명이 예기, 창기, 작부 등 매춘과 관련된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53 쪽

(과자)

종달 종달 종달 종달 종달새 운다 캬라멜 손에 들고 원족갑시다.
꼿 아레 질겁게 이약이하는 곳에는 반듯이 캬라멜의 깁붐이 잇다.



-103쪽

(산아제한)

산아제한론은 마주보고 달리는 폭주 기관차처럼 일제의 인구정책과 정면충돌했다. 일제는 조선을 합병할 때부터 다산을 적극 옹호했다. 식민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생산 현장과 전쟁터에서 필요한 인적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제가 서구식 보건 의료제도를 도입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산 못지않은 다사多死풍토를 해결함으로써 사망률은 낮추되 출생률은 높여나가고자 했다. 그 결과 1910년 이전만 해도 연평균 0.2~0.3%를 유지하던 인구증가율은 2%선으로 뛰었다. 인구의 자연증가 속도는 7~10배 빨라졌다. 한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속도였다.

-118쪽

(창씨개명)

그렇다고 일제가 단순히 호칭질서를 바꾸기 위해 골치 아프게 난리굿을 벌인 건 절대 아니었다. 훗날 도입하게 될 징병제의 근거자료를 확보하고자 창씨개명을 시행했던 것이다. 실제로 1942년, 조선에 징병제가 도입됐을 때 창씨개명으로 얻은 자료는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제는 이미 메이지유신(1853~1877) 때 일본 본토에서 창씨개명을 통해 징병제의 근거자료를 확보한 바 있었다. 1875년까지만 해도 인구의 95%가 성을 갖고 있지 않던 일본은 포고령을 통해 성을 짓게 했다. 그 바람에 어떤 어촌에서는 물고기 이름을, 어느 농촌에서는 야채 이름을 모든 주민들이 갖기도 했다.(146)-146쪽

(영화)

청계천을 중심으로 종로 일대의 북촌과 일본인들이 몰려살던 진고개(충무로) 주변의 남촌으로 나뉜 것이다. 종로쪽에서는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이 조선인 관객을 놓고 삼파전을 벌였고 남쪽에서는 을지로 쪽의 황금관, 대정관 같은 극장들이 일본인 관객을 끌었다. 극장들이 관객을 구분해서 받은 건 아니었다. 영화를 설명하는 변사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뉘다보니 자연스레 관객도 갈라졌다.(162)-162쪽

(라디오)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정각! 경성방송국이 콜 사인을 외치며 첫 전파를 쏘아올렸다. '제오디케JODK'란 콜 사인은 도쿄JOAK, 오사카JOBK, 나고야JOCK 다음으로 개국했다고 해서 알파벳 순으로 붙인 것이다.(198)-198쪽

(비누)

팥, 녹두 등을 맷돌에 간 후 보드라운 체로 쳐서 가루 형태로 쓰기도 했다. 날 비린내가 나는 이런 가루는 더러움을 날아가게 한다고 해서 비루飛陋라고 불렀다. 비누란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214)

-214쪽

(백화점)

1904~1906년에 걸쳐 하나 둘 조선에서 영업을 시작한 일본의 오복점들은 1920년대 중후반 들어 근대적 백화점으로 탈바꿈했다. 조지아, 미나카이, 히라다, 미쓰코시 등이 그런 업체들이다.(246)
-246쪽

(커피)

이 호텔(손탁호텔-인용자)은 구한말 외국인들이 몰려든 사교장이었다.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러인전쟁 취재 차 종군기자로 왔다가 단골손님이 되기도 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 양이 머물기도 했다.(281)

다방은 1920년대 후반 들어서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다. 당시의 다방은 요즘의 다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월간 <삼천리>가 1936년 12월호에서 다룬 '끽다점 연애풍경'에 따르면 다방은 재즈, 클래식 음악이 있고 일간신문과 시사지, 여성지, 영화지 등 다양한 잡지가 비치돼 있는 문화공간이었다.(281)-281 외쪽

(손기정)

인단, 치약, 약품 등을 판매하던 거대 광고주들은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한편 세계적인 경사로 한껏 들떠 있는 조선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문짝만한 광고를 연거푸 내놓았다. 세발 자전거, 만년필, 축음기, 모자 등을 파는 소규모 업체들도 깜량껏 연합광고를 실어 분위기를 띄웠다.(298)

일본인들은 일장기가 베를린 하늘에 게양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좋아했으나 정작 손기정은 썰렁하게 맞았다. 손기정이 결승선을 골이니할 때도 일본 사람들의 성원은 거의 없었다. 일제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식민통치에 불리하다고 뒤늦게 판단했는지 그해 연말 일본인 수십 명을 텅 빈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 데려다 놓고는 일장기를 흔들며 성원하는 장면을 연출케 했다. 일본에서 상영할 올림픽 영화에 이 장면을 끼워넣기 위해서였다.(303)
-298 외쪽

(전당포)

제일은행은 수시로 신문광고를 했는데 '임금은 비밀함과 확실함을 주지로 하야 간절히 처리함'이란 문구를 갖다붙였다. 은행이 고객이 거래 내용을 비밀로 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굳이 이 말을 집어넣은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경성에 있는 어느 일본 은행이 조선인의 예금을 유치할 목적으로 조선인 관리가 수천 금을 예금했다는 사실을 광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관리가 은행에 저축한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자 당황해서 돈을 몽땅 인출해 간 것이다. 이 일이 계기가 됐는지 은행들은 거래 내역을 철저히 비밀에 붙인다는 내용을 광고에 밝히곤 했다.(314~315)

'나는 지금도 여덜장의 전당표를 가지고 잇다. 그 중에는 한 벌 밧게 업든 매일 입고 다니는 양복조차 드러갓다. 재작년 결혼 때에 하여준 안해의 결혼반지까지도 드러갓다. (...) 이제는 전당 잡힐만한 물건이 업서서 잡혀 먹지 못한다고나 할가.(염상섭, 316~317)

그(최돈명-인용자 주)는 전당포를 잣대 삼아 네 가지로 사람들을 분류했다. 첫째 생활에 여유가 있어 안중에 전당포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는 행운아, 둘째 전당을 기한 내로 또박또박 찾아올 수 있는 행복자, 셋째 아직까지 계속하여 (전당을) 잡히고 있는 '프티부르주아', 넷째 전당거리조차 씨가 말라 잡히려야 잡힐 것조차 없는 속수무책의 '진眞프로'가 그것이다.(317~318)-314 외쪽

(바리캉)

1905년 전후에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바리캉은 일본에서 수입된 데다 발음까지 묘해 일본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프랑스인 발명자의 이름이다. 1871년 프랑스 기계 제조회사인 '바리캉 마르'의 창시자 바리캉이 발명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리캉은 유럽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서양 남성의 헤어스타일이 짧아지는 데 한 몫을 했다.(330)

바리캉을 한반도 근대의 한 상징으로 인정해도 괜찮은 것은 단발령이란 피눈물 나는 국가적 대소동 속에서 조선인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단발령은 지엄하신 '나랏님'을 강제 삭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고종 32년(1895년) 11월 15일, 궁궐 안에서는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훈련대 장교 세 명이 대신들 앞에서 칼을 빼들었고, 궁 밖에서는 일본 군인들이 대포를 묻어놓았다. 단발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겁을 주는 상황에서 태자와 함께 고종 황제는 무력하게 머리를 깎였다. 단발령의 명목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발령은 대상을 성인 남성으로만 제한한 반쪽짜리 졸속 정책이었다.(330~331)

모자 광고가 1919~1927년 기간 동안 전체 광고순위 3~4위를 유지한 것은 그만큼 모자 유행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340)

사실 단발은 쇄국에서 개방으로 노선을 바꾼 동아시아 3국에서 모두 거쳐야 했던 사건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함께 무사의 상징인 존마개를 자르도록 했고, 중국도 변발을 없앴다. 그러나 조선처럼 전 국민적 반발을 사지는 않았다. 그만큼 조선의 유교적 전통은 강했고 침략자들의 강요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이다.(343)-330 외쪽

(양장)

일본의 홋카이도와 동북 지방의 촌부들이 작업복으로 입던 몸뻬는 1940년 5월 가정 부인들이 방공훈련을 받으면서 입기 시작했다.(362)

일제는 몸뻬를 거부하는 여성들에게 치사한 보복을 가했다. 공무원, 경찰, 동반장 등을 동원해 쌀 배급, 노력동원, 징용에 불이익을 주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차를 탈 때 몸뻬를 입지 않으면 태워주지 않았다. 옷 하나도 마음대로 못 입던 숨막히는 시대였다.(362)-362 외쪽

(손기정)

인단, 치약, 약품 등을 판매하던 거대 광고주들은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한편 세계적인 경사로 한껏 들떠 있는 조선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문짝만한 광고를 연거푸 내놓았다. 세발 자전거, 만년필, 축음기, 모자 등을 파는 소규모 업체들도 깜량껏 연합광고를 실어 분위기를 띄웠다.(298)

일본인들은 일장기가 베를린 하늘에 게양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좋아했으나 정작 손기정은 썰렁하게 맞았다. 손기정이 결승선을 골이니할 때도 일본 사람들의 성원은 거의 없었다. 일제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식민통치에 불리하다고 뒤늦게 판단했는지 그해 연말 일본인 수십 명을 텅 빈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 데려다 놓고는 일장기를 흔들며 성원하는 장면을 연출케 했다. 일본에서 상영할 올림픽 영화에 이 장면을 끼워넣기 위해서였다.(303)
-298 외쪽

(전당포)

제일은행은 수시로 신문광고를 했는데 '임금은 비밀함과 확실함을 주지로 하야 간절히 처리함'이란 문구를 갖다붙였다. 은행이 고객이 거래 내용을 비밀로 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굳이 이 말을 집어넣은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경성에 있는 어느 일본 은행이 조선인의 예금을 유치할 목적으로 조선인 관리가 수천 금을 예금했다는 사실을 광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관리가 은행에 저축한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자 당황해서 돈을 몽땅 인출해 간 것이다. 이 일이 계기가 됐는지 은행들은 거래 내역을 철저히 비밀에 붙인다는 내용을 광고에 밝히곤 했다.(314~315)

'나는 지금도 여덜장의 전당표를 가지고 잇다. 그 중에는 한 벌 밧게 업든 매일 입고 다니는 양복조차 드러갓다. 재작년 결혼 때에 하여준 안해의 결혼반지까지도 드러갓다. (...) 이제는 전당 잡힐만한 물건이 업서서 잡혀 먹지 못한다고나 할가.(염상섭, 316~317)

그(최돈명-인용자 주)는 전당포를 잣대 삼아 네 가지로 사람들을 분류했다. 첫째 생활에 여유가 있어 안중에 전당포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는 행운아, 둘째 전당을 기한 내로 또박또박 찾아올 수 있는 행복자, 셋째 아직까지 계속하여 (전당을) 잡히고 있는 '프티부르주아', 넷째 전당거리조차 씨가 말라 잡히려야 잡힐 것조차 없는 속수무책의 '진眞프로'가 그것이다.(317~318)-314 외쪽

(바리캉)

1905년 전후에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바리캉은 일본에서 수입된 데다 발음까지 묘해 일본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프랑스인 발명자의 이름이다. 1871년 프랑스 기계 제조회사인 '바리캉 마르'의 창시자 바리캉이 발명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리캉은 유럽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서양 남성의 헤어스타일이 짧아지는 데 한 몫을 했다.(330)

바리캉을 한반도 근대의 한 상징으로 인정해도 괜찮은 것은 단발령이란 피눈물 나는 국가적 대소동 속에서 조선인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단발령은 지엄하신 '나랏님'을 강제 삭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고종 32년(1895년) 11월 15일, 궁궐 안에서는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훈련대 장교 세 명이 대신들 앞에서 칼을 빼들었고, 궁 밖에서는 일본 군인들이 대포를 묻어놓았다. 단발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겁을 주는 상황에서 태자와 함께 고종 황제는 무력하게 머리를 깎였다. 단발령의 명목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발령은 대상을 성인 남성으로만 제한한 반쪽짜리 졸속 정책이었다.(330~331)

모자 광고가 1919~1927년 기간 동안 전체 광고순위 3~4위를 유지한 것은 그만큼 모자 유행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340)

사실 단발은 쇄국에서 개방으로 노선을 바꾼 동아시아 3국에서 모두 거쳐야 했던 사건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함께 무사의 상징인 존마개를 자르도록 했고, 중국도 변발을 없앴다. 그러나 조선처럼 전 국민적 반발을 사지는 않았다. 그만큼 조선의 유교적 전통은 강했고 침략자들의 강요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이다.(343)-330 외쪽

(양장)

일본의 홋카이도와 동북 지방의 촌부들이 작업복으로 입던 몸뻬는 1940년 5월 가정 부인들이 방공훈련을 받으면서 입기 시작했다.(362)

일제는 몸뻬를 거부하는 여성들에게 치사한 보복을 가했다. 공무원, 경찰, 동반장 등을 동원해 쌀 배급, 노력동원, 징용에 불이익을 주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차를 탈 때 몸뻬를 입지 않으면 태워주지 않았다. 옷 하나도 마음대로 못 입던 숨막히는 시대였다.(362)-362 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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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부자들
한상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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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립핑

 

-         경기는 겨울처럼 다가오고,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찾아온다. 봄의 화사함을 최대한 만끽하기 위해 한겨울에 털을 깍는 모험을 부자들은 즐기고 있었다.

-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기 주변에 적을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장기적으로 제 무덤을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덤벼오는 적은 물리치되, 굳이 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         자신이 하는 일을 재미없어 하는 사람치고 성공하는 사람 없다(데일 카네기)

-         스스로 즐겁지 않으면 남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

-         한 번 원칙을 정하면 그것을 지키는 것을 습관화했기 때문에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원칙과 습관만큼 위력적인 것이 없다. 부자들은 처음의 원칙과 습관은 남과 조금 다를 뿐이지만, 그것이 쌓이면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더욱 원칙에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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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베이터 - 트렌드를 창조하는 자
김영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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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세, 트랜드를 창조하는 자 이노베이터(랜덤하우스중앙, 2005. 5)

- [12억짜리 냅킨 한 장](2001)의 개정판

 

디자인은 00이다.(39챕터)

Design is

Imagination/Visualizing/Making Difference/Creating New Use OF Tecnologies/Understanding The Needs Of Real World/Thinking Differently/Inventing/Getting Paid For What You Enjoy Doing/Making Ourselves Feel Good/Communicating/Making Comfortable Spaces/Selling Confidence/Entertaining Life/Forecasting/Finding Solution/Following Disigner’s Intention/Pleasing People/Creating Identity/Making Convenient Tools/Appealing TO Housewives/Protecting Ideas/Making Profit/Making Life Easier/Saving Lives/Helping Other People/Making Things Look Better/Negotiating/Compromising/Like Shooting For A Moving Target/Finding Better Ways Doing The Same Thing/Loving Others/So Complicated That Some People Don’t Really Know How Hard It Is/Emotinal Logic/Knowing How To Save Costs/Combining More Funtions/Making Job Opportunity/Inspring/Organizing Things/Making Change

 

변화를 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긍정적인 생각이다. 긍정적인 생각만이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나의 평소 철학이기도 하다.(프롤로그)

 

종종 사람들은 나에게 아이디어의 원천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나는 평소에 생활화된 습관들, 즉 사물에 관심을 갖고, 사용자를 관찰하고, 스스로 경험하고, 또 관련 지식을 챙김으로써 머릿속에 축적되어 온 정보들이 아이디어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한다. 상상이 습관화되면 일상의 사물들을 모두 상상 속에서 재탄생시킬 수 있다. 상상을 통해서라면 기존의 사물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진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미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18)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강자가 아니듯이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미래의 산업 구도를 더욱 예측하기 어렵다. 이제 새로운 3년을 다시 시작한 레인콤과 이노디자인도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미래를 향해 다시 가치 혁신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단지 끊임없이 차이를 만드는도전만이 오늘 같은 내일을 보장해 줄 것이다.(32)

 

나는 흔히 디자이너를 요리사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요리사라면 누구나 비슷한 재료를 쓸 것이다.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야채, 고기 등 선택하는 재료에는 큰 차이가 없다. 물론 신선한 재료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재료를 어떻게 요리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는 요리사의 재량일 것이다. 요리사는 저마다 살아온 환경과 습득한 기술이 다를 터이다. 그 차이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레스토랑에서 다양한 음식을 맛보며 즐길 수 있다.(36)

 

급변하는 디지털 신세계의 높은 파도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미디어랩의 네그로폰테 이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또는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은 앞으로 다 틀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지금의 시기는 기회이다.(37)

 

내가 블랙박스라고 부르는 디자인 프로세스였다. 이는 클라이언트의 구체적인 디자인 의뢰를 받지 않고도 가까운 미래의 소비 시장을 예측해서 디자이너가 먼저 상품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그에게도 무척 흥미로운 디자인 프로세스였으리라 생각된다…(중략) 그 기사를 읽으며 나는 기업의 아이디어를 단순히 그려주는 디자인이 아니라 디자인 퍼스트 철학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해야 하는 디자인의 역할을 바로잡기 위한 나의 오랜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45)

 

요즘 경영인들의 화두에 자주 오르는 경영 기법은 가치 혁신(Value Innovation)이다. 마침내 경영인들은 그동안 굳게 믿어왔던 경쟁우위(Competitive Advantage) 이론만 가지고는 더 이상 이윤 추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경쟁우위 이론이란 한 기업이 같은 분야의 경쟁 기업보다 더 많은 제품 혹은 서비스를 더 싸게 만들어서 경쟁 기업의 시장점유율을 뺏어옴으로써 경쟁에서 살아남겠다는 원리이다.(49)

 

옆집이 성공했다는 이유로 비슷하게 시작한 비즈니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혁신적 생각에 승부를 거는 비즈니스는 부가가치와 수익 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52)

 

그래서 나는 열여섯 살에 다시 태어났다고 말하곤 한다. 디자이너로 말이다.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디자인에 눈뜨고 디자인의 힘을 깨닫는 강렬한 경험 없이는 어느 누구도 평생을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만족하며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다른 직업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직업에 대한 강렬한 열정과 의지를 느낀다면 그는 바로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에게나 일어날 수 없는 일. 바로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일 것이다.(56)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디자인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커뮤니케이션 역할을 한다. 소비자가 처음 만나는 것은 어떤 브랜드라는 무형의 이미지가 아닌 상품이나 그 이미지를 드러내는 각종 시각물일 것이다. 소비자와 기업 사이는 엄청난 물량의 디자인이 메워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비자의 시선을 끌거나 인정받고 싶을 때 잘된 디자인 만큼 멋진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없다.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멋진 디자인이라면, 소비자에게 오랜 여운이 남는 감동을 줄 수 있다.(68)

 

나는 그(해리 앤드 어소시에이츠 회사의 창업자이자 사장인 해리 마쓰다-일본계 미국인 3)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디자인은 자신감을 파는 일이라는 그의 말이다. 사실 디자인을 결정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디자인은 상품으로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무형이기 때문이다. 상품화하기 이전에 앞으로의 시장 반응을 예측하고 심도 있는 디자인 방향을 설정해 고객 회사를 설득시키려면 우선 디자이너 스스로 자신이 만들어낸 디자인에 확신과 자신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79)

 

일리노이 대학의 교수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교수회관에서 있었던 공식 인터뷰에서도 디자인에 관한 전문 지식을 묻기보다는 보통 때 사람들을 만나 노는 분위기를 만들면서 내가 이야기를 주도해 가도록 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대화 주도 능력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83)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위험이 적고 안정된, 보장된 예측대로 결과물이 나온다면 우리는 그 디자인을 좋아할 수 있을까? 모험을 통한 새로운 디자인만이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즐거움은 바로 디자인의 최종 목표인지도 모른다.(87)

 

1986년 실리콘밸리의 산타클라라에 조그만 사무실을 임대해서 결국 나의 브랜드인 ‘INNODESIGN’ 간판을 내걸었다. 내 회사, 내 꿈과 희망을 마음껏 펼쳐보일 수 있는 곳. 내 실력을 검증받을 수 있는 진짜 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게 바로 시작인 거야. 이제 나는 진짜 게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거야…. 나는 수없이 되뇌었다. 이노 간판을 달던 첫날, 그 때의 감격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비록 직원 한 명밖에 없는 작고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이노라는 브랜드에 대한 확신은 강했다.(88)

 

그러던 어느 날, 고용된 입장의 디자이너로서 책상에 앉아 공상을 하며 노트에 이것 저것 끄적거리는데 갑자기 ‘INNO’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단어는 불쑥 내 마음속을 뚫고 들어와서 오랫동안 나를 흔들어놓았다. 평소 좋아하던 단어인 ‘INNOVATION’이란 단어에서 내 나름대로 창조한 또 하나의 단어 ‘INNO’. 나는 ‘INNO’를 언젠가 갖게 될 내 회사의 이름으로 결정했다. 그와 동시에 사각형과 삼각형, 그리고 원을 이용한 로고가 직감적으로 떠올랐다. 순식간에 떠오른 회사 이름과 로고 디자인은 나로서는 도저히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89)

 

디자인은 기가 막히게 좋더군요. 그런데 만약 당신이 생산과 판매에 뛰어든다면 또 다른 좋은 디자인을 해낼 시간을 모두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그의 조언을 들으면서 비로소 나를 억누르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었다. 단지 아이디어 하나만 믿고 무모하게 생산과 판매까지 욕심을 부렸던 일,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초조감…. 그동안 고집스럽게 껴안고 있던 것들을 떨구어내자 날아갈 것 같았다.(97)

 

예나 지금이나 나는 아티스트가 아닌 디자이너로서 나 혼자만의 취향을 위한 디자인은 하지 않는다. 디자이너는 마치 대중가수 같아서 관객의 갈채를 받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여기서 대중의 갈채란, 곧 상품을 구매함으로서 보여주는 소비자의 반응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무척 즐기게 되었다. 이것은 돈까지 벌어주는 정말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110)

 

지금 세계 디자인 시장은 엄청난 경쟁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 전장은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내놓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다. 앞서가는 선진 기업은 이처럼 제품을 통한 기업의 이미지 전달에 디자인의 기초를 두고 있. 회사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CI작업이나 홍보, 광고 등 엄청난 노력을 하는 경우는 많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생산하고 있는 상품 디자인에는 기업의 철학이 담겨 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113)

 

디자인 문화를 일구는 주요한 주체 중 하나인 소비자의 구매 형태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회사가 비슷하게 디자인된 제품을 내놓으면 소비자들은 비슷한 유형이 아닌 것을 선택할 여지가 없게 되어 비슷한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비슷한 디자인을 선택하는 것에 익숙해진 소비자가 어떻게 디자인 문화를 일구어나갈 수 있겠는가? 생각할수록 답답한 일이다.(115)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 구현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일도 자기 디자인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 모두는 자신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들이다. 아니, 그런 소극적인 자기 규정에서 벗어나 좀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멋있게 디자인하는 유능한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115)

 

와이 낫?’은 상상력의 출발이며 새로운 발상의 기초이다. 이것은 미래 사회를 향한 경쟁력의 첫걸음이 될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것이 부족한 것 같다. 그것은 교육 때문이기도 하고, 개성보다는 중용과 화합을 존중해 온 우리 사회 문화의 기조 때문이기도 하다.(122)

 

정보화된 현대 사회는 주위의 모든 정보를 같은 분야의 경쟁자들과 동시에 볼 수 있는 새로운 경쟁 환경만들어주었다. 가령 A라는 세계적인 기업에서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명품 디자인은 세계 시장에 소개되는 그 순간부터 모든 디자이너의 공유물이 된다. 경쟁사 디자이너들에게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 명품을 디자인한 A라는 기업도 경쟁사들의 후속 제품 출시를 예측하여 또 다른 신제품 개발에 착수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런 급박한 디자인 경쟁 시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스스로 보호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133)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도 발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디자이너는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디자이너가 새로운 것을 발명한다는 것에 대해 생소하게 느끼는 분위기이다. 디자이너가 진실로 아이디어가 생명인 직업이라면 발명, 특허 등의 일과 무관할 수 없다. 아이디어를 보호하고 실현하기 위해 분명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136)

 

사실 경영인들은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좋은 제품은 보기 좋고 쓰기 좋고 또한 가격 경쟁력까지 갖추어야 한다고 하는 나의 디자인 철학은, 디자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일반인들이나 경영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내용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경영인들은 디자인하면 추가 비용을 생각한다. 디자인을 잘하려면 비용이 올라간다는 고정된 생각을 누구든지 하고 있다.(138)

 

이미 유비쿼터스나 컨버전스라는 용어는 익숙한 개념이 되었고,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주거 환경에까지 큰 영향을 끼쳐 새로운 트랜드로 다가올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미래 생활에 대해 많은 추측이 오가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기술은 복잡해지지만 우리의 삶은 더욱 쉬어질 것이라는 사실.(144)

 

목표로 하는 시장의 연령대와 열 살, 많아도 열다섯 살 이상 차이가 나면 곤란하다는 마케팅 이론이 있지만 그것은 수동적인 자세가 한몫 거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늘에서 우주선까지디자인하려면 적극적으로 시장을 경험해야 하고, 열심히 사용자를 닮아야 한다. 머리로 추측만 하는 사용자 중심은 자신의 편견을 디자인할 뿐이고, 경험이 결여된 리서치는 통계의 맹점을 피해 가기 어렵다.(155)

 

중세기에는 종교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21세기에는 디자인이 세계를 지배한다… ‘바로 지금(just now)’이 중요시되는 신세대들에게 디자이너는 철학자로 다가간다.”(159)

 

디자인은 여기에 논리성이 덧붙여 강조된다. 다시 말해 디자인이란 논리와 감성의 균형이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디자이너로 만드시려고 좌뇌와 우뇌를 주신 것 같다. 어떤 이는 논리의 뇌만, 또 어떤 이는 감성의 뇌만 사용하는데, 디자이너들은 논리와 감성의 뇌를 모두 사용한다. 감성과 논리는 좌뇌와 우뇌로 분리되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디자인은 반대의 두 개념을 새로운 방법으로 결합시켜 완벽한 조화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작업에 빠져있다 보면 정말이지 신의 경지에 도전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160)

 

나는 이와 같은 소비자 심리를 이해하면서 디자이너의 역할을 ‘CUPI(Creating User’s Personal Identity)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규정지은 바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소비자 상품 메이커들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는 데 총력을 기울여 왔으나 이제는 거꾸로 그들이 소비자의 개성 창조에 커다란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점점 확산되는 CUPI 디자인 개념에 대한 나의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2003년 디자인 컬랙션 브랜드인 INNO tm를 런칭했다.(161)

 

나는 가까운 미래에 제조 브랜드 못지 않게 디자인 브랜드가 소비자의 상품 구매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Design by~’가 의미를 갖는 시대가 오고 있다. 나아가 ‘Design by INNO’ 제품을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고자 하는 이노족의 확산이 나의 꿈이다.(163)

 

(애플사의 스티븐 잡스)는 필사의 노력으로 애플 사의 주가를 40달러로 끌어올렸고, 그와 애플 사는 다시 일어서는 기적을 연출했다. 그 싸움의 가장 중요한 전략은 디자인 경영, 즉 디자인 전략이었다. 결국 스티브 잡스는 남다른 디자인에 대한 이해와 그를 바탕으로 한 전략으로 죽어가던 애플 사를 기적적으로 살려냈다. 그의 디자인 전략은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맡기고, 기술자는 디자인에 따라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전략의 결과물이 바로 아이맥에서 아이포드로 이어지는 애플의 히트 상품들이다.(171)

 

디자이너가 먼저 디자인하고 엔지니어가 그에 따라 기술을 개발한다는 디자인 원칙을 완벽하게 실현시킨 애플 사의 사례는 기업 경영자가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디자인 경영을 도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동시에 원칙을 지켜야 성공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173)

 

훌륭한 디자이너라면 디자인을 할 때 막연히 좋아서 내놓는 것이 아니라 경영의 측면을 최대한 고려해서 내놓는다. 최대 과제는 물론 소비자의 사랑이다. 이는 디자인과 경영이라는 두 가지 기술, 즉 마케팅과 디자인을 엮어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진 소수만이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174)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마음을 눈에 보이게 전달하는 것, 그리하여 사용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디자인의 힘이다. 그러므로 디자이너는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마음을 열고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 바로 이것이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덕목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마케팅은 소비자 만족나아가 소비자 감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90)

 

생산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 특히 디자이너는 500여 년 전의 다 빈치가 상상 속에서 낙하산을 그려냈듯이 무궁무진한 상상으로 미래의 세계를 현실로 이끌어내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기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만으로 혹은 예술에 대한 뛰어난 테크닉만으로는 절대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다.(197)

 

사실 디자인은 장식의 개념에서 출발했다. 특히 예전에는 디자인 = 장식미술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디자인 = 패션이라는 개념이 무척 강하다. 디자인을 제품에 추가로 붙이는 과소비적인 작업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디자인의 덕을 가장 많이 보는 기업인들까지도 디자인은 비용 부담을 주기 때문에 가급적 쉽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디자인을 추가 장식품 정도로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199)

 

좋은 디자인이 생산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디자인이 잘못되면 제품 개발에 있어 가장 비중이 큰 금형비가 올라간다. 안타깝게도 이런 우매한 디자인이 우리 주변엔 참 많다. 기업들은 디자인 컨설팅 비용은 아까워하면서도 금형 제작에 수십만 불이 더 추가되는 것에는 어쩔 수 없는 비용이라고 생각하며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 디자인 비용을 아끼기 위해 디자인을 싸구려에게 잘못 맡김으로써, 또는 디자이너를 잘못 선택함으로써 이러한 결과가 생긴다.(201)

 

디자인을 제대로 알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다각도로 생각해보자)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창조한 자신만의 고유한 디자인일 경우에만 해당한다. 기업에 이윤을 가져오는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정직이다. 정직해야만 남의 디자인을 베끼지 않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조할 수 있다. 디자인이 독창적일 때라야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203)

 

오늘날에는 이 경향이 더욱 두드러져 패션과 인테리어가, 가전과 자동차가 서로 트렌드를 넘나들고 있다. 컨버전스(Convergence)’ 컨셉이 여러 분야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제품 디자이너가 종이 배터리 기술을 응용하여 재킷을 디자인하여 제품 디자인 상을 받고, 유명 스포츠카인 페라리 디자이너가 삼성의 휴대폰을 독특한 컨셉으로 제시, CES에서 전시한 것도 이러한 트렌드의 반증이다. , 전 산업계에 걸쳐 여러 가지 상품들이 서로의 경계를 넘어가며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204)

 

그렇다면 디지털 라이프스타일이 과연 패션 트렌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직은 MP3플레이어나 휴대폰 등 단순한 디지털 기기들이 옷의 내부에 장치되거나 편리하게 휴대할 수 있는 정도지만, 이미 안경, 시계, 장신구 등의 형태로 컴퓨터 개발이 진행되고 있고, 미래는 의심의 여지없이 자연스럽게 패션처럼 입고 다니는디지털 기기들이 지배할 것이다. 급변하는 기술과 편안하고 자유로운 스타일의 만남은 패션 디자이너들로 하여금 더욱 과감하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207)

 

금세? 금새?(금사이 전자로 표현)

 

몇 해 전 미국 헐리우드에서 거행되었던 아카데미 상 시상식에서 공로 특별상을 받은 로버트 레드포드에 대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꿈과 열정의 힘으로 살아온 사람(He was driven by dream and passion)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마음에 와닿았다. ‘열정은 배우나 디자이너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이어주는 원동력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이제 멋진 항해를 할 때가 아닌가 한다.(212)

 

내가 아이디어 스케치를 위해 종종 찾는 팔로알토 사무실 인근의 스타벅스에서는 노트북을 두드리고, 헤드폰을 귀에 꽂은 채 커피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다. 조금 심한 표현을 하자면,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조용히 차만 마시는 손님은 거의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222)

 

이제 지구촌 젊은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간에 휴대용 디지털 기기, 즉 휴대폰이나 MP3 플레이어와 같은 음향기기, 또는 게임기, 아니면 노트북 컴퓨터를 배낭이나 서류가방에 넣고 다닌다. 그들은 움직이면서 일하고, 통화하고, 음악과 비디오, 게임을 즐기며 하루를 보낸다. 집에 돌아가서도 디지털 홈 엔터테인먼트에 홈 네트워킹을 활용해서 편안하면서도 효율적인 하루를 살게 될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힘은 인류의 삶을 하루가 다르게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222)(풍요롭게라는 표현의 한계. 하지만 일정 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기술의 흐름. 그 흐름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볼 것)(222)

 

디자이너에게도 이러한 환경은 마치 날개와 같아서 미래를 향한 무궁무진한 비행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한다. 나는 내가 디자이너란 사실을 나도 모르게 감사하곤 한다.(222)

 

소비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설명서를 볼 필요도 없이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야말로 진정한 소비자들의 세상이 된 것 같다.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기 위해 속속 탄생하는 디지털 기술들은 디자인이라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손쉬운 상품의 형태로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나는 디자인이야말로 소비자와 가장 가까이 만나고 있는 기업의 핵심 역량이라고 늘 이야기하곤 한다. 기술이 공장과 연구소에서 태어난다고 하면 디자인은 바로 시장과 소비자에게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디지털 라이프스타일시대에 들어와서는 과거보다 디자인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224)

 

이제는 인간의 감성을 매료시키는 그 무엇을 창조해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변화를 꾀해야 한다.

그것은 멋진 디지털 기술을 돋보이게 하는 라이프스타일 디자인은 물론, 어떤 기업이 내놓은 신선한 고객 만족 서비스일 수도 있다. 레스토랑에서 개발한 새로운 메뉴일 수도 있고 한국의 번화가를 활보하는 새로운 패션 트렌드일 수도 있다. 그렇게 끊임없는 변화와 함께 다가올 미래를 기다려 보자. 지금보다 멋진 세상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230)

 

 

디자인의 창조성은 기획의 창조성으로부터 기인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담고자 하는 내용을 시각에서부터 어필하지 못한다면 상품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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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 전망 2006
홍순영 외 엮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순영, 황인성, SERI 전망 2006, 삼성경제연구소, 2005.11.28, 초판 1.

 

<차례>

책을 펴내며

2006 전망 기조

1. 세계 경제

2. 국내 경제

3. 산업

4. 기업경영

5. 공공정책

6. 사회 문화

 

<전망 기조>

-         2005년 하반기에 오면서 경기 회복 속도가 탄력을 받기 시작

-         성장패턴이 내수 침체, 수출 호조라는 양극단에서 벗어나 점차 동반상승하는 양상으로 변화

-         2005년 연간 경제상승율 상반기 3.0% > 하반기 4.6%

-         시장금리 : 연초 국고채 발행규모가 확대되면서 반짝 상승한 금리는 2월 이후 하락세 전환

-         2006년 세계 경제는 전년에 비해 소폭 둔화될 전망

; 미국 금리 인상 효과의 가시화, 부동산 경기 진정에 따른 소비위축(2001~2004 미국의 주택가격은 저금리의 영향으로 매년 8.7% 상승, 버블 붕괴의 우려가 있으나 전체 주택담보대출에서 변동금리대출은 32% 수준이므로 가계 부채상환 능력을 급격히 약화시키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

; 중국 무역마찰 및 위안화 평가절상으로 수출 둔화, 대내적으로 거시 조정정책으로 투자 상승세 제한, 경제성장률 8% 후반으로 하락할 전망

-         국내 가계부채 문제) 2005 상반기 가계부채 전년 동기대비 7.9% 증가. 확대의 주요원인은 주택담보대출의 증가. 소비를 조정하던 판매신용은 조정과정이 마무리된 상태

-         2006년 부동산종합대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시중금리 역시 점진적으로 인상될 가능성이 높다. 2003 10월 부동산 안정화 종합대책 이후 2004 9월까지 전국의 주택가격은 2.1% 하락에 그쳐 정부의 부동산가격 안정화 노력이 과도한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

-         2001년 확장기에는 세계 IT버블의 붕괴로 수출이 급감하는 상황에서 경기는 소비에 의존. 당시 소비확대는 실질소득의 뒷받침 없이 가계부채로 빌려온 것. 2003년의 확장기에는 가계버블이 파열되면서 소비가 극도로 위축. 수출 호조세가 소비로 확산되지 못함에 따라 경기상승기가 1년 정도에 머물렀다. 2006년 상반기에는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11.2% 증가하는 등 호조를 보여 내수보다 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높을 것으로 전망

-         시장금리는 국내 경기 회복에 따른 자금 수요 확대와 국제적인 금리 상승 추세의 영향으로 상승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

-         2006년에 경제성장률이 4.8%를 기록하면 GDP규모는 754조 원으로 추산. 반면 2006년의 잠재GDP규모는 770조원으로 추정. 현재의 경기 상승 기조가 지속된다 하더라도 한국 경제에는 20조 원 정도의 여력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 이러한 GDP 갭으로 인해 2006년에도 내수 확대에 따른 물가상승 압력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

-         수출에 있어 상위 5개 품목의 수출 비중이 2004 44.2%에 이르는 등 소수 품목에 대한 의존도는 높은 상황

 

<세계경제>

미국의 장기 금리가 1%포인트 상승하면 주택가격은 2% 이상 하락하고,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은 0.4~0.6%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추정

 

* 고유가 지속

- 1999년 영국과 노르웨이의 원유 생산량은 600b/d(배럴/데이)로 세계 원유 생산량의 8% 점유. 그러나 2005 1~5월 영국의 원유 생산량은 전년 동기 대비 9.5%, 노르웨이는 7.5% 감소하는 등 북해 유전의 원유 생산량 급감

* 달러화 약세

- 1985년 플라자 합의 직전 (미국)무역적자의 주범은 일본으로 미국 무역적자 총액에서 대일 무역적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33%. 2002년 이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급증하였고, 그 주범은 잘 알려진 대로 중국.

* 과잉유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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