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기생들은 1패, 2패, 3패로 나뉘어 살아남기 경쟁을 벌이던 상황이었다. 1패는 궁중 어전에서 가무를 하는 일급 기생을 일컫는 말이었다.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면서 은밀히 매음도 하는 은군자 또는 은근짜를 부르는 말이었다. 3패는 술좌석에서 잡가나 부르며 매음하던 탑앙모리를 통칭했다. -16쪽
(고무신)
고무신들이 하나같이 내구성을 강조한 것은 막강한 경쟁 상대인 짚신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볏짚으로 만든 짚신은 너무도 잘 닳았다. 한 사람이 일년에 70켤레를 신었다는 통계가 있는 걸 보면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바닥은 울퉁불퉁해서 편치 않았고 비만 오면 스펀지처럼 물기를 빨아들여 축축한 데다 쇠망치처럼 무거워졌다.(34)
고무 부문 노동자의 연평균 임금은 1931년 당시 152원 44전으로 월평균 12원 70전 정도였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조악한 수준이었다.(43)
-34 외쪽
(성병약)
공개적으로 매춘이 이뤄지지 않았던 한반도에 창기 같은 직업적 매춘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개항 이후였다. 개항과 동시에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인 독신 남성을 겨냥해 매춘 여성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1910년까지 조선에 들어온 일본 직업여성 8,157명 중 절반 정도인 4,093명이 예기, 창기, 작부 등 매춘과 관련된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53 쪽
(과자)
종달 종달 종달 종달 종달새 운다 캬라멜 손에 들고 원족갑시다. 꼿 아레 질겁게 이약이하는 곳에는 반듯이 캬라멜의 깁붐이 잇다.
-103쪽
(산아제한)
산아제한론은 마주보고 달리는 폭주 기관차처럼 일제의 인구정책과 정면충돌했다. 일제는 조선을 합병할 때부터 다산을 적극 옹호했다. 식민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생산 현장과 전쟁터에서 필요한 인적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제가 서구식 보건 의료제도를 도입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산 못지않은 다사多死풍토를 해결함으로써 사망률은 낮추되 출생률은 높여나가고자 했다. 그 결과 1910년 이전만 해도 연평균 0.2~0.3%를 유지하던 인구증가율은 2%선으로 뛰었다. 인구의 자연증가 속도는 7~10배 빨라졌다. 한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속도였다.
-118쪽
(창씨개명)
그렇다고 일제가 단순히 호칭질서를 바꾸기 위해 골치 아프게 난리굿을 벌인 건 절대 아니었다. 훗날 도입하게 될 징병제의 근거자료를 확보하고자 창씨개명을 시행했던 것이다. 실제로 1942년, 조선에 징병제가 도입됐을 때 창씨개명으로 얻은 자료는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제는 이미 메이지유신(1853~1877) 때 일본 본토에서 창씨개명을 통해 징병제의 근거자료를 확보한 바 있었다. 1875년까지만 해도 인구의 95%가 성을 갖고 있지 않던 일본은 포고령을 통해 성을 짓게 했다. 그 바람에 어떤 어촌에서는 물고기 이름을, 어느 농촌에서는 야채 이름을 모든 주민들이 갖기도 했다.(146)-146쪽
(영화)
청계천을 중심으로 종로 일대의 북촌과 일본인들이 몰려살던 진고개(충무로) 주변의 남촌으로 나뉜 것이다. 종로쪽에서는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이 조선인 관객을 놓고 삼파전을 벌였고 남쪽에서는 을지로 쪽의 황금관, 대정관 같은 극장들이 일본인 관객을 끌었다. 극장들이 관객을 구분해서 받은 건 아니었다. 영화를 설명하는 변사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뉘다보니 자연스레 관객도 갈라졌다.(162)-162쪽
(라디오)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정각! 경성방송국이 콜 사인을 외치며 첫 전파를 쏘아올렸다. '제오디케JODK'란 콜 사인은 도쿄JOAK, 오사카JOBK, 나고야JOCK 다음으로 개국했다고 해서 알파벳 순으로 붙인 것이다.(198)-198쪽
(비누)
팥, 녹두 등을 맷돌에 간 후 보드라운 체로 쳐서 가루 형태로 쓰기도 했다. 날 비린내가 나는 이런 가루는 더러움을 날아가게 한다고 해서 비루飛陋라고 불렀다. 비누란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214)
-214쪽
(백화점)
1904~1906년에 걸쳐 하나 둘 조선에서 영업을 시작한 일본의 오복점들은 1920년대 중후반 들어 근대적 백화점으로 탈바꿈했다. 조지아, 미나카이, 히라다, 미쓰코시 등이 그런 업체들이다.(246) -246쪽
(커피)
이 호텔(손탁호텔-인용자)은 구한말 외국인들이 몰려든 사교장이었다.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러인전쟁 취재 차 종군기자로 왔다가 단골손님이 되기도 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 양이 머물기도 했다.(281)
다방은 1920년대 후반 들어서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다. 당시의 다방은 요즘의 다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월간 <삼천리>가 1936년 12월호에서 다룬 '끽다점 연애풍경'에 따르면 다방은 재즈, 클래식 음악이 있고 일간신문과 시사지, 여성지, 영화지 등 다양한 잡지가 비치돼 있는 문화공간이었다.(281)-281 외쪽
(손기정)
인단, 치약, 약품 등을 판매하던 거대 광고주들은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한편 세계적인 경사로 한껏 들떠 있는 조선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문짝만한 광고를 연거푸 내놓았다. 세발 자전거, 만년필, 축음기, 모자 등을 파는 소규모 업체들도 깜량껏 연합광고를 실어 분위기를 띄웠다.(298)
일본인들은 일장기가 베를린 하늘에 게양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좋아했으나 정작 손기정은 썰렁하게 맞았다. 손기정이 결승선을 골이니할 때도 일본 사람들의 성원은 거의 없었다. 일제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식민통치에 불리하다고 뒤늦게 판단했는지 그해 연말 일본인 수십 명을 텅 빈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 데려다 놓고는 일장기를 흔들며 성원하는 장면을 연출케 했다. 일본에서 상영할 올림픽 영화에 이 장면을 끼워넣기 위해서였다.(303) -298 외쪽
(전당포)
제일은행은 수시로 신문광고를 했는데 '임금은 비밀함과 확실함을 주지로 하야 간절히 처리함'이란 문구를 갖다붙였다. 은행이 고객이 거래 내용을 비밀로 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굳이 이 말을 집어넣은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경성에 있는 어느 일본 은행이 조선인의 예금을 유치할 목적으로 조선인 관리가 수천 금을 예금했다는 사실을 광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관리가 은행에 저축한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자 당황해서 돈을 몽땅 인출해 간 것이다. 이 일이 계기가 됐는지 은행들은 거래 내역을 철저히 비밀에 붙인다는 내용을 광고에 밝히곤 했다.(314~315)
'나는 지금도 여덜장의 전당표를 가지고 잇다. 그 중에는 한 벌 밧게 업든 매일 입고 다니는 양복조차 드러갓다. 재작년 결혼 때에 하여준 안해의 결혼반지까지도 드러갓다. (...) 이제는 전당 잡힐만한 물건이 업서서 잡혀 먹지 못한다고나 할가.(염상섭, 316~317)
그(최돈명-인용자 주)는 전당포를 잣대 삼아 네 가지로 사람들을 분류했다. 첫째 생활에 여유가 있어 안중에 전당포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는 행운아, 둘째 전당을 기한 내로 또박또박 찾아올 수 있는 행복자, 셋째 아직까지 계속하여 (전당을) 잡히고 있는 '프티부르주아', 넷째 전당거리조차 씨가 말라 잡히려야 잡힐 것조차 없는 속수무책의 '진眞프로'가 그것이다.(317~318)-314 외쪽
(바리캉)
1905년 전후에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바리캉은 일본에서 수입된 데다 발음까지 묘해 일본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프랑스인 발명자의 이름이다. 1871년 프랑스 기계 제조회사인 '바리캉 마르'의 창시자 바리캉이 발명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리캉은 유럽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서양 남성의 헤어스타일이 짧아지는 데 한 몫을 했다.(330)
바리캉을 한반도 근대의 한 상징으로 인정해도 괜찮은 것은 단발령이란 피눈물 나는 국가적 대소동 속에서 조선인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단발령은 지엄하신 '나랏님'을 강제 삭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고종 32년(1895년) 11월 15일, 궁궐 안에서는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훈련대 장교 세 명이 대신들 앞에서 칼을 빼들었고, 궁 밖에서는 일본 군인들이 대포를 묻어놓았다. 단발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겁을 주는 상황에서 태자와 함께 고종 황제는 무력하게 머리를 깎였다. 단발령의 명목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발령은 대상을 성인 남성으로만 제한한 반쪽짜리 졸속 정책이었다.(330~331)
모자 광고가 1919~1927년 기간 동안 전체 광고순위 3~4위를 유지한 것은 그만큼 모자 유행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340)
사실 단발은 쇄국에서 개방으로 노선을 바꾼 동아시아 3국에서 모두 거쳐야 했던 사건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함께 무사의 상징인 존마개를 자르도록 했고, 중국도 변발을 없앴다. 그러나 조선처럼 전 국민적 반발을 사지는 않았다. 그만큼 조선의 유교적 전통은 강했고 침략자들의 강요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이다.(343)-330 외쪽
(양장)
일본의 홋카이도와 동북 지방의 촌부들이 작업복으로 입던 몸뻬는 1940년 5월 가정 부인들이 방공훈련을 받으면서 입기 시작했다.(362)
일제는 몸뻬를 거부하는 여성들에게 치사한 보복을 가했다. 공무원, 경찰, 동반장 등을 동원해 쌀 배급, 노력동원, 징용에 불이익을 주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차를 탈 때 몸뻬를 입지 않으면 태워주지 않았다. 옷 하나도 마음대로 못 입던 숨막히는 시대였다.(362)-362 외쪽
(손기정)
인단, 치약, 약품 등을 판매하던 거대 광고주들은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한편 세계적인 경사로 한껏 들떠 있는 조선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문짝만한 광고를 연거푸 내놓았다. 세발 자전거, 만년필, 축음기, 모자 등을 파는 소규모 업체들도 깜량껏 연합광고를 실어 분위기를 띄웠다.(298)
일본인들은 일장기가 베를린 하늘에 게양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좋아했으나 정작 손기정은 썰렁하게 맞았다. 손기정이 결승선을 골이니할 때도 일본 사람들의 성원은 거의 없었다. 일제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식민통치에 불리하다고 뒤늦게 판단했는지 그해 연말 일본인 수십 명을 텅 빈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 데려다 놓고는 일장기를 흔들며 성원하는 장면을 연출케 했다. 일본에서 상영할 올림픽 영화에 이 장면을 끼워넣기 위해서였다.(303) -298 외쪽
(전당포)
제일은행은 수시로 신문광고를 했는데 '임금은 비밀함과 확실함을 주지로 하야 간절히 처리함'이란 문구를 갖다붙였다. 은행이 고객이 거래 내용을 비밀로 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굳이 이 말을 집어넣은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경성에 있는 어느 일본 은행이 조선인의 예금을 유치할 목적으로 조선인 관리가 수천 금을 예금했다는 사실을 광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관리가 은행에 저축한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자 당황해서 돈을 몽땅 인출해 간 것이다. 이 일이 계기가 됐는지 은행들은 거래 내역을 철저히 비밀에 붙인다는 내용을 광고에 밝히곤 했다.(314~315)
'나는 지금도 여덜장의 전당표를 가지고 잇다. 그 중에는 한 벌 밧게 업든 매일 입고 다니는 양복조차 드러갓다. 재작년 결혼 때에 하여준 안해의 결혼반지까지도 드러갓다. (...) 이제는 전당 잡힐만한 물건이 업서서 잡혀 먹지 못한다고나 할가.(염상섭, 316~317)
그(최돈명-인용자 주)는 전당포를 잣대 삼아 네 가지로 사람들을 분류했다. 첫째 생활에 여유가 있어 안중에 전당포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는 행운아, 둘째 전당을 기한 내로 또박또박 찾아올 수 있는 행복자, 셋째 아직까지 계속하여 (전당을) 잡히고 있는 '프티부르주아', 넷째 전당거리조차 씨가 말라 잡히려야 잡힐 것조차 없는 속수무책의 '진眞프로'가 그것이다.(317~318)-314 외쪽
(바리캉)
1905년 전후에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바리캉은 일본에서 수입된 데다 발음까지 묘해 일본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프랑스인 발명자의 이름이다. 1871년 프랑스 기계 제조회사인 '바리캉 마르'의 창시자 바리캉이 발명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리캉은 유럽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서양 남성의 헤어스타일이 짧아지는 데 한 몫을 했다.(330)
바리캉을 한반도 근대의 한 상징으로 인정해도 괜찮은 것은 단발령이란 피눈물 나는 국가적 대소동 속에서 조선인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단발령은 지엄하신 '나랏님'을 강제 삭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고종 32년(1895년) 11월 15일, 궁궐 안에서는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훈련대 장교 세 명이 대신들 앞에서 칼을 빼들었고, 궁 밖에서는 일본 군인들이 대포를 묻어놓았다. 단발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겁을 주는 상황에서 태자와 함께 고종 황제는 무력하게 머리를 깎였다. 단발령의 명목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발령은 대상을 성인 남성으로만 제한한 반쪽짜리 졸속 정책이었다.(330~331)
모자 광고가 1919~1927년 기간 동안 전체 광고순위 3~4위를 유지한 것은 그만큼 모자 유행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340)
사실 단발은 쇄국에서 개방으로 노선을 바꾼 동아시아 3국에서 모두 거쳐야 했던 사건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함께 무사의 상징인 존마개를 자르도록 했고, 중국도 변발을 없앴다. 그러나 조선처럼 전 국민적 반발을 사지는 않았다. 그만큼 조선의 유교적 전통은 강했고 침략자들의 강요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이다.(343)-330 외쪽
(양장)
일본의 홋카이도와 동북 지방의 촌부들이 작업복으로 입던 몸뻬는 1940년 5월 가정 부인들이 방공훈련을 받으면서 입기 시작했다.(362)
일제는 몸뻬를 거부하는 여성들에게 치사한 보복을 가했다. 공무원, 경찰, 동반장 등을 동원해 쌀 배급, 노력동원, 징용에 불이익을 주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차를 탈 때 몸뻬를 입지 않으면 태워주지 않았다. 옷 하나도 마음대로 못 입던 숨막히는 시대였다.(362)-362 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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