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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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에서 노동으로, 괴물에서 인간으로

 

차별에 찬성하는 이유는 차별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적이 좋으면 시험에 붙고 정규직이 된다.

성적이 안 좋으면 시험에 떨어지고 비정규직이 된다.

 

그러나 인생을 정규와 비정규로 갈라놓을 만큼 성적의 차이가 있을까?

그 성적은 과연 실력/능력일까?

그 실력/능력은 과연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것일까?

 

이십대를 괴물로 만든 사회의 기성인(교사)으로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회사를 경영할 사람보단 회사에서 노동할 사람이 훨씬 많은데 대학에 경영학과는 넘치고 노동학과는 없다. 경영을 중시하며 노동을 무시하는 구조를 뒤집어야 괴물된 이십대를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

 

<밑줄>

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무시한다.

 

학교에서 수시 전형으로 합격한 사람들을 무시하기 일쑤다. ‘수시충이라면서 공공연하게 비하하기도 한다. 지역균형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지균충이라 부른다.

 

오늘날 인문사회 계열 학과들은 망해가고 있는데, 경영학과는 나라에서 지원까지 받으며 커가고 있다. 대학 전체가 경영학과화되고 있으면 대학생 전체가 경영학적으로사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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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이기는 철학 -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공부법과 사고법
오가와 히토시 지음, 장인주 옮김 / 처음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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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굳이 AI를 이길 필요가 있을까? 인간의 일은 AI나 로봇에게 주고, 인간은 원래대로 놀면 좋을 듯

 

<밑줄>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는 원래 인간은 노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토기보다 먼저 토우가 만들어진 것이고, 실용보다는 제사나 표현이 먼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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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제자도 - 한 길 가는 공동체, 브루더호프 사람들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지음, 브루더호프 공동체 엮음, 원충연 옮김 / 홍성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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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더호프(직역하자면, 형제들)는 독일에서 시작되어 영국, 미국 등으로 퍼져간 기독교 공동체이다. 이 책은 부르더호프 설립자의 아들인 하인리히의 말을 엮은 것이다. 공동체는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로 살아간다는 뜻으로 읽고 싶다.   


<밑줄>

진정한 리더십은 섬김입니다. 이것을 악용하여 힘을 행사하는 건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 리더십의 남용이 교회 공동체에 특히 악한 일입니다. 형제자매라면 자발적으로 신뢰하며 마음을 열어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입니다. 독재국가라면 사람들은 더 큰 권력에 굽힐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들의 영혼이 그 권력이 악한 것을 알고 싫어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를 신뢰하는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리더십을 악용하는 사람은 영혼의 살인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권위를 말할 때, 그 권위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게 아님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위를 주셨지만,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교회를 이끌라고 세워진 우리는 사람을 지배하는 권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쉽게 잊혀집니다. 끊임없이 겸손을 추구해야 합니다.

 

말씀의 종(목사)은 혹여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교회를 억압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모든 말씀의 종이 복음을 왜곡시키거나 바꿔치지 않고 늘 새롭게 교회에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책임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권위로 형제자매를 부하처럼 다룰 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말씀의 종이 우두머리 행세를 하면 용기가 있어야 항의하거나 특별할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용기를 갖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어느 누구도 아닌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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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 사는 이유
에버하르트 아놀드 지음, 김순현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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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더호프 공동체를 만든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책,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읽으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책, 공산주의 선언이 떠올랐다. 두 책의 공통점은 무거운 주제와 달리 무척 가볍다는 점이다. 작고 얇아서 그렇다. 둘다 함께하자는 게 주제다. 공동생산하여 공유하자는 말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은 매우 다르다. 에버하르트는 비폭력. 맑스와 엥겔스는 폭력. 누구의 말이 옳을까?

 

우리처럼 국제 평화와 사유재산 제도의 철폐와 모든 재화의 공유를 주창하는 정치 단체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단체들의 투쟁에 더 이상 가담해서는 안 되며, 그 투쟁이 그 거대 단체들의 정신에 걸맞는 것이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도 그 단체들처럼 모든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집과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노예 노동으로 인해 정신적 발전이 위축된 사람들에게 마음이 쓰이고 쏠린다. 우리도 그 단체들처럼 무산자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편들지만,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하여 정반대의 집단들에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 계급투쟁을 멀리한다.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에게 목숨을 건 사람들에 목숨을 걸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의 방어전은 물론이고 프롤레타리아의 방어전도 반대한다. 순수한 영적 싸움 속에서만 우리는 자유와 일치,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옹호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한다. 이로써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생활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다. (에버하르트 공동체로 사는 이유 )

 

성직자가 언제나 봉건파(지주)와 손을 맞잡았던 것처럼 성직자 사회주의도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을 맞잡는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사회주의의 색채를 가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도 없다. 기독교 역시 사적 소유에, 결혼에, 국가에 극구 반대하지 않았던가? 기독교는 그 대신에 자선과 구걸, 독신과 육욕 근절, 수도원 생활과 교회를 설교하지 않았던가. 기독교 사회주의는 성직자가 귀족의 분노에 봉헌하는 성수일 뿐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폭력적 전복에 의해 달성될 수 있을 뿐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족쇄 말고는 공산주의 혁명에서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맑스, 엥겔스 공산주의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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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10년의 미래 -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할 10가지 어젠다
정재영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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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소통, 결정, 미래 등의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좋은 책을 읽게 되었다. 


어느 집단이든 이견이 있게 마련이다. 그 의견의 차이를 확인하고 약속을 합의해가는 과정이 투명하고 민주적이어야 한다.  

 

<밑줄>

교회는 여전히 교회 조직의 관료제로 인해 비인격적 인간관계를 야기하고 있다. 교회조직의 관리자는 행정가로 변신하였고, 교역자들은 하나님 나라 사역의 동역자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능직 종사자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교회 내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결정권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교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은 교회 관료의 정책 결정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재정 지원은 평신도들이 제공하지만 재정의 사용은 소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사용이 결정되고 있다. 흔히 교회를 공동체로 표현하지만, 사실 소수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조직을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이에 대한 개선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155)

 

부모 세대에 비해 종교적 충성도가 낮은 젊은 세대들은 무조건 순종하기보다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이것이 교회 운영에도 반영되기를 바라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상명하복을 강조하게 되는 관료제적 대형 교회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회중 중심의 중소형 교회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에 기존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찾고 있는 청년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앞으로는 기성세대보다는 젊은 세대들의 영적인 욕구에 민감하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교회에게 성장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므로, 이들의 영적인 욕구에 대한 파악과 이해가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222)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세운 평신도 교회를 주제로 쓴 평신도 교회 이야기 : 21세기 한국교회의 비전(최승호 저, 대장간 출판사)이 출간되면서 평신도 교회라는 단어가 회자되기 시작하였다. 목회자가 없으면 절대로 교회를 구성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이러한 성경의 진리에 눈을 뜨면서 삼삼오오 모여서 교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제는 상당수의 평신도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평신도 교회의 등장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으나, 갈수록 많은 교회들이 민주적인 교회 운영, 개방적인 의사소통구조로의 전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정체성이 평신도 교회인지 아닌지를 묻기 보다는, 평신도의 참여도를 얼마나 보장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다만 평신도의 사역을 위해서는 평신도의 역량 개발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평신도들이 신학 지식, 목회 감각, 감성의 민감성 등에 대하여 높은 수준의 기독교 교양을 갖추고 있는 교회의 경우에는 평신도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는 평신도의 훈련 프로그램과 리더십의 개발을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리더십은 양적 성장보다는 사람의 요구에 민감한 리더십, 선택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제공하는 열린 리더십, 사람들의 표현과 문화적 욕구에 민감한 리더십, 여성성과 양성 평등의 원리를 이해하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 최근 교회에서 평신도들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것은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평신도의 참여도를 증진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은사개발 프로그램이나 리더십 코스가 개설되고 있는데, 이는 평신도들이 새로이 주체성을 가지도록 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프로그램은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하는 주체로서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을 편의상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기는 단순히 내적 치유나 영적인 양육 등을 통한 전인적 성숙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전체 교회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공동체를 통한 사역으로 연결되어야 바람직할 것이다. (236)

 

최근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말이 끊임없이 들리고 있다. 젊은이들은 한 사회 안에서 언제나 기성세대에 도전하며 새로운 사회의 변화를 가장 첨단에서 수용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말은 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미래 사회를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본질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항상 역사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한스 큉의 말대로, 교회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대에게 설득력이 있는 모습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고 시대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조직은 보다 탄력 있고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조화될 필요가 있고, 교회 구성원은 보다 주체성을 가지고 각자의 전문성에 따라 다양한 영역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는 교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여 의사 결정을 하고 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적실성을 갖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가정교회, 평신도교회, 사이버교회 등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예배 처소도 변하고 있어, 전통적인 형태의 교회당이 아닌 학교나 시민 단체 강당뿐만 아니라 카페, 레스토랑, 심지어는 클럽이나 공연장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기존의 관점으로 본다면 교회가 변질되고 왜곡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저 교회가 새로운 형태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젊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새로운 교회 운동은 일종의 한국형 이머징 처치로 봐도 좋은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고, 이러한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도 없다. 교회가 오늘날의 상황에 적실한 모습으로 적응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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