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 - 한국교회, 공교회성과 공동체서 그리고 공공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망한다
이도영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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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는 멈춤이다 - ‘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를 읽고

 

페어 처치’, ‘성자와 혁명가의 저자인 이도영 더불어숲동산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책들만 따로 읽어도 좋은 독서경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많은 책들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즉 독서를 위한 독서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특히 월터 브루그만의 안식일이 저항이다’, 앤디 스턴의 노동의 미래와 기본소득’,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샘 피지개티의 최고임금’, 크로포트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 린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코로나를 주님의 계시로 이해했습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신께서 멈춤이라는 계시를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 길을 계속 걸으려고 한다. 따라서 이 멈춤을 통해 바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공교회성, 공동체성, 공공성의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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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공평과 정의를 회복하지 않으면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는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이 예배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명백한 말씀을 외면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이후까지 내다보는 예언자적 상상력의 부재를 목도하는 것 같았다. 본질을 회복함 없이 단지 주일 공예배를 회복한다고 해서 코로나 19 이후 시대의 교회가 그 이전과 뭐가 달라질까?

 

신약에서 말하는 주일성수는 율법이 아니다. 로마서가 말한 것처럼 각자 믿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공동체적 약속이고 신앙의 훈련이며 감사의 축제다. 주일성수와 공예배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 공동체적 결정에 따라 다른 날에 예배를 드리거나 다른 형태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초기 교회는 핍박을 피해 지하 묘지 공간인 카타곰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고 재난이 닥칠 때는 예배를 폐하거나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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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경제학 - 맨큐의 경제학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스티븐 A. 마글린 지음, 윤태경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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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데 어렵다

 

좋은 주제를 다루었으나 읽기 어렵다. 옮긴이 후기를 먼저 읽고 본문은 천천히 공부해 가며 읽으면 좋을 것 같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자기 조정 시장을 전 지구적 규모로 실현하면 모든 나라가 자유 무역으로 번영할 수 있기에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이어지리라 믿었다. 이런 믿음은 세계 대전을 계기로 종교적 광신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모든 경제 활동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맹신은 한동안 모든 나라에서 거부됐다가 이후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라는 형태로 부활했다. 경제 활동을 조직하려면 정부의 산업 정책이 필요할 때도 있고, 여러 가지 규제가 필요할 때도 있으며 노사정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할 때도 있는데,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시장 외의 방법으로 경제 활동을 조직한다는 생각이 이단시됐다. 그 결과 선진국에서는 제조업 공동화, 양극화 공동체 의식 붕괴 등 여러 문제가 나타났다.

이로 인한 문제의식의 고조로 20119, 미국에서 월가 점령 시위가 벌어졌다. 그해 11월 초에는 하버드 점령 시위의 일환으로 맨큐 교수의 경제학 원론 수업을 듣던 하버드대 학생들이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하버드대에서 이단아처럼 홀로 주류 경제학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대안을 촉구하는 강의를 해 온 스티븐 마글린 교수는 2011127, 학생들의 요청으로 맨큐의 경제학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공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의 핵심 내용과 메시지는 이 책 공동체 경제학에 자세히 나온다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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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는 아소시아시옹(associantion, 단체)과 다르다. 양자의 근본 차이는 정체성과 헌신에 있다. 양자의 근본 차이는 정체성과 헌신에 있다. 아소시아시옹도 사회적 접착제로서의 그능을 수행하지만, 구성원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 그리고 구성원의 헌신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향우회, 스포츠 동아리, 포커 클럽에 들어가는 선택이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임은 손쉽게 탈퇴할 수 있기 때문이다.내가 가입한 모임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내가 동의하지 않는 활동을 하면 나는 굳이 다툴 필요 없이 말없이 떠날 권리가 있다. 아소이사이옹은 구성원을 떠나게 하는 원심력에 대항해 구성원을 붙잡아 둘 구심력이 약하다.

반대로 공동체는 구성원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공동체는 구성원의 정체성을 영구히 확정하지도 않고, 구성원을 강압적으로 구속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스포츠 동호회에서 탈퇴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공동체를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아미시 공동체를 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축복의 세계를 살기 위해 상품의 세계를 포기할 준비가 된 상태는 아닐지 몰라도 아미시가 축복으로 여기는 것을 상품화할 때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미시 공동체는 시장이 공동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공동체에 종속된 채 세상을 살아가고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음을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을 다 포함하여 보여준다.

 

경제학자는 계산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을 마치못해 또는 기꺼이 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적어도 경제학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주장하면서 효율에 집착한다. 경제학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목표를 효율이라는 관점으로 비교할 수 있게 측정하는 준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때 수단은 시장이다.

 

케네스 볼딩은 경제 환경의 변화를 카우보이경제와 우주선경제로 구분하여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환경 친화적 경제 정책 수립을 주장했다. ‘카우보이 경제란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환경처럼 자원이 사실상 무한정하고 오염 물질을 무제한으로 버려도 괜찮은 개방계를 말한다. ‘카우보이 경제란 우주선을 타고 장기 이동하는 우주 비행사처럼 소비할 자원이 제한적이고 오염 물질을 버려서는 안 되는 조건이기에 자원을 재활용하고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만 써야 하는 폐쇄계를 말한다.

 

21세기 서구인들이 노동에서 해방되리라는 케인스의 예측은 왜 이렇게 형편없이 빗나갔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진행된 소득 분배의 악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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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반대한다 - 우리는 왜 이기는 일에 삶을 낭비하는가
알피 콘 지음, 이영노 옮김 / 민들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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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서 협력으로 - ‘경쟁에 반대한다를 읽고

 

우리 사회의 경우 구제 금융 사태 이후 성적 상위 1%만 교대나 사범대에 진학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서 모범생 출신의 교사들이 학교를 채우게 되었다. 학생시절부터 경쟁이 몸에 밴 교사들은 동료교사들과도 경쟁관계를 맺는다. 좋은 교육 자료를 공유하기 보다 혼자만 알고 있다가 연구수업 때 자신의 탁월함을 과시하는 용도로 활용한다. 교사들의 경쟁 심리는 아이들에게 전염된다.”

 

현병호 민들레 출판사 대표가 이 책을 펴내면서 앞에 붙인 글이다. 공감한다. 내가 사범대학교에 진학할 때는 국어교육과가 국어국문과보다 소위 커트라인이 낮았다. 그 덕분에 나처럼 상대적으로 공부를 못하고, 모범적이지 않은 학생이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요즘 교사들은 참 똑똑하고 모범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협력을 하지 않는다. 물론 비정규직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노조에도 가입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협력하지 않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아이들이 크면 어쩔 수 없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므로 어렸을 때부터 경쟁을 가르치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 불리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들이 두가지 노력을 동시에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아이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맞닥뜨릴 일을 준비시키는 동시에, 그 일들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목표를 후자에만 집중한다면 단기적으로는 아이들의 삶이 어려워질지 모른다. 그러나 전자에만 집중한다면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겪었던 해로운 제도 속에서 서로를 불신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의 문제를 떠나서, 이미 아이들은 경쟁에 익숙하다. 타인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경험이 꼭 필요할지는 몰라도, 우리 아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유치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경쟁이 전혀 없는 곳에서 생활했던 아이가 있다 해도,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간 후에 그곳의 환경이 너무 경쟁적이어서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학교가 아니더라도 경쟁을 가르치는 곳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이미 승패의 구조에 너무나 익숙하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경쟁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핵심인 경쟁에 대한 좀 더 넓은 안목과 협력적인 제도에 대한 경험이다

 

저자 알피 콘은 협력학습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나도 그런 마음에서 자식들을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경쟁이 거의 없는 대안학교에 보내고 있다. 아이들이 스마트폰으로 게임 안 하는 것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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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설로 배우는 인간관계 3 평화를 만드는 소설 읽기
따돌림사회연구모임 서사교육팀 지음 / 작은숲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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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이 집 아저씨더러 하등동물이란다. 병자 고름 긁어서 돈이나 모을 줄 알았지, 세상이 곤두서건 인간이 돼지가 되건 감각도 못허구, 그저 맛있는 음식에 좋은 옷, 편안헌 집에서 호박 같은 마나님이나 이뻐허구. 그런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구.”

 

“천민! 속물! 세상이 곤두서는 데는 태평이면서, 옷 좀 거꾸로 입는 건 저대지 야단이야”

 

“이 동물아! 내가 이렇게 꼼짝 않구서 처박혀만 있으니깐, 아무 내력 없이 그리는 줄 알아? 나는 이게 싸움이라구, 이래봬두. 더위가 나를 볶으니까, 누가 못 견디나 보자구 맞겨누는 싸움이야, 싸움!”

 

“속 모르는 소리 말아. 이걸 떠억 입구 이걸 푸욱 눌러쓰구, 저 이글이글한 불볕에, 어때? 온갖 인간들이 더위에 항복하는 백기 대신 최저한도루다가 엷구 시원한 옷을 입구서 그리구서 허어덕허억 쩔쩔매구 다니는 종로 한복판에 가 당당하게 겨울옷을 입구서 처억 버티구 섰는 맛이라니! 그게 어떻게 통쾌했는데!”

 

채만식 소설 ‘소망’에서 서술자의 남편은 ‘곤두서는 세상’에서 ‘태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천민, 속물, 하등동물’이라 욕하며, ‘불볕 더위’에 ‘겨울옷’을 입고 ‘종로 한복판’에 ‘버티고 서있는’ 저항을 한다. 서술자는 남편이 미쳤다고 생각해서 신경과 의사에게 진료를 의뢰하려 한다.

 

남편은 정말 미쳤을까? 적어도 그가 세상에 ‘부적응’하고 있는 것엔 틀림이 없다.

 

“남들은 다 같이 대학을 마치구 나와서두 삼사 년씩 취직을 못해 쩔쩔매는 세상에, 그해 동경서 나오던 걸루 신문사에 들어갔구, 인해 오년이나 말썽없이 있어 왔으니깐. 그만하면 신문사 인심두 얻구 또 사장도 자별하게 대접을 했답디다. 그런 것을 헌신짝 벗어 내던지듯 내던지구는 사람마저 저 지경이 되었으니..... 허기는 눈동자가 옳게 박힌 놈은 이짓 못해 먹겠다고, 그 무렵에 바싹 더 침울해 허기는 했었지만서두”

 

동경으로 유학을 다녀와 신문사에서 정직원으로 오랫동안 인정을 받았으니 생계엔 지장이 없을 뿐더라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눈동자가 옳게 박힌 놈은 이짓 못해 먹겠다’면서 사직원을 내고 나왔으니, 그가 일부러 세상에 부적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부적응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일제 강점기 시대에 언론인으로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기는커녕,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것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라면? 그 적응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면 누가 제정신일 수 있겠소?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짓이오!" (세르반테스 - ‘돈키호테’ 中)

 

미친 세상에 미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미친 세상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가족과 이웃에게 무조건 욕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한다고 미친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 미친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친 세상에 대응하는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

 

세상이 미쳤으니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되,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낮은 자세로 친절하게 말해줘야 한다. 자칫하면 오히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불쾌감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쳐서 포기하지 않도록 늘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에 저항해야 한다. 마치 돈키호테처럼 말이다. 쉽게 해결될 것이란 기대를 가지면 쉽게 절망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면 아예 희망을 갖지 않았던 것보다 더 깊은 열패감으로 완전히 반대의 사람이 되어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세르반테스 - ‘돈키호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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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전 창비교양문고 6
염상섭 지음 / 창비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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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세 전의 겨울이 시간적 배경이다. '나'(이인화)는 동경(도쿄) 유학생으로 경성에 있는 아내가 위독하단 전보를 받고, 신호(고베), 하관(시모노세키), 부산, 김천을 거쳐 경성에 도착한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일본을 향해 출발한다.

 

아내가 죽을 것 같다는 전보를 받고 아직 죽지는 않은게로군!”, 죽기 직전의 아내를 두고 어서 끝장이나 났으면!”, 죽은 아내에 대해 하나를 낳아 놓으니까 신진대사로 하나는 가야지요.”라고 말하는 남편이다.

 

가족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니, 민족과 민중에 대한 인식 역시 지극히 개인적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출간된 소설이란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일제의 탄압으로 처음엔 연재가 중지되었으니까. 작가 염상섭이 일본 유학 중에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구속된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는 채만식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 영감처럼 비판을 하기 위해 만든 인물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이인화를 이해해 달라는 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인화)를 이해하기 힘들다.


지금 우리 사회에 나는 만족하는가? 만족한다면 이유는 특별한 불이익을 받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불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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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간에 서로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사랑한다는 것도 극단에 가서는 남이 나를 사랑하거나 말거나 저 혼자의 일이다. 저 사람이 받지 않더라도 자기가 사랑하고 싶으면, 자기가 만족할 데까지 사랑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사랑할 자유도 있거니와 사랑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부부간이라고 반드시 사랑하여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을까.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기는 하다. 학교나 하숙에서 지내는 데는 일본사람과 오히려 서로 통사정을 하느니만큼 좀 낫다. 그러나 그외의 경우의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망국백성이 된 지 벌써 근 십년 동안 인제는 무관심하도록 주위가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었다. 도리어 소학교 시대에는 일본 교사와 충돌을 하고 퇴학을 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한다는 둥, 솔직한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비교적 열렬하였지마는, 차차 지각이 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간 후에는 간혹 심사 틀리는 일을 당하거나 일년에 한번씩 귀국하는 길에 하관에서는 부산, 경성에서 조사를 당하고, 성이 가시게 할 때는 귀찮기도 하고 분화기도 하지만는 그때뿐이요, 그리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킬 기회가 적었었다.

 

덕의적 이론으로나 서적으로는 무산계급이라는 것처럼 우리 친구가 되고 우리 편이 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에 그들과 마주 딱 대하면 어쩐지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혹은 그들에 대한 혐오가 심하여지면 심하여질수록 그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논법으로, 더욱더욱 그들을 위하여 일을 하여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지는 모르나, 감정상으로 그들과 융합할 길이 없다는 것은 아마 엄연한 사실일 것 같다.

 

소위 구제니 자선이니 하는 것은 향기 있고 아름다운 말이나 행위로 알지만, 실상은 사회가 병들었다는 반증밖에 아니 되고, 그 어느 구석에든지 이기적 충동이 있다고 보이는데요.

 

인생의 이상이란 것은 나는 생각해 본 일도 없습니다마는, 구태여 말하자면 자기를 위하여 산다 할까요. 하지만 결코 천박한 이기주의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순사나 헌병이라도 조선인보다는 일본인 편이 나은 때가 많다. 일본 순사는 눈을 부라리고 그만둘 일도, 조선 순사는 짓궂이 뺨을 갈기고 으르렁대고서야 마는 것이 보통이다. 계모 시하에서 자라난 자식과 같은 심보다.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만나면 피차에 동정심이 날 때도 있지마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스스로 불만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심하면 심할수록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더 밉고 보기싫어서 그런가 보다. 혹시는 제 분풀이를 여기다 하는 것일 것이다.

 

생각하면 조선사람이란 무엇에 써먹을 인종인지 모르겠다. 아침에도 한잔, 낮에도 한잔, 저녁에도 한잔, 있는 놈은 있어 한잔, 없는 놈은 없어 한잔이다. 부어라! 마셔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이것만이 그들의 인생관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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