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메이드 라이프 - 손으로 만드는 기쁨, 자연에서 누리는 평화
윌리엄 코퍼스웨이트 지음, 이한중 옮김, 피터 포브스 사진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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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삶에 대한 좋은 말씀은 노장자, 부처, 간디, 소로, 니어링 등을 통해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명단에 윌리엄코퍼스웨이트도 더하고 싶다. 그의 책 ‘핸드메이드라이프’에선 특히 교육과 건축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가끔 매끄럽지 않은 번역이 눈에 띠는 것을 제외하곤 참 좋다.

<특히 좋았던 부분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장을 보기 위해 40분 동안 카누를 저어 나간다. 모터를 이용하면 1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40분씩 걸려 카누로 간다고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노젓기를 즐긴다. 이때 나는 일주일 중에 가장 느긋한 시간을 보내며,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수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운동이 되니 기분도 좋다. 모터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터를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은 ‘더 나은’ 방법이 아니라 단지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몇 년 전에 내 이웃 중 하나가 동네의 어느 농부에게서 감자를 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그는 농부로부터 파운드당 감자 값이 1.5센트라는 말을 듣자 반가워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겨우 그 돈을 벌자고 감자를 키워서는 안됩니다.” 농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털어놓았고, 생산비가 파운드당 5센트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내 이웃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파운드당 5센트씩을 더 얹어 드리지요. 당신이 농사를 그만두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불이익이 되니까요.”


자발적 노예제도
누구나 노예제도-사람을 파는 것-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파는 것 또한 잘못된 일 아닌가? 고용주들은 이런 말 하기를 참 좋아한다. 즉, 즐거운 작업 공간, 재미있는 동료들, 두둑한 월급, 연금과 보험 지급, 짧은 노동시간, 넉넉한 휴가, 스톡옵션, 보너스, 승진 기회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조건에서의 일도 본인이 하고 싶지 않으면-돈만을 위해 하는 일이라면-그 일은 여전히 몸을 파는 행위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는 지금 상황을 당분간은 묵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이제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파는 시간을 매달 조금씩 줄일 수만 있다면, 해마다 일하는 날수의 100퍼센트를 모두 자신을 파는 데 쓰지 않고 70,50,30퍼센트로 점점 줄여나가는 때가 올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시간을 줄여나가는 것은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실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기 위한 첫걸음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우리 자신을 파고 있는지 자각하는 것이다.
대개 일터에서 돌아왔을 때 불행해 보이는 어른들의 모습은 집안 분위기를 불안하게 만든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어른들이 불행해 보이는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면 일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여러분의 아이들과 정직하게 대면하여 여러분이 팔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여러분은 매길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알게 해줄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보라. 부모가 자신들의 그릇된 생활방식을 알면서도 불행을 계속해서 합리화함으로써 우리들도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도록 만드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치료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해 보일 것이다.
본인에게 맞지 않는 일을 아예 그만두고 새 일을 찾아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상황을 개선할 수는 있다. 현재 하는 일에서 성장하고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노력하라. 현재의 일에서 가장 신뢰하는 부분에 힘을 쏟으라. 비생산적이고 건강하지 못하고 낭비라고 생각되는 방식에 쏟는 시간을 줄여서, 즐길 수 있고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일에 쓰도록 노력하라.
우리가 스스로를 파는 행위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 우리를 둘러싼 사회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하루의 작업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단지 ‘상품’을 적게 쓰면서 살기로 정하기만 하면 된다. 콜라나 담배나 술 없이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불량식품이나 커피나 차를 소비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 또한 유행이라는 일종의 사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새로운 옷을 자꾸 사기보다는 지금 갖고 있는 옷을 오랫동안 입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방법도 있다. 자동차나 다른 장비도 마찬가지다.
소박한 삶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대신, 꼭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고용되어 일하는 시간의 총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너무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들은 제외하고-이 각자의 노력을 다할 경우 이들에 의해 절약되는 시간은 엄청날 것이며, 스스로를 내다 팔 필요성 또한 절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자신의 집안일-집을 짓거나 텃밭을 가꾸거나 기계를 수선하거나 바느질을 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볼 때, 개인이 전체 노동시장에 의무적으로 기여해야 할 시간 또한 줄어들 것이다.
스코트 니어링은 신체가 멀쩡한 모든 성인들이 하루에 4시간만 밥벌이에 종사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그로서는 4시간도 후하게 쳐준 셈이다. 간디는 하루 2시간이면 인간의 기본 욕구를 채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한 이후에 현대의 도구들은 생산성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노동이 고르게 분배된다면 각자의 삶에서 일은 아름답고 흥미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일을 하는 데 드는 노력을 줄여야 한다. 예컨대 제대로 된 여건에서 빵을 굽는 일은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로의 압력이 있거나 대가가 너무 적거나 소외된 환경이거나 의심스러운 재료를 써야 하는 입장이라면 빵 굽기가 고역이 될 수 있다.

우리사회에는 윤리적 바탕이 빈약한 전문 지식의 예가 많다. 대량 살상 무기 개발에 투입된 과학 영재,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챙기기 위해 시장 조작에 동원되는 수학, 대중을 속이기 위해 광고에 이용되는 예술에 가까운 재능을 잘 살펴보라. 암기 위주의 지식은 사회 전체의 행복을 염려하는 마음의 견제를 받지 않으면 삶과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진심어린 마음이 없는 배움은 위험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가르치는 주된 이유가 돈 때문이라면 이는 명백히 자기 몸을 파는 행위이다. “그러면 달리 무엇 때문에 가르쳐야 하는가?”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즐거움 때문이어야 한다. 둘째는 가르침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역할 때문일 것이다. 셋째는 가르침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가르치는 사람 또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리라.

강요된 교육은 폭력이다. 아주 힘들긴 하지만 권위적인 방법을 써서 사실 위주의 지식을 어느 정도 주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어떠한가? 게다가 강요된 배움이란 얼마나 지독히도 낭비적이며, 학생과 교사의 시간과 마음을 갉아먹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다보면 교사와 학생 모두 ‘강압’이 의사소통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학교에서의 엄한 통제와 강압적인 규율은 배우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훼손해버린다. 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하면서 그런 원칙을 가르치고 그런 이해관계를 옹호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창의성과 순응성은 정반대의 속성이다. 민주주의는 창의성을 토대로 번성하는 반면 군대와 감옥과 학교는 순응성을 토대로 번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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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 논술 - 재미있는 논술을 위한 생각 퍼올리기
오태민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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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추죄한 '청소년경제글쓰기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책에는 전경련 경제논술 대회에서 수상한 학생들의 글이 실려 있는데, FTA를 찬성하는 학생들의 글만 실려 있다.   

FTA를 찬성해야만 전경련에서 상을 줬을까? 아니면 반대한 경우에도 상을 줬는데 공교롭게도 그런 사례를 책에 실지 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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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_taemin 2014-04-14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오태민입니다.
제가 이 글을 아주 늦게 보았습니다.

먼저 졸저에 관심을 가져주신점 감사드립니다.

오래전 얘기지만 당시 심사위원으로 참가해서 기억하기로는 FTA찬성 3개 FTA반대 2개를 대상 후보로 상신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상과 우수상과 가작등이 나왔을 겁니다.

마중물 논술에 인용한 대원외고 학생의 답안은 자세히 전반적으로는 찬성쪽이지만 전적으로는 아니었던 것이었고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언급할 이유가 있어서 인용한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건 거제고등학교 학생의 답안인데 내고향 거제에 라고 시작하는 그 답안이 우수상인가를 받아서 거제 전체에서 프랭카드가 붙은 모양입니다. 다음해에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기억이 있는데 거제 출신들은 모두 내고향 거제에서로 시작해서 한참 웃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 사례를 인용하고자 학생들의 답안을 인용한 것일 뿐입니다.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신나 2016-08-24 12:11   좋아요 0 | URL
늦게 답을 해 죄송합니다. 전경련, 한경(특히 생글생글), 자유경제원 등에서 지나치게 신자유주의, 자유무역을 강조하고 있어서 제가 나름 그 균형을 맞추고자 했습니다. 저자에겐 개인적 감정이 전혀 없으니 이 점 역시 양해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범의 교육특강 - 대한민국 학부모와 선생님이라면 꼭 읽어야 할 교육필독서 미래를 바꾸는 행복한 교육 시리즈 1
이범 지음 / 다산에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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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강사 출신으로 교육비판서를 쓴 사람이 이범씨만은 아니다. 몇년전 이기정씨가 쓴 <학교개조론>을 읽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범씨의 글만큼 공감하지는 않았다. 
 

이범의 <교육특강>은 저자가 언론을 통해 발표해온 컬럼들이 모여져 나온 책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짜임새 있는 책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후반부에 가서는 맥이 빠진다. 다만 구체적인 수치를 가지고, 일본, 미국, 유럽 등과 우리 교육을 비교하는 대목에서는 책장을 팍팍 접게 된다.  

저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꼭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다.  
"그래서 유럽식과 미국식 가운데 무엇이 더 좋다는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우리식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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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거의 사회사 한국 근현대 주거의 역사 1
전남일 외 지음 / 돌베개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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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거의 사회사(전남일 외, 돌배게)를 읽었습니다. 구한말부터 오늘까지 근현대 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땅에 집 짓고 사는 것에 대해 새롭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근현대사에서 잘못 끼운 첫 단추는 바로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점입니다. 그것 때문에 분단이 되었고 전쟁을 치렀고 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두려워하며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느라 복지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서민들이 집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이유도 바로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입니다.   

 

 

서민들이 마당 있는 작은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소박한 꿈을 이루고자 한다면 잘못 끼운 첫단추를 바로 끼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친일청산입니다.  

  

 

<본문 발췌>  

 

원래 조선시대 한양에서는 토지의 개인 소유가 인정되지 않았다. 집을 건축하고자 희망하는 사람이 신고를 하면 관청에서는 이들에게 빈 땅을 분양하거나 대여해 주었다. 말하자면 토지의 지상권만 분양했던 것이다. 기존의 가옥을 구입할 경우에는 집터의 점유 사실을 따로 신고하지 않아도 집을 사용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집을 헐어낸 공터에도 허가만 받으면 얼마든지 집을 지을 수 있엇고, 토지 사용에 대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즉 가옥은 개인의 소유권이 인정되었으나 집터는 네 것 내 것이 없이 공동 소유의 개념으로 함께 사용했던 것이다. (생략) 이렇게 조선인들에게 토지에 대한 소유권 개념이 없는 틈을 타서 일본인들은 가옥을 매입하고 거기에 부속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토지를 사유화했다. 처음에는 한성부가 이를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나중에는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해 주고 말았다. (생략) 일본인들은 그들만의 거류지를 형성해 가면서 조선의 당으로 일종의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고, 결국 광대한 면적의 토지를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주거문화의 가장 큰 변화는 주택이 ‘거주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벗어나 ‘재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계속되는 경성의 주택난은 주택을 하나의 ‘재원’으로 바라보게끔 했고, 팔기 위한 하나의 상품으로 주택을 공급하는 ‘집장수’들을 만들어냈다. 또한 주택을 매매하고 임대하여 이윤을 얻고자 하는 주택 임대업자들도 속속 늘어났다. (생략) 주택이 하나의 재화로 여겨지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그 집에서 살 건축주의 의뢰로 짓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팔 것을 전제로 하여 미리 집을 짓고, 그 집을 구매할 사람을 찾는 방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것은 집을 짓는 방식으로서는 그 이전과 대단히 다른 방식이었다. 이렇다 보니 주택이 ‘상품’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구매자들에게 좀더 잘 팔리도록 하기 위해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방안이 다양하게 강구되었다. 또한 대량 생산에서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누구에게나 팔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인만큼 보편적이고 표준화된 특성을 지녀야 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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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박지우.송호창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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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Nudge)」의 공저자인 하버드대 선스타인 교수의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를 읽었다. 「넛지」와 겹치는 내용이 많고, 「넛지」처럼 다소 지루한 전개가 독해의 맛을 반감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제목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있다. 굳이 구매하고 싶지 않다면, 서론과 결론만 읽어도 좋다. 다음은 결론의 일부이다. 




“동조하는 사람들은 사회에 도움이 되고,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반사회적이며 심지어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이는 사실이다. 종종 동조는 사회의 연대를 강화시키고,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연대를 위태롭게 하거나 어느 정도 집단의 평화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적어도 한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동조와 이견의 역할을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많은 경우, 대중의 뜻을 따르는 것은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설령 개인의 의견이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다르다 하더라도,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의익에 도움이 된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들은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 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이와 같은 노력은 부분적으로는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오히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이 생각났다.




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데이비드 허친스 「레밍 딜레마」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 최근 다시 이 책을 읽었는데 10년 전에 읽고 서평까지 썼다는 걸 몰랐다ㅠ.ㅠ


나랑 다른 사람과 토론하는 것은 불편하다. 그래서 나랑 같은 사람과 이야기한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하면 위험하다. 왜냐면 서로 위안, 위로, 공감이 될 수는 있어도 자극, 교환, 발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론 공멸한다. 마치 획일적으로 재배, 사육되는 농축수산물이 질병에 취약하듯...

 

<밑줄>

21세기 초반 많은 미국 회사들이 부정부패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엔론사의 파산이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월드컴, 아델피, 타이코와 같은 회사들 역시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다. 기업의 실패를 가까이서 관찰해 온 많은 사람들은 그 실패에 대한 처방으로, 기업 조직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하기보다는 진지한 토론을 장려하고 회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고위 간부들에게 거리낌 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집단을 기업 내에 두라고 충고한다. 강력한 힘을 가진 기업의 중역들이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처벌할 때, 직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조용히 상급자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의 실적에 따라 이득을 보는 주주들에게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증거자료들은 이견 제시를 하나의 의무로 간주하고 어떤 주제라도 토론할 수 있는상당히 논쟁적인 이사회를 가진 기업이 실적이 좋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건강한 기업 이사회라면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고 대다수 사람들이 가진 획일적 견해에 대한 도전을 장려해야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친구와 동료들의 화를 돋우거나 그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으려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견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효율성을 해치고, 자신의 평판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한다.

 

독재 국가는 이견을 가진 사람들을 처벌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한다. 미국을 포함한 자유로운 사회에서조차 이견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충성심이 없거나 심지어는 사회의 적으로 묘사된다. 자유로운 국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도록 허용하지만 사회적 압력은 동조를 요구하고 때때로 이런 압력은 매우 강력하다.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따돌림을 당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희생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견해를 제공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처신한다. 사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는 지극히 낙관적이다. 안데르센의 이야기에서는 어린아이가 외친 진실이 거짓을 이겼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실제 세계에는, 광범위하게 퍼진 기만은 그렇게 쉽게 물리칠 수 없다. 사실에 관한 잘못된 판단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가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불의, 억압, 집단 폭력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거의 언제나 선량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1942년 웨스트버지니아주 교육위원회는 공립사립학교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맹세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퇴학 처분을 내리고 맹세를 하지 않는 한 재입학을 불허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얼마 안 돼 대법원의 심판을 받았다. 연방대법원은 특정 신념을 말 또는 행동으로 고백하도록 시민에게 강제할 수 없다며 이 조처가 연방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다수는 동조를 낳고, 소수는 혁신을 낳는다. 이 점에서 한 사람의 이견이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언론의 자유는 사회적 영향이 개인의 행동과 신념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실수와 병리 현상을 막을 수 있는 핵심적인 보호 수단이다.

 

집단토론의 결과는 토론에 앞서 각 구성원들이 가진 견해의 평균보다 더 극단적인 견해를 취하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집단 편향성이라 부르는데, 이는 집단토론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집단편향성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집단 구성원들을 그들이 찬성하지 않는 논점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이 아닌 법에 의한 통치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법의 지배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통치는 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법을 운용하는 제도들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으며, 법은 이들의 해석에 의존한다. 모두 같은 법복을 입고 있지만, 누가, 어느 정당이 임명한 대법관인가에 따라 판결의 내용은 크게 달라진다.

 

조직이나 국가는 이견을 환영하고 개방성을 응원할 때 가장 번영할 확률이 높다. 잘 기능하는 사회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폭넓고 다양한 관점들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 선진 사회의 구성원들은 비슷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폐쇄적인 집단 혹은 같은 의견만이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집단 내에 머무르지 않는다.

 

헌법에 규정된 많은 권리 및 제도는 동조, 쏠림 현상, 그리고 집단 편향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부정적인 결과의 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그 가장 간단한 예는 표현의 자유로, 표현의 자유는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쏠림 현상이나 정당화되지 않은 극단주의를 견제한다.

 

동조하는 사람들은 사회에 도움이 되고,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반사회적이며 심지어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면에서 이는 사실이다. 종종 동조는 사회적 연대를 강화시키고,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연대를 위태롭게 하거나 어느 정도 집단의 평화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적어도 한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동조와 이견의 역할을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많은 경우, 대중의 뜻을 따르는 것은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설령 개인의 의견이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들은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 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이와 같은 노력은 부분적으로는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오히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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