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이기는 철학 -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공부법과 사고법
오가와 히토시 지음, 장인주 옮김 / 처음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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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굳이 AI를 이길 필요가 있을까? 인간의 일은 AI나 로봇에게 주고, 인간은 원래대로 놀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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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는 원래 인간은 노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토기보다 먼저 토우가 만들어진 것이고, 실용보다는 제사나 표현이 먼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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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제자도 - 한 길 가는 공동체, 브루더호프 사람들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지음, 브루더호프 공동체 엮음, 원충연 옮김 / 홍성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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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더호프(직역하자면, 형제들)는 독일에서 시작되어 영국, 미국 등으로 퍼져간 기독교 공동체이다. 이 책은 부르더호프 설립자의 아들인 하인리히의 말을 엮은 것이다. 공동체는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로 살아간다는 뜻으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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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리더십은 섬김입니다. 이것을 악용하여 힘을 행사하는 건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 리더십의 남용이 교회 공동체에 특히 악한 일입니다. 형제자매라면 자발적으로 신뢰하며 마음을 열어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입니다. 독재국가라면 사람들은 더 큰 권력에 굽힐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들의 영혼이 그 권력이 악한 것을 알고 싫어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를 신뢰하는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리더십을 악용하는 사람은 영혼의 살인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권위를 말할 때, 그 권위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게 아님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위를 주셨지만,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교회를 이끌라고 세워진 우리는 사람을 지배하는 권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쉽게 잊혀집니다. 끊임없이 겸손을 추구해야 합니다.

 

말씀의 종(목사)은 혹여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교회를 억압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모든 말씀의 종이 복음을 왜곡시키거나 바꿔치지 않고 늘 새롭게 교회에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책임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권위로 형제자매를 부하처럼 다룰 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말씀의 종이 우두머리 행세를 하면 용기가 있어야 항의하거나 특별할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용기를 갖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어느 누구도 아닌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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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 사는 이유
에버하르트 아놀드 지음, 김순현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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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더호프 공동체를 만든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책,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읽으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책, 공산주의 선언이 떠올랐다. 두 책의 공통점은 무거운 주제와 달리 무척 가볍다는 점이다. 작고 얇아서 그렇다. 둘다 함께하자는 게 주제다. 공동생산하여 공유하자는 말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은 매우 다르다. 에버하르트는 비폭력. 맑스와 엥겔스는 폭력. 누구의 말이 옳을까?

 

우리처럼 국제 평화와 사유재산 제도의 철폐와 모든 재화의 공유를 주창하는 정치 단체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단체들의 투쟁에 더 이상 가담해서는 안 되며, 그 투쟁이 그 거대 단체들의 정신에 걸맞는 것이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도 그 단체들처럼 모든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집과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노예 노동으로 인해 정신적 발전이 위축된 사람들에게 마음이 쓰이고 쏠린다. 우리도 그 단체들처럼 무산자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편들지만,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하여 정반대의 집단들에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 계급투쟁을 멀리한다.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에게 목숨을 건 사람들에 목숨을 걸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의 방어전은 물론이고 프롤레타리아의 방어전도 반대한다. 순수한 영적 싸움 속에서만 우리는 자유와 일치,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옹호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한다. 이로써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생활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다. (에버하르트 공동체로 사는 이유 )

 

성직자가 언제나 봉건파(지주)와 손을 맞잡았던 것처럼 성직자 사회주의도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을 맞잡는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사회주의의 색채를 가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도 없다. 기독교 역시 사적 소유에, 결혼에, 국가에 극구 반대하지 않았던가? 기독교는 그 대신에 자선과 구걸, 독신과 육욕 근절, 수도원 생활과 교회를 설교하지 않았던가. 기독교 사회주의는 성직자가 귀족의 분노에 봉헌하는 성수일 뿐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폭력적 전복에 의해 달성될 수 있을 뿐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족쇄 말고는 공산주의 혁명에서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맑스, 엥겔스 공산주의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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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10년의 미래 -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할 10가지 어젠다
정재영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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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소통, 결정, 미래 등의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좋은 책을 읽게 되었다. 


어느 집단이든 이견이 있게 마련이다. 그 의견의 차이를 확인하고 약속을 합의해가는 과정이 투명하고 민주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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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여전히 교회 조직의 관료제로 인해 비인격적 인간관계를 야기하고 있다. 교회조직의 관리자는 행정가로 변신하였고, 교역자들은 하나님 나라 사역의 동역자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능직 종사자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교회 내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결정권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교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은 교회 관료의 정책 결정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재정 지원은 평신도들이 제공하지만 재정의 사용은 소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사용이 결정되고 있다. 흔히 교회를 공동체로 표현하지만, 사실 소수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조직을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이에 대한 개선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155)

 

부모 세대에 비해 종교적 충성도가 낮은 젊은 세대들은 무조건 순종하기보다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이것이 교회 운영에도 반영되기를 바라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상명하복을 강조하게 되는 관료제적 대형 교회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회중 중심의 중소형 교회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에 기존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찾고 있는 청년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앞으로는 기성세대보다는 젊은 세대들의 영적인 욕구에 민감하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교회에게 성장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므로, 이들의 영적인 욕구에 대한 파악과 이해가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222)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세운 평신도 교회를 주제로 쓴 평신도 교회 이야기 : 21세기 한국교회의 비전(최승호 저, 대장간 출판사)이 출간되면서 평신도 교회라는 단어가 회자되기 시작하였다. 목회자가 없으면 절대로 교회를 구성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이러한 성경의 진리에 눈을 뜨면서 삼삼오오 모여서 교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제는 상당수의 평신도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평신도 교회의 등장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으나, 갈수록 많은 교회들이 민주적인 교회 운영, 개방적인 의사소통구조로의 전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정체성이 평신도 교회인지 아닌지를 묻기 보다는, 평신도의 참여도를 얼마나 보장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다만 평신도의 사역을 위해서는 평신도의 역량 개발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평신도들이 신학 지식, 목회 감각, 감성의 민감성 등에 대하여 높은 수준의 기독교 교양을 갖추고 있는 교회의 경우에는 평신도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는 평신도의 훈련 프로그램과 리더십의 개발을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리더십은 양적 성장보다는 사람의 요구에 민감한 리더십, 선택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제공하는 열린 리더십, 사람들의 표현과 문화적 욕구에 민감한 리더십, 여성성과 양성 평등의 원리를 이해하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 최근 교회에서 평신도들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것은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평신도의 참여도를 증진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은사개발 프로그램이나 리더십 코스가 개설되고 있는데, 이는 평신도들이 새로이 주체성을 가지도록 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프로그램은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하는 주체로서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을 편의상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기는 단순히 내적 치유나 영적인 양육 등을 통한 전인적 성숙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전체 교회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공동체를 통한 사역으로 연결되어야 바람직할 것이다. (236)

 

최근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말이 끊임없이 들리고 있다. 젊은이들은 한 사회 안에서 언제나 기성세대에 도전하며 새로운 사회의 변화를 가장 첨단에서 수용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말은 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미래 사회를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본질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항상 역사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한스 큉의 말대로, 교회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대에게 설득력이 있는 모습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고 시대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조직은 보다 탄력 있고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조화될 필요가 있고, 교회 구성원은 보다 주체성을 가지고 각자의 전문성에 따라 다양한 영역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는 교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여 의사 결정을 하고 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적실성을 갖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가정교회, 평신도교회, 사이버교회 등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예배 처소도 변하고 있어, 전통적인 형태의 교회당이 아닌 학교나 시민 단체 강당뿐만 아니라 카페, 레스토랑, 심지어는 클럽이나 공연장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기존의 관점으로 본다면 교회가 변질되고 왜곡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저 교회가 새로운 형태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젊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새로운 교회 운동은 일종의 한국형 이머징 처치로 봐도 좋은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고, 이러한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도 없다. 교회가 오늘날의 상황에 적실한 모습으로 적응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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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이해 현대사상의 모험 8
마샬 맥루한 지음, 김성기 & 이한우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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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안 읽어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어디서든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도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왜냐면 너무 장황하고 어려워서.


언어, 인쇄, 만화, 사진, 신문, 광고, 게임, 전신, 타자기, 전화, 축음기,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뿐만이 아니라 도로, , 의복, 주택, , 시계, 바퀴, 자전거, 비행기, 자동차, 무기, 자동화까지 미디어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게다가 1960년대 미국사회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마셜 맥루언의 불친절한, 현학의 바다에서 장시간 표류하다 보면 가끔 눈이 번쩍 뜨이는 섬을 발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표음문자가 서양인의 삶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 하는 대목이다, 다소 서구우월주의가 느껴지긴 하지만. 언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라면, 그 미디어인 언어가 표음문자여서 그렇지 않은 동양(중국)보다 서양이 우월하다는. 그래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말. 

 

<밑줄>

러시아에서 바스크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페루에 이르기까지 서구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알파벳들은 모두 그리스-로마 문자에서 나온 것이다. 그 문자의 형태와 음성이 의미상의 말의 내용과 분리되는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이 알파벳들은 문화들간의 번역과 동질화를 위한 가장 철저한 기술이 되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문자들은 단지 하나의 문화에만 봉사해 그 문화를 다른 문화들과 분리하는 데 기여해 왔다. 비록 조잡하기는 해도 표음적인 문자들만이 그 어떤 언어의 소리든지간에 하나의 동일한 시각적 부호로 번역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중국어를 서구의 표음 문자들을 사용해 표기해 보려고 하고 있는데, 광범위한 성조 변화와 동음이의어 같은 특수한 문제에 봉착했다. 이리하여 중국어의 단음 어절을 세분화해 다음절어로 변형시켜 음성상의 애매함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의 표음 알파벳이 이제 중국어와 중국 문화의 청각 중심적인 특징을 변화시키고 있다. 중국이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서구의 노동과 조직에 통일의 중심과 일양적인 선형적이고 시각적인 패턴들을 자국 내에서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다른 한편 우리 서구 문화권의 사람들을 쿠텐베르크 시대를 벗어남에 따라 점차 우리 문화가 가진 동질성, 일양성, 연속성 등과 같은 특징을 식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는 비문자적인 야만인들을 누를 수 있었는데, 야만인이나 부족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문화적 다원주의, 특이성, 불연속성 등을 자신의 특색으로 삼고 있다.


요약하자면 바빌로니아, 마야, 중국 등과 같은 문화에서 사용된 그림 문자나 상형 문자는 인간의 경험을 축적하고 그 경험에 접근할 수 있게끔 시각을 확장한 것이다. 이 모든 형태의 문자들은 구어상의 의미에 그림으로 된 표현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만화 영화와 비슷하고 극도로 다루기 힘들다. 왜냐하면 사회 활동의 무한한 자료와 활동을 지시하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기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표음 알파벳은 적은 수의 문자만으로 모든 언어들을 다 포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 기호와 소리가 의미론적, 극적 의미로부터 분리된다. 이런 일은 그 밖의 다른 문자 체계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또 표음 알파벳에 고유한, 시각과 소리와 의미의 분리는 확장되어 사회적, 심리적 결과들을 낳게 되었다. 문자 문화의 인간은 상상 생활, 정서 생활, 감각 생활이 상당히 분리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 점은 루소가 오래전에 천명한 바 있다. 오늘날에는 로렌스를 언급하기만 해도, 인간의 <전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문자 문화인을 넘어서려는 20세기의 각종 시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서구의 문자 문화인들이 자신의 알파벳을 사용하는 것과 자신의 내적 감수성이 크게 분리되어 있는 것을 경험한다면, 그들은 자신을 씨족이나 가족으로부터 분리해내는 개인적 자유도 획득될 것이다. 개인의 일생을 형성하는 이런 자유는 군사 생활이 지배하던 고대 세계에서도 드러난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에서처럼 공화제 아래의 로마에서는 재능에 따라 인생이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었다. 당시 새로운 문자 문화는 동질적이고 유연한 환경을 창출해 냈고, 그 속에서 군인들이나 야심을 가진 개인들의 이동 가능성은 새로울 뿐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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