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
톰 웨이크퍼드 지음, 전방욱 옮김 / 해나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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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매주 목요일 서울 중계동 은행사거리에서 집회가 열립니다. 한 고등학교의 내부 비리를 고발한 교사를 징계한 사건에 항의하는 집회입니다. 의로운 일을 하다가 어려움에 놓인 사람을 돕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목요집회를 성수(?)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나무들은 햇빛을 받기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키를 키우고 잎을 늘립니다. 그러나 땅 밑에선 뿌리들끼리 서로 협력하면서 양분을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잎들의 경쟁으로 작은 나무는 죽어가지만 뿌리들의 협력으로 살려내죠.

 

의로운 사람이 외롭지 않도록 집회에 참여하는 건 우리 사회라는 나무의 뿌리 역할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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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오레곤 주립대학의 균류학자 수전 시머드가 이끄는 연구진은 실제 숲 생태계에서 일련의 야외실험을 하였다. 균근을 통한 나무 사이의 자원 전달을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진은 특정 종의 균류로 이루어진 균근이 동일 종의 나무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의 나무들까지 서로 연결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자작나무와 전나무를 연결시켜주는 네트워크를 관찰한 결과 이 나무들이 열 종류의 균류 공생체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놀랍게도 햇볕을 받은 자작나무는 균근의 연결 네트워크를 통해서 그늘진 곳의 전나무에 당을 공급하는 것 같았다. 시머드의 연구진은 이 숲의 그물망을 탐험하면서 역동적인 지하 상호 의존성의 새로운 원리를 발견했다. 빛을 찾으려고 애쓰는 어린 묘목이 대부분을 이루는 그늘진 곳의 식물들은 숲의 지붕 꼭대기에서 햇빛을 받고 있는 식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하에서는 재분배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사물은 종 내에서 그리고 종 사이에서 분배된다. 없는 자는 받을 것이며, 많은 자는 앗길 것이다. (톰 웨이크퍼드 -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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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와 혁명가 - 영성의 두 갈래 길
이도영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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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적 영성과 혁명가적 영성의 조화를 꿈꾸는 책입니다. 다만 전체 300여쪽 가운데 성자 쪽에 200여쪽을 쓰다보니 다소 아쉽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혁명가 쪽은 저자의 전작인 페어 처치를 읽어서 보충하면 될 듯합니다.

 

성자 쪽은 다른 목회자의 글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으니, 혁명가 쪽에 대해서 살피자면 세월호, 미투, 장애, 난민 등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목회자의 솔직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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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가장 빨리 죽어간 사람들은 개인주의자들이다. 반면에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한 사람들은 정치범들이다.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나치의 정체를 꿰뚫을 수 있는 비판의식깨어 있는 의식이 있었고, 그들은 저항을 위해 조직적 연대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끝까지 잘 살아남았고 유일하게 저항하는 세력이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저항자)답게 저항하려 하는가저항을 위해 진정한 공동체를 세우고 조직적 연대를 추구하는가? 혁명가적 영성을 갖추고 있는가?

 

교회는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세력 중 하나다. 하지만 교회야말로 페미니즘이 필요한 곳이다. 교회야말로 여성 차별이 가장 극심하게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교회는 순종적인 마리아와 반역적인 하와라는 이미지를 통해 여성성을 규정해왔다. 이것이야말로 여성 혐오의 전형이다. 교회는 남녀가 존재는 평등하나 기능에는 차별이 있다는 거짓 논리를 주장하며 성경에 나와 있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적용해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교단에서 여자는 장로와 목사가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런 교단들이 있다. 권사들은 교회의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중직을 맡을 수 없었고 목사들의 행사 때면 한복입고 동원되는 몸종이었다. 기독교에서 여자는 남자로 하여금 원죄를 짓게 만든 요물이다. 여성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감정적이며 죄에 무력한 문제 덩어리다.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에서 나온 부차적 존재이고 결핍된 존재이며 종속적 존재다. 남성은 여성의 머리다. 여성은 남성에게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며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여성은 항상적으로 자기 비하의 상태에 빠져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은 그런 여성들에게 교만으로서의 죄를 깨달으라고 강제했다.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보면 교만으로서의 죄는 가부장제 아래에 있는 남성 신학자들과 국가 종교에 의해 강조된 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교회는 가부장제를 거부하고 변혁하려는 여성에게 교만의 죄를 적용하여 순종을 강요해왔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자기 비하로서의 죄가 더 중요하다. 그들은 더 낮아질 필요가 없었다.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여성은 높아지려는 죄가 아니라 낮아지려는 죄와 싸워야 한다. 그들을 항상적으로 낮아지게 만드는 불의한 체제의 악을 깨닫고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악과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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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 - 한국교회, 공교회성과 공동체서 그리고 공공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망한다
이도영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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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는 멈춤이다 - ‘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를 읽고

 

페어 처치’, ‘성자와 혁명가의 저자인 이도영 더불어숲동산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책들만 따로 읽어도 좋은 독서경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많은 책들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즉 독서를 위한 독서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특히 월터 브루그만의 안식일이 저항이다’, 앤디 스턴의 노동의 미래와 기본소득’,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샘 피지개티의 최고임금’, 크로포트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 린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코로나를 주님의 계시로 이해했습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신께서 멈춤이라는 계시를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 길을 계속 걸으려고 한다. 따라서 이 멈춤을 통해 바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공교회성, 공동체성, 공공성의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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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공평과 정의를 회복하지 않으면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는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이 예배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명백한 말씀을 외면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이후까지 내다보는 예언자적 상상력의 부재를 목도하는 것 같았다. 본질을 회복함 없이 단지 주일 공예배를 회복한다고 해서 코로나 19 이후 시대의 교회가 그 이전과 뭐가 달라질까?

 

신약에서 말하는 주일성수는 율법이 아니다. 로마서가 말한 것처럼 각자 믿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공동체적 약속이고 신앙의 훈련이며 감사의 축제다. 주일성수와 공예배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 공동체적 결정에 따라 다른 날에 예배를 드리거나 다른 형태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초기 교회는 핍박을 피해 지하 묘지 공간인 카타곰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고 재난이 닥칠 때는 예배를 폐하거나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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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경제학 - 맨큐의 경제학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스티븐 A. 마글린 지음, 윤태경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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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데 어렵다

 

좋은 주제를 다루었으나 읽기 어렵다. 옮긴이 후기를 먼저 읽고 본문은 천천히 공부해 가며 읽으면 좋을 것 같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자기 조정 시장을 전 지구적 규모로 실현하면 모든 나라가 자유 무역으로 번영할 수 있기에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이어지리라 믿었다. 이런 믿음은 세계 대전을 계기로 종교적 광신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모든 경제 활동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맹신은 한동안 모든 나라에서 거부됐다가 이후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라는 형태로 부활했다. 경제 활동을 조직하려면 정부의 산업 정책이 필요할 때도 있고, 여러 가지 규제가 필요할 때도 있으며 노사정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할 때도 있는데,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시장 외의 방법으로 경제 활동을 조직한다는 생각이 이단시됐다. 그 결과 선진국에서는 제조업 공동화, 양극화 공동체 의식 붕괴 등 여러 문제가 나타났다.

이로 인한 문제의식의 고조로 20119, 미국에서 월가 점령 시위가 벌어졌다. 그해 11월 초에는 하버드 점령 시위의 일환으로 맨큐 교수의 경제학 원론 수업을 듣던 하버드대 학생들이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하버드대에서 이단아처럼 홀로 주류 경제학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대안을 촉구하는 강의를 해 온 스티븐 마글린 교수는 2011127, 학생들의 요청으로 맨큐의 경제학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공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의 핵심 내용과 메시지는 이 책 공동체 경제학에 자세히 나온다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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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는 아소시아시옹(associantion, 단체)과 다르다. 양자의 근본 차이는 정체성과 헌신에 있다. 양자의 근본 차이는 정체성과 헌신에 있다. 아소시아시옹도 사회적 접착제로서의 그능을 수행하지만, 구성원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 그리고 구성원의 헌신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향우회, 스포츠 동아리, 포커 클럽에 들어가는 선택이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임은 손쉽게 탈퇴할 수 있기 때문이다.내가 가입한 모임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내가 동의하지 않는 활동을 하면 나는 굳이 다툴 필요 없이 말없이 떠날 권리가 있다. 아소이사이옹은 구성원을 떠나게 하는 원심력에 대항해 구성원을 붙잡아 둘 구심력이 약하다.

반대로 공동체는 구성원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공동체는 구성원의 정체성을 영구히 확정하지도 않고, 구성원을 강압적으로 구속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스포츠 동호회에서 탈퇴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공동체를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아미시 공동체를 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축복의 세계를 살기 위해 상품의 세계를 포기할 준비가 된 상태는 아닐지 몰라도 아미시가 축복으로 여기는 것을 상품화할 때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미시 공동체는 시장이 공동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공동체에 종속된 채 세상을 살아가고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음을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을 다 포함하여 보여준다.

 

경제학자는 계산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을 마치못해 또는 기꺼이 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적어도 경제학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주장하면서 효율에 집착한다. 경제학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목표를 효율이라는 관점으로 비교할 수 있게 측정하는 준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때 수단은 시장이다.

 

케네스 볼딩은 경제 환경의 변화를 카우보이경제와 우주선경제로 구분하여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환경 친화적 경제 정책 수립을 주장했다. ‘카우보이 경제란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환경처럼 자원이 사실상 무한정하고 오염 물질을 무제한으로 버려도 괜찮은 개방계를 말한다. ‘카우보이 경제란 우주선을 타고 장기 이동하는 우주 비행사처럼 소비할 자원이 제한적이고 오염 물질을 버려서는 안 되는 조건이기에 자원을 재활용하고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만 써야 하는 폐쇄계를 말한다.

 

21세기 서구인들이 노동에서 해방되리라는 케인스의 예측은 왜 이렇게 형편없이 빗나갔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진행된 소득 분배의 악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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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반대한다 - 우리는 왜 이기는 일에 삶을 낭비하는가
알피 콘 지음, 이영노 옮김 / 민들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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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서 협력으로 - ‘경쟁에 반대한다를 읽고

 

우리 사회의 경우 구제 금융 사태 이후 성적 상위 1%만 교대나 사범대에 진학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서 모범생 출신의 교사들이 학교를 채우게 되었다. 학생시절부터 경쟁이 몸에 밴 교사들은 동료교사들과도 경쟁관계를 맺는다. 좋은 교육 자료를 공유하기 보다 혼자만 알고 있다가 연구수업 때 자신의 탁월함을 과시하는 용도로 활용한다. 교사들의 경쟁 심리는 아이들에게 전염된다.”

 

현병호 민들레 출판사 대표가 이 책을 펴내면서 앞에 붙인 글이다. 공감한다. 내가 사범대학교에 진학할 때는 국어교육과가 국어국문과보다 소위 커트라인이 낮았다. 그 덕분에 나처럼 상대적으로 공부를 못하고, 모범적이지 않은 학생이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요즘 교사들은 참 똑똑하고 모범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협력을 하지 않는다. 물론 비정규직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노조에도 가입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협력하지 않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아이들이 크면 어쩔 수 없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므로 어렸을 때부터 경쟁을 가르치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 불리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들이 두가지 노력을 동시에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아이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맞닥뜨릴 일을 준비시키는 동시에, 그 일들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목표를 후자에만 집중한다면 단기적으로는 아이들의 삶이 어려워질지 모른다. 그러나 전자에만 집중한다면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겪었던 해로운 제도 속에서 서로를 불신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의 문제를 떠나서, 이미 아이들은 경쟁에 익숙하다. 타인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경험이 꼭 필요할지는 몰라도, 우리 아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그것을 경험한다. 만약 유치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경쟁이 전혀 없는 곳에서 생활했던 아이가 있다 해도,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간 후에 그곳의 환경이 너무 경쟁적이어서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학교가 아니더라도 경쟁을 가르치는 곳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이미 승패의 구조에 너무나 익숙하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경쟁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핵심인 경쟁에 대한 좀 더 넓은 안목과 협력적인 제도에 대한 경험이다

 

저자 알피 콘은 협력학습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나도 그런 마음에서 자식들을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경쟁이 거의 없는 대안학교에 보내고 있다. 아이들이 스마트폰으로 게임 안 하는 것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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