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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와 혁명가 - 영성의 두 갈래 길
이도영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12월
평점 :
성자적 영성과 혁명가적 영성의 조화를 꿈꾸는 책입니다. 다만 전체 300여쪽 가운데 성자 쪽에 200여쪽을 쓰다보니 다소 아쉽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혁명가 쪽은 저자의 전작인 ‘페어 처치’를 읽어서 보충하면 될 듯합니다.
성자 쪽은 다른 목회자의 글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으니, 혁명가 쪽에 대해서 살피자면 ‘세월호, 미투, 장애, 난민 등’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목회자의 솔직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밑줄>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장 빨리 죽어간 사람들은 ‘개인주의자’들이다. 반면에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한 사람들은 정치범들이다.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나치의 정체를 꿰뚫을 수 있는 ‘비판의식’과 ‘깨어 있는 의식’이 있었고, 그들은 저항을 위해 ‘조직적 연대’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끝까지 잘 살아남았고 유일하게 저항하는 세력이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저항자)답게 저항하려 하는가? 저항을 위해 진정한 공동체를 세우고 조직적 연대를 추구하는가? 혁명가적 영성을 갖추고 있는가?
교회는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세력 중 하나다. 하지만 교회야말로 페미니즘이 필요한 곳이다. 교회야말로 여성 차별이 가장 극심하게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교회는 순종적인 마리아와 반역적인 하와라는 이미지를 통해 여성성을 규정해왔다. 이것이야말로 여성 혐오의 전형이다. 교회는 남녀가 존재는 평등하나 기능에는 차별이 있다는 거짓 논리를 주장하며 성경에 나와 있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적용해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교단에서 여자는 장로와 목사가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런 교단들이 있다. 권사들은 교회의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중직을 맡을 수 없었고 목사들의 행사 때면 한복입고 동원되는 몸종이었다. 기독교에서 여자는 남자로 하여금 원죄를 짓게 만든 요물이다. 여성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감정적이며 죄에 무력한 문제 덩어리다.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에서 나온 부차적 존재이고 결핍된 존재이며 종속적 존재다. 남성은 여성의 머리다. 여성은 남성에게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며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여성은 항상적으로 자기 비하의 상태에 빠져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은 그런 여성들에게 ‘교만으로서의 죄’를 깨달으라고 강제했다.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보면 ‘교만으로서의 죄’는 가부장제 아래에 있는 남성 신학자들과 국가 종교에 의해 강조된 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교회는 가부장제를 거부하고 변혁하려는 여성에게 ‘교만의 죄’를 적용하여 ‘순종’을 강요해왔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자기 비하로서의 죄’가 더 중요하다. 그들은 더 낮아질 필요가 없었다.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여성은 높아지려는 죄가 아니라 낮아지려는 죄와 싸워야 한다. 그들을 항상적으로 낮아지게 만드는 불의한 체제의 악을 깨닫고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악과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