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탄생 -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
최경봉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목숨을 바치며 우리말 사전을 만들었던 일, 주시경과 같이 잘 알려진 국어학자 이외에 월북으로 이름이 감추어진 이극로와 같은 이들에 대해 알 수 있다. 여기에 이승만 때문에 한글쓰기가 모아쓰기에서 풀어쓰기로 바뀔 뻔했던 에피소드는 덤이다.

 

<밑줄>

훈민정음은 음소문자로 창안되었지만 실제 쓰임에서는 음절문자식으로 쓰였다 ...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 중 하나가 한자음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었고, 한자음을 기록하면서 음절문자식으로 훈민정음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근대 들어 서구 문화의 유입과 함께, 영어의 서사 규범을 따라 한글의 서사 규범을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풀어쓰기가 논의되었다. ‘세로쓰기가로쓰기로 바꾸고, ‘띄어쓰기를 도입한 것은 모두 영어의 서사 규범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은 풀어쓰기였다. 영어의 알파벳처럼 풀어쓰기를 하는 것이 음소문자로서 한글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주시경은 풀어쓰기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시범적으로 사용하였고, 김두봉, 최현배 등 주시경의 제자들은 이를 실제 언어규범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음절문자식으로 모아쓰는 전통을 일순간에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형태주의 표기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음소주의 표기법을 선택할 것인가의 논쟁은 음소문자인 한글을 음절문자로 모아쓰게된 이후로 생긴 논쟁이었다. 그렇다면 이 논쟁은 훈민정음 창제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글 맞춤범은 표준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라는 맞춤법 총칙 제1항은 한글 맞춤법의 운용이 음소주의 표기와 형태주의 표기라는 서로 상반된 원칙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는 우리말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한글로 된 성경을 접하게 된 기독교 계열 지식인들은 한자가 없는 문화 생활의 가능성을 확신하였고, 이들에 의해 한글로 된 다양한 출판물이 나오면서 한글 문화의 지평은 더욱 넓어졌다. 한글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철자법 정리의 필요성이 절실해지자, 결국 이들 중에 우리말 정리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서재필과 주시경이었다.

 

오늘날의 한국어가 신라어를 근간으로 형성되었다고 본 남한 국어학자 이기문의 가설을 민족 분열주의자의 반동적 견해로 보는 것에서도 북한 국어학계가 민족어의 기원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북한 국어학계의 특성은 조선어학회의 민족주의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북으로 건너간 조선어학회 사람들은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인 견지에서 북한 국어학의 기반을 닦았다. 여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극로, 김두봉, 정열모, 유열 등이 대종교의 중요 인사였다는 사실은 분단 이후 북한 국어학의 연구 경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 국어학이 전통적인 언어학 연구와 함께 사전 편찬이나 말다듬기를 비롯한 문화어 운동 등에 집중하면서 보였던 민족주의적 경향은 남한 국어학계에서 나타난 민족주의적 경향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다. 그 공통점 역시 조선어학회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1953년 정부는 현행 철자법을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철자법 개정 방침을 천명하였는데 이는 형태 중심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는 대립되는 소리 위주의 표기법으로 개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1930년대 조선어학회가 치열한 논쟁 끝에 확정한 철자법이 그 당시 논쟁 상대의 철자법 안으로 뒤바뀔 처지까지 몰린 것이다. 교육계와 문화계의 저항이 심했지만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해 이를 강행할 뜻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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