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편지 창비청소년시선 5
복효근 지음 / 창비교육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이지만 부끄럽게도 복효근 시인을 잘 몰랐다. 더 부끄럽게도 그 시인을 알게 된 건 시집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업 중에 풀어주는 입시문제집을 통해서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결국은 다른 그의 시집을 사게 만든 운동장 편지

알고 보니 그는 시골의 어느 작은 중학교 국어선생님이시다. 위성사진으로 그 학교를 찾아보니 주변에 산과 논과 밭이 있고 가까이에 지리산이 있는 곳이다. 이런 환경이 있으니 좋은 시가 나올 수밖에.

입시에서 벗어난 중학교, 도시에서 벗어난 시골, 이런 곳에서 중학생들의 마음을 잘 읽어낸 청소년 시들이 무럭무럭 자랐나 보다.

성적 호기심이 극에 다다른 중2 남학생이 좋아할 만한 시도 곳곳에 보이고, 짝사랑의 순정을 노래하는 시도 알맞게 보인다.

수업 중에 복효근의 시를 마음의 복근을 단련한 시라고 소개했다.

 

<밑줄>

교정에 흩날리는 노란 은행잎 / 빨간 신나무 잎 / 회갈색 목련 잎 // 선생님이 일러 주신 대로 / 국어책 사이사이에 끼워 놓았습니다 / 일주일이 지나 // 편편하게 잘 마른 나무잎에 / 우리는 간절한 단어를 썼습니다. 색색 싸인펜으로 / 할머니, 사랑, 추억, 친구 / 그리고 잊지 못할 세월호를 적었습니다 // 너른 목련 잎에 나는 / 내가 쓴 시를 적었습니다 / 떠나간 친구를 떠올리며 // 눈물이 글씨 위로 툭 떨어져 번졌습니다 / 아름다워서 슬픈 / 가슴이 먹먹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을 국어 수업)

 

정석 수학 학원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 버터플라이 영어 학원에서 내려오면 /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언제나 그 시간 그 자리 / 아버지는 서 계십니다 / 10분 동안 아버지의 차 안에 앉아 / 아버지가 사 오신 김치김밥 한 줄을 먹습니다 / 보온병에 준비해 오신 따뜻한 차를 마셔도 / 오늘도 가슴 벅찬 사랑에 목이 멥니다 / 이 사랑이 숨 막힙니다 / “다 널 위해서야, 나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 압니다. 그래서 / 날 위해서 하시는 희생인데 / 그 희생의 기쁨과 자부심을 마음껏 느끼시라고 / 아버지 존재의 이유를 마음껏 실감하시라고 / 나는 최선을 다하여 내 자리를 지킵니다 / 서로의 눈에 눈을 못 맞추고 / 창밖의 흐르는 불빛에 눈길을 주며 / 김밥을 먹습니다 / 출구도 보이지 않고 퇴로도 차단된 숨 막히는 사랑을 / 먹습니다. 안으로 흘리는 짜디짠 눈물과 함께 / 채 씹히지 않은 단무지를 삼킵니다 (K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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