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인 책들 - 왕상한 교수, 내 인생의 책을 말하다
왕상한 지음 / 은행나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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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한 교수의 책을 읽으면 김두식 교수가 떠오른다. 둘다 명문 법대 출신의 교수이고, 형제자매들 역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얄밉게도(?) 글까지 잘 쓴다ㅋㅋ

 

결정적인 책들은 이런 저런 책들에 대한 서명이지만, 그 서평보다는 작가의 학창시절과 가족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크다.

 

<밑줄>

대학에 와서까지 옆에 앉은 친구가 행여 노트를 훔쳐볼까 가려가며 필기하는 그 모습에 성적벌레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또 그런 벌레 짓을 하게 만든 전두환 정권의 허울 좋은 정책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를 쓰고 들어온 대학이니만큼 상대평가제로 탈락되지 않도록 더 심한 성적 벌레가 되어야 했으니까.

 

돌이켜보면 서울대 법대를 택한 건 내 일생에 있어 가장 큰 실수였다. 지금도 불철주야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 또는 자녀를 서울대에 보내기 위해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에게는 이건 또 무슨 재수 없는 소리인가 싶을 테지만 이것은 나의 솔직한 고백이고, 또 사실이다. 고집과 오만, 편견과 경직된 사고방식. 대학교에 들어간 직후 어느 선배가 서울대 법대를 다니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라고 들려준 말이다.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들 중 대다수가 지방대 출신이라는 것이 우리들 기준으로 보면 더욱 놀라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에선 일단 지방대를 가면 죄인이 된다. 첫 번째, 입학하면서 부모에게 죄인이 되고, 두번 째, 입사 시험을 치르면서 스스로에게 죄인이 된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것을 핸디캡으로 알고 시작하는 대학 생활과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 있다는 포부를 가지고 시작하는 대학 생활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또래 친구나 선생님들과의 소통보다는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모르는 문제는 외웠고 아는 문제는 다른 문제와 결부시켜 집요하게 묶어 놓았다. 처음에는 변한 내 모습을 반가워하시던 어머니도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공부했던 나는 면역력이 떨어져 각종 알레르기를 일으켰고, 장시간 책상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내 엉덩이는 종기가 나을 날이 없었다. 하지만 고름이 터진 상처를 가지고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거의 중독에 가깝게 공부하던 나는 아이들과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같이 뛰어놀던 아이들에게는 배신자로 비쳐졌으며,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은 나를 더욱 더 철저히 고립시켰다. 나는 학교에서 필요한 말 외에는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어린 마음에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다고, 나를 밟고 앞서가는 사람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무언가 크게 놓치면서, 많이 떨어뜨리면서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크게 문제된 것이 앞서 말한 건강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경기의원이라는 개인병원이 있었다. 학교와 집만 반복하던 나에게 새로운 코스가 하나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병원이었다. 각종 비염과 알레르기, 어지러움을 호소하던 나는 이 병원의 최대 단골이었다. 담당 의사였던 황훈 선생님은 나에게 진찰과 약만 처방해 주시는 의사가 아니었다. 병원 의자에 앉아서도 단어장을 놓지 않는 나를 보며 늘 걱정하셨다. 몸이 약해지는 것은 몸에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 때문이라고, 이런 속도로 공부를 하다 보면 같은 속도로 몸도 망가지게 될 거라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황훈 선생님의 눈빛에 나도 조금씩 내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도 아닌 동네 병원 의사 선생님에게 말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특성을 얼마나 영위하고 있는가? 외롭고 힘들다는 것은 상대에게 내가 약해져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은 정글의 감정을 우리는 늘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힘들다고, 외롭다고 말하는 순간 상대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내 목에서 뛰는 동맥을 향해 돌진해 올 거라는 불안을 지니게끔 사회는 수천 년 동안 경쟁을 조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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