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지음 / 민음사 / 198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김수영의 작품은 비슷한 시대를 살다간 시인 신동엽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공통점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정의롭지 않은 현실을 바꾸려하는 의지일 것이다. 그런데 차이점은 신동엽은 비교적 서정적이라면 김수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을 이해하고 감상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김수영은 버스에 치여서 48세의 나이에 안타깝게 죽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의혹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왜냐면 이승만, 박정희에게 그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김수영도 김지하처럼 오래 살았다면 어떻게 변절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김수영의 작품은 1960년 한해에 남긴 게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뛰어나다. 그 이유를 살피면 아마도 김수영은 겁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불의한 현실에 저항할 용기가 없었던 그에게 1960426일 이승만이 하야를 선언한 그날부터 봇물 터지듯 시를 썼다. 이듬해 516일 박정희 집권까지 1년여 간은 평생 가장 행복했던 한 때였을 것이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동회란 동회에서 시청이란 시청에서

회사란 회사에서

××단체에서 ○○협회에서

하물며는 술집에서 음식점에서 양화점에서

무역상에서 개솔린 스탠드에서

책방에서 학교에서 전국의 초등학교란 초등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이었느니

썩은놈의 사진이었으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너도 나도 누나도 언니도 어머니도

철수도 용식이도 미스터 강도 류중사도

강중령도 그놈의 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무서워서 편리해서 살기 위해서

빨갱이라고 할까보아 무서워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편리해서

가련한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신주처럼 모셔놓던 의젓한 얼굴의

그놈의 속을 창자밑까지도 다 알고는 있었으나

타성같이 습관같이

그저그저 걸어만 두었던

흉악한 그놈의 사진을

오늘은 서슴지않고 떼어놓아야 할 날이다

 

밑씻개로 하자

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

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로도 하자

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다

아무도 붙들어갈 사람은 없다

 

군대란 군대에서 장학사의 집에서

관공리의 집에서 경찰의 집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군대의 위병실에서 사단장실에서 정훈감실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교육가들의 사무실에서

4.19후의 경찰서에서 파출소에서

민중의 벗인 파출소에서

협잡을 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는

공관리의 집에서

역이란 역에서

아아 그놈의 사진을 떼어 없애야 한다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영숙아 기환아 천석아 준이야 만용아

프레지던트 김 미스 리

정순이 박군 정식이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띠우면서

극악무도한 소름이 더덕더덕 끼치는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김수영 -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1960.4.26)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어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1960.6.15)

 

 

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같기도 한 것이니

 

이유는 없다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과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

사월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잿님이 할아버지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린 다음에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일년 열두달 쉬는 법이 없는

걸찍한 강변밭같기도 할 것이니

 

지금 참외와 수박을

지나치게 풍년이 들어

오이, 호박의 손자며느리값도 안되게

헐값으로 넘겨버려 울화가 치받쳐서

고요해진 명수할버이의

잿물거리는 눈이

비둘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동안에

나쁜 말은 안하니

가다오 가다오

 

지금 명수할버이가 멍석 위에 넘어져 자고 있는 동안에

가다오 가다오

명수할버이

잿님이할아버지

경복이할아버지

두붓집할아버지는

너희들이 피지도를 침략당시에는

그의 아버지들은 아직 젖도 떨어지기 전이었다니까

명수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잿님이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두붓집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가다오 가다오

 

선잠이 들어서

그가 모르는 동안에

조용히 가다오 나가다오

서푼어치 값도 안되는 미소인은

초콜렛, 커피, 페치코오트, 군복, 수류탄

따발총....을 가지고

적막이 오듯이

적막이 오듯이

소리없이 가다오 나가다오

다녀오는 사람처럼 아주 가다오!

(김수영 가다오 나가다오 1960.8.4)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김수영 - 김일성 만세 1960.10.6.)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이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 1960.10.30.)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 번씩 세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십사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196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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