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1 - 양장본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새벽 어스름이 스러져 가고 있는 한겨울 들판을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로 시작해, “세상을 떠난 큰 누나 같기도 했던 그 여자의 수심 깊은 얼굴이 어른거렸다로 끝난다

 

광복 후 남한이 배경. 미군에 의해 친일파가 그대로 정권을 잡은 상황.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감시와 고문을 수시로 당하는 서울 법대 고학생 유일민. 고향에 두고온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친일 재력 정치인 강기수가 운영하는 남천장학사 장학생이다.

 

혜택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집안을 통해 자연스럽게 여론조성을 해가며 선거구를 장악하고, 쓸 만한 법대생을 엮어 자신의 울타리를 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삼성이 법조인들을 삼성장학생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왜놈들 편에서 앞잽이 노릇을 했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이 대략 160만 명쯤 되었다. 그놈들은 당연히 법에 따라 처벌을 했어야 했는데 미군정에서 과거를 불문한다면서 그놈들을 다시 써먹었지.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고등계 형사 출신 놈들이 다시 경찰 노릇하고, 총독부 관리질 해먹었던 놈들이 다시 공무원 노릇을 해먹는 꼴이 된거야. 더 기막힌 건 말야, 왜놈들이 비워놓고 간 높은 자리에 그런 놈들이 승진까지 되는 판이었지. 미군정은 자기들 뜻대로 남쪽을 지배하기 위해 앞잽이들이 필요했던 것이고, 꼼짝없이 감옥살이를 할 줄 알았던 그놈들은 자기들의 구세주인 미군정에 충성을 다 바치고, 아주 궁합이 잘 맞았던 거야. 그러나 그런 부당한 처사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과 반발이 격렬해, 48815일 대한민국을 수립하자마자 97일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키게 되었지. 그리고 492월부터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면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문필가 이광수, 최남선, 고등계 형사 노덕술 같은 자들이 속속 체포되기 시작했지. 그러나 위기를 느낀 왜경 출신 경찰 간부들이 주동해서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만행이 벌어졌어. 이승만 정권은 그 엄청난 폭거를 묵인했고, 결국 반민특위는 498월 말로 해산되고 말았지. 그 뒤로는 친일파들은 모든 분야에서 멋대로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이 나라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천국이 되어버린거야. 국가의 3대 기구인 입법, 사법, 행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 예술계 그리고 사업가들까지, 실권은 모두 그놈들이 장악했지. 그래서 제놈들 입장을 변호하고 반감을 없앨 목적으로 그런 시조까지 교과서에 실리는 음모를 꾸민거야. 너희 국어선생이 대답을 피한 것도 비겁하긴 하지만 딱하기도 하지. 교장부터가 친일파일 거고, 친일파를 매도하는 교육을 했다는 게 상부에 알려지면 공립학교 선생 목숨은 하루아침이야. 그리고 친일파들이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존재가 누구겠냐? 도둑놈들이 경찰 싫어하듯 독립운동가나 그 집안 아니겠어? 6.25 직전까지 독립운동했다면 취직이 안 되던 게 이 나라였다. 지금도 천대받고 괄시 당하기는 마찬가지고

 

유일민의 동생 유일표가 교과서에 친일파 최남선의 시조가 실린 것을 두고 대학생 형의 친구에게 묻자 답한 것이다. 요즘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고, 자기네 60년을 더해 소위 건국 70년을 기념한답시고 교과서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현상이다.

 

나는 오늘 무엇이었는가. 방관자였는가, 구경꾼이었는가, 훼방꾼이었는가. 방관자는 비겁자다, 다같이 궐기하자고 하지 않았는가. 방관자가 비겁자인 것은 틀림없는데, 훼방꾼이었던 나는 뭔가. 방관자보다도 더 나쁜 존재. 비겁자도 못 되는 나는 무엇인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시위의 행렬에 끼지 못하는 유일민의 자책. 그는 아버지의 월북, 가족의 가난, 심지어 가족의 원수와도 같은 이에게 장학금을 받고 있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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