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근원수필 - 우리 문화예술론의 선구자들 근원 김용준 전집 1
김용준 지음 / 열화당 / 200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에게 해만은 끼치지 않을 테니 나를 자유스럽게 해달라"

 

근원이 남긴 수필집의 발문에서 내가 밑줄을 친 구절이다. 그는 진정 예술을 사랑한 문인, 화가였다. 1904년 태어나 1950년 월북하여 1967년 64세로 사망한 그는, 여러모로 이태준과 닮아있다. 이태준도 1904년생이고 월북한 문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1926년 일본유학시절 만나 친구가 되었다. 단지 예술가로서만 산 게 아니라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로 살아온 그의 수필 곳곳에 그의 예술관, 인생관, 가치관이 녹아 있다.

 

인생이란 세상에 태어날 때 털올 하나 가지고 온 것이 없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털올 하나 가지고 갈 수는 없다. 물욕(物慾)의 허망함이 이러하다. 많은 친구를 사귀어 보고 여러 가지 일을 같이 경영해 보았으나 의리나 우정이나 사교란 것이 어느 것 하나 이욕(利慾)의 앞에서 배신을 당해 보지 않은 것이 없다. 순수하다는 것을 정신의 결합에서밖에는 찾을 길이 없다. 이 정신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종교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에서뿐이다.”

 

내가 너를 왜 사랑하는 줄 아느냐. 그 못생긴 눈, 그 못생긴 코, 그리고 그 못생긴 입이며 다리며 몸뚱아리들을 보고 무슨 이유로 너를 사랑하는지를 아느냐.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커다란 이유가 있다. 나는 고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노력하는 사람이면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털보(지폐의 초상화를 지칭)’가 골고루 퍼질 수 있는 독립을 해야 한다.”

 

()와 소()는 다 약소한 민족을 도와주려는 천사려니 했다. (생략) 그러나 그 뒤에 온 것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들이 사갈(蛇蝎)보다 더 싫어했던 부일(附日)분자, 민족 반역자, 또는 이에 유사한 것들이 팔일오 전이나 꼭 마찬가지로 골고루 자리를 차지해 있고. ”

 

그림을 이라, 화가를 환쟁이라 하여 나라에서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녹을 주어 기르던 옛날에도 사회가 화가를 대접하는 정도가 요새처럼 심치는 아니 하였다. (생략) 화가의 성격은 소극적이기 때문에 자기의 노력에 대한 답례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상인(商人) 근성을 가지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작품을 금전으로 환산하는 불명예를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것이다. 화가의 성격을 이해하고 우대할 줄 아는 사회라면 당연히 솔선하여 예를 차려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기에 대한 염치와 교양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의 화가는 자연 호구의 길을 직업선(職業線)에 매어 단다. 직업이 하루 이틀 계속되는 날 그들은 예술에 대한 정열과 창작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또한 그들의 사색하는 범위는 예술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세속화하여 결국 호구를 위한 일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협잡물이 되고 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