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복잡하지 않다 - 골리앗 전사 이갑용의 노동운동 이야기
이갑용 지음 / 철수와영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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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교과서가 있다면  
회사에는 이 책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필독을 해야 한다. 
 

 

현대중공업 정문을 통과하려면 경비들과 제일 먼저 부딪히게 된다. 대부분 해병대나 특전사 출신들이어서 덩치도 크고 자기들끼리 계급 관계도 뚜렷했다. 노동자들은 이들을 두려워했다. 회사의 기물을 지키는 일보다 노동자 감시가 이들의 주된 임무였다. 정문에서 ‘바리깡’을 들고,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머리를 검사해서 목과 귀를 조금이라도 덮으면 가차없이 그 자리에서 밀어버렸다. ······ 경비들은 머리감독뿐만 아니라 복장검사, 출퇴근체크, 출입증 확인, 퇴근시 몸수색 등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권한이 있었다. ······ 말로는 날마다 ‘우리는 한가족’이라고 하면서 회사는 ‘가족’인 노동자들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정해진 작업복에 안전화로 군인을 만들어서 출퇴근을 시켰다. 이건 ‘가족’이 아니라 ‘군대’였다. 




제복을 입히는 데에는 목적이 있다. 학생은 교복을 입어야 단정하고 학생답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들이 볼 때 그렇다. 아이들에게 학생이란 정체성을 고정시켜서 ‘학생이란 이래야 한다’는 ‘어른들’의 규율을 더 효과적으로 강제하기 위해서다. 다수에게 고정된 일체감을 느끼게 할 때 복종은 더 쉬운 법이다. 군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혈기왕성한 나이의 젊은 남성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똑같은 머리 모양, 똑같은 옷, 똑같은 자세, 똑같은 훈련을 시키는 목적은 오로지 ‘복종’을 위해서다. 국가에 순응하는 집단을 만드는 것, 지배 권력에 대항하지 않도록 체질적으로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것이 군대의 목적이다. 자본은 일터를 군대화시켜, 노동자들이 군대에서 강요당했던 복종과 충성을 다시 한 번 이용하고자 했다. ‘산업 전사’, ‘산업 역군’이란 말은 결코 노동자들을 칭송하는 말이 아니다. 통일된 복장으로 지시에 순종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열심히 일만 하는 젊고 힘센 현장판 군인, 자본가들이 원한 건 그런 ‘산업 전사’들이었다.




현대중공업의 슬로건은 ‘가족’이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큰 글씨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표어. “사원을 가족처럼, 회사를 내 집처럼” 자본가들은 가족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아무런 의심 없이 통용되듯, 우리 사회에서 가족은 어떤 불순물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한없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혈연 공동체, 가족은 그래서 어떤 문제도 일어나선 안 되는 청정 지대여야 하고, 누구도 의심하거나 깨트리면 안되는 집단이다. 노동자 ‘자식’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회사라는 ‘부모’에게, 불만을 표하거나 대드는 노동자는 용납할 수 없는 ‘패륜아’가 되었다. 현대중공업이 가족이라면 날마다 가정 폭력이 넘치고, 자식들이 죽어나가는,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일만 하는 공포 영화 속 ‘조용한 가족’일 따름이다. 문제는 이 ‘가족 신화’를 자본이 너무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기업, 어떤 자본도 우리는 노동자들과 ‘쿨’하게 서로 노동력과 임금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서로의 불평등한 관계가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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