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없다
윤구병 지음 / 보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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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 ꡔ잡초는 없다ꡕ, 보리
스콧 니어링, ꡔ스콧 니어링 자서전(the making of a radical)ꡕ, 실천문학사
스콧 니어링·헬렌 니어링, ꡔ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ꡕ, 보리
헬렌 니어링, ꡔ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ꡕ, 보리


책을 잡아 들었을 때 첫느낌
보리 출판사판 ꡔ잡초는 없다ꡕ, ꡔ조화로운 삶ꡕ, ꡔ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ꡕ는 책 표지부터 마음에 들었지요. 화려한 색깔도 없이 누런 종이 색 그대로였습니다. 속을 펼쳐보니 또한 기대에 어긋나지 않더군요. 재생지에 본문이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책을 읽어 보기도 전에 이미 느낌이 좋았어요. 누렁 송아지 빛 마냥 친근한 색감도 그렇지만 펼쳤을 때 펴지는 퀴퀴한 냄새는 마치 구수한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는 듯한 행복을 크······. 허허, 청국장을 싫어하는 친구들에겐 반감만 사겠군요.
단, 실천문학사판 ꡔ스콧 니어링 자서전ꡕ은 반가움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고교시절 지긋지긋했던 수학정석을 다시 펼치는 느낌이랄까요. 딱딱하고 두꺼운 종이로 표지를 만들었고 게다가 또 하나의 표지를 덧씌웠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늘 흘러 떨어지기 일쑤라 귀찮기 짝이 없는 장식용 표지를 하나 더 붙인 책에 왠지 ‘사회·정치적 급진혁명을 꿈꾸는 자’라는 제목은 어울리지 않은 듯 했습니다. 값도 다른 책에 비해 2배나 비싸니 불만도 2배가 되었답니다, 물론 내용이 좋아서 다 용서하였지만요.

학교가 공장 같다네요
현재 우리 학교 제도도 공장과 비슷하다. 저마다 다른 학생들의 소질과 소망과 능력과 취향을 무시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어 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잡초 20쪽)

교직에서 해임된 뒤, 미국의 대학과 학교들은 점점 더 거대한 공장이 되어갔다. 학생과 교수들 모두 개성을 상실하고,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는 채 지냈다. (자서전 202쪽)

아,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이거든요. 그래서 잠깐 제 이야기를 하지요. 동료 선생님들이랑, 저녁에 술 먹으면서 학교 얘기 많이 하거든요. 그러면 어느새 ‘공장 얘기 그만해’ 하며 핀잔을 주시는 분이 있어요. 졸지에 저는 공장에 다니는 직원이 되어버렸지요. 전 속으로 ‘그럼 학생들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공산품인거네요.’라고 생각했지요. 핑크플로이드란 외국 밴드 ‘벽(THE WALL)’이라는 뮤직비디오를 보셨나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죠. 막, 그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윤구병님이나 스콧 니어링님이나 교육을 바라보는 생각이 같은 것 같아요. 아이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고요. 공장에서 수동적으로 만들어지는 빵이 아니라. 자연에서 스스로 길러지는 밀과 같은 존재라고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선생님의 뜻대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치 공장에서 똑같은 빵을 구워내는 것 같아, 참 안쓰러워요.

과학과 기술아! 잘난 체 하지 마라!
과학기술 영역에서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망치는 것은 무엇인지 단 한 시간이라도 자기 시간을 내서 우선 순위에 따라 목록이라도 작성하고 생각해 보는 겨를을 갖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으랴 (잡초 170쪽)

고등학교 국어 (상) 교과서에는 ‘현대과학은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윤순창씨가 써놓은 글이 있지요. 그 글의 결론에는 과학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결자해지(結者解之)라, 묶어 놓은 사람이 과학자이기 때문에 풀어 헤칠 사람도 과학자란 말인가요. 물론 풀어야 할 책임이 있지요. 하지만 과연 풀어 낼 능력은 있는가 의문이랍니다. 또한 근본적인 문제는 과학자의 윤리적 양심과 가치관에 있을 터인데 단지 죄를 졌으니 죄값만 치르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탐탁치 않아요. 일단은 저질러 버리고 나중에 수습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지요. 수업시간에 이 글을 가르치려니 차라리 윤구병씨가 대덕과학기술원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내용을 읽어주고 싶었답니다.

흙내가 그립지 않나요.
어차피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사는 편이 낫다. 노점에서 먹을 것을 사거나 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대신 시골에서는 적어도 자기가 먹을 것은 재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서전 374쪽)

시골생활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과 접하면서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생계를 위한 노동 네 시간, 지적 활동 네 시간, 좋은 사람들과 친교하며 보내는 네 시간이면 완벽한 하루가 된다. 생계를 위한 노동은 신분상 깨끗한 손과 말끔한 옷, 현실세계에 대한 상아탑적 무관심에 젖어 있는 교사에게서 기생생활의 때를 벗겨준다. (자서전 375쪽)

날마다 자연과 만나고 발 밑에 땅을 느껴라 (아름다운 186쪽)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친구에게 질문 하나 하지요. 오늘 하루 중 흙을 밟아본 시간 얼마큼 되나요? 아, 글쎄요. 전혀 없었다는 친구도 있네요.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시멘트로 된 방을 지나, 콘크리트 복도를 걸어, 철근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죠.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 시멘트 보도블럭을 몇 번 걷다가 간혹 기름덩어리 아스팔트를 건너 학교에 들어가게 되겠죠. 운동장에는 흙이 가득합니다만 그것을 밟고 갔다간 신발 바닥이 더러워 질 것이니, 웬만하면 또 시멘트와 콘트리트와 철근을 밟고 교실에 들어 설 것이죠.
교실은 왜 그리도 아이들을 졸립게 하거나 무섭게 떠들게 만들까요. 20평 남짓한 콘크리트 공간 속에 50명이 가득차 있으니 얼마나 비인간적이겠어요.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닭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놈의 닭들이 때도 없이 울어대는 것이에요. 다들 미쳤다고 잡아먹어야 한다고 화를 냅니다. 그런데 그럴 만도 하죠. 그 좁은 울타리 속에서 일생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어느 생명체인들 미치지 않겠어요. 미치진 않았더라도 미친 척이라도 해서 빨리 세상을 하직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흙을 밟지 않는 날이 많아질 수록,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잊어버리고 황폐해진답니다.
제 어린 시절의 집은 도시 변두리에 있어서, 반쯤은 시골 생활을 했습니다. 집의 바깥벽 밑에는 빼곡히 화분들이 있었지요. 말이 화분이지, 화분의 역할만 할 수 있으면 어떤 것이든 주워 왔습니다. 생선가게에서 생선을 담던 스티로폼, 과일가게에서 과일을 담던 궤짝, 깨진 양동이, 심지어는 타이어까지 화분 노릇을 했답니다. 할머니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그 화분들과 함께 하셨지요. 고추, 호박, 파, 마늘, 상추 등을 길러 입을 즐겁게 해 주셨고, 봉선화, 나팔꽃, 박꽃, 채송화, 사루비아 등을 길러 눈을 즐겁게 해 주셨답니다.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그나마 인간적인 면이 남아있다면 아마도 그 시절의 추억이 그것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던 중에 먼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될 일이 생겼습니다. 이사를 가기 며칠 전 동네를 걷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30년 가까이 살아온 동네를 떠난다는 것이 여간 마음 아픈 것이 아니지요. 불쑥 동네를 걸어 보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간절한 걸음이었지요. 한 군데 건너 한 군데씩 다 내 추억을 건드리는 곳들이었지요. ‘저 집 살았던 아줌마는 참 지독했어, 공이 넘어가면 절대 꺼내 주지 않았으니까. 그래 우리가 일부러 유리창을 깨뜨리고 도망갔었지’ ‘이 골목은 따뜻한 볕이 잘 들었지, 그래 겨울이면 여기서 쪼그리고 앉아 만화책을 보곤 했지’
어느새 발길은 불알친구 집으로 가고 있었답니다. 혹시나 해서 불러 보니까 녀석이 집에 있더군요. 둘 다 직장인이라 평소에 전화를 해도 잘 연락이 안되는 사이였는데 그냥 걸어가보니까 집에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답니다. 그건 아마도 그때 그 시절 느낌을 마지막으로 가져 보라는 하늘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내가 두메산골에서 나고 자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답니다. 걸음 거리로 한 시간을 넘지 않는 곳에 모든 생활 공간이 있어, 그 곳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자식 기르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고향은 서울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내 고향 충청도’이지요.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살고 싶은 곳, 논과 밭 사이 작은 초가집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라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지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지만, 정작 그렇게 말한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하고 지금은 오히려 좁은 세상(?)에 들어가야 할 처지에 있답니다. 도시에서 세상이 넓다고 외치는 것보다, 시골에서 자연과 조화롭게 살고자 노력한다면 내가 곧 세상이고 우주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근육의 팽팽한 긴장을 느껴가며 일하는 것이 참맛이려니
작업장이나 일터에서 땀 흘려 일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으려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참 공부는 시작된다고 본다. 이 말은 농사꾼으로 살아온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배운 것이, 교수로서 15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책에서 얻은 것 보다 훨씬 더 많음을 느끼기에 스스럼없이 하는 말이다. (잡초 14쪽)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기계의 버튼을 누르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서전 394쪽)

사람이 죽는 날까지 건강하고 건전하게 살아가려면 농부가 되어야 하고 목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먹을 것을 기르고 살 곳을 짓는 것은 본능적인 일이 아닐까요. 비록 도시에 살더라도 흙과 가까이 하며 나무를 다룰 줄 알아야 하지요. 흙에 씨를 뿌려 기르는 것은 단지 먹을 것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무를 다루어 여러 살림 도구와 집을 만드는 것은 단지 생활에 편리를 찾는 것 정도에 그치지 않아야 해요. 그것은 단지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삶이기 때문이지요. 본능적인 것은 동물적인 것이므로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많아요. 실제로 요즘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려고 하지 않고 머리 속으로만 이해하려 들죠. 먹을 것을 살 줄 알았지, 기를 줄을 모르고 집을 살 줄 알았지, 지을 줄을 모르다보니 직접 경험의 참 맛을 모르죠. 땀 흘려 일하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진정한 맛을 여러분들이 느껴 보았으면 참 좋겠네요.

더불어 함께 살기
한 사람은 부유하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하다면, 그 두 사람 다 불평등 때문에 타락한다 (자서전 125쪽)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132쪽)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조화로운 214쪽)

우리 학교 여선생님, 특히 아줌마선생님들에게 내가 인기가 많다고 해요. 인기가 많은 것은 기분 좋은 일이나, 총각 입장에 유부녀의 관심은 가끔 부담스러울 때가 있지요. 하하, 어디선가 마구 돌이 날아 올 것 같군요. 하여간 원인을 파악해 보니, 내가 남자답지 않게 살림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나요. ‘한살림’이라고 유기농산물로 밥상을 차리자는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해서, 매주 한 번씩 우리농산물, 유기농산물을 공동구매하고 있으니 여선생님들이 날 귀엽게 봐 줄 이유가 될 수도 있겠죠.
‘온 우주 생명체의 협동 활동을 통해 밥이 만들어지듯 이 밥을 먹는 사람의 삶도 더불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밥이 만들어지기까지 온 우주 생명체가 협력하듯, 밥을 먹는 사람도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내 머리를 망치로 내려 때리듯 강한 인상을 남겨 주었답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그래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뭐, 이런 말을 사회 시간, 윤리 시간, 심지어는 국어 시간에도 귀에 박히도록 들어 봤지만, 정말로 그런지 몸으로 느껴 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요즘 아이들처럼, 무남독녀, 혹은 무녀독남으로 혼자 자란 친구들에게는 더불어 함께 한다는 것이 오히려 귀찮게 느껴지나 봅니다. 우리 반 아이들 사는 이야기를 듣다가 좀 의아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반 친구들에게 꽤 좋은 아이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유는 그 아이가 물건을 잘 빌려주기 때문이라나요. 물건을 잘 빌려주기 때문에 좋다라는 말은 거꾸로 생각하면, 다른 아이들은 물건을 잘 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겠죠.
우리 친구들에게 두 편의 이야기를 소개해 줄 테니, 읽으면서 ‘더불어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먼저 첫째 이야기입니다. 줄이 네 개 달린 볼펜을 가운데 둡니다. 각 줄의 끝을 한 아이씩 잡고 있습니다. 동시에 줄을 잡아 당겨 자기 쪽으로 끌고 오면 점수를 얻게 됩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당연히 네 아이가 모두 자기 쪽으로 줄을 당겨 점수를 아무도 얻을 수 없었답니다. 만약에 서로 순서를 정해 한 아이 쪽으로 힘을 몰아 주면 모두 점수를 얻을 수 있었겠죠.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똑같은 음식을 배달했습니다. 단, 사람 팔 길이 보다 긴 숟가락을 주면서 그것으로 먹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천국 사람들은 건강히 잘 있는데, 지옥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었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지옥 사람들은 자기 팔 보다 긴 숟가락으로 어떻게든 자기 입에 음식을 넣어보려고 했으나 결국 넣을 수 없었고 천국 사람들은 남에게 먹여 주며 포식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이지요.

덧붙여 한 마디
ꡔ잡초는 없다ꡕ는 농사꾼이 된 철학 교수 윤구병님의 시골생활을 담고 있지요. 이 책과 비교해서 읽어 볼 만한 것이 「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입니다. 경제학 교수였던 스콧 니어링이 아내와 함께 숲 속에서 산 스무 해의 기록이지요. ꡔ잡초는 없다ꡕ가 ꡔ조화로운 삶ꡕ보다는 훨씬 잘 읽힐 것입니다. 우리네 이야기가 가득하니까요. ꡔ조화로운 삶ꡕ에는 실제로 시골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자세한 안내서가 될 것입니다.
ꡔ잡초는 없다ꡕ에서 윤구병님의 삶에 감동을 얻었다면 그리고 또 그와 같은 느낌을 얻으려면 오히려 ꡔ스콧 니어링 자서전(the making of a radical)ꡕ을 권하고 싶습니다. 100세가 되던 해 스스로 금식하여 죽음마저도 자기의 의지대로 택했던 철저한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 스콧 니어링의 강철같은 삶을 흡수할 수 있을 겁니다. 스콧 니어링은 ‘안락한 삶을 열망하는 사람과 끊임없는 결단과 투쟁으로 이어지는 힘겨운 삶 속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 중에서 투쟁의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됩니다. 어려울 적마다 ‘확실하게 지속되는 안락보다 더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한 사람이랍니다.
두 남자 분의 이야기가 너무 이성적이어서, 머리가 벅차온다면, 이젠 가슴이 벅차오르는 책과 만나보세요. 스콧 니어링의 두번째 아내 헬렌 니어링이 쓴 책이지요. ꡔ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ꡕ, 이 책에서 헬렌은 사랑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스콧 니어링 못지 않게 아름다운 삶을 살다간, 자유로운 영혼 헬렌 리어링의 울림은 깊이 깊이 간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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