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주의보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05
설재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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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방에 사는 사람을 직접적인 소재로 한 영화가 기생충이라면 창작의 동기가 된 소설이 바로 범람주의보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크고 작은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최근 네팔의 홍수가 가장 끔찍한 참사였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벌어지는 자연재해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구온난화의 주범은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계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그런 재해로부터 가장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는 영화 돈룩업에서 상상된 것처럼 여차하면 지구를 버리고 안전한 행성으로 이주해 버릴 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소설 범람주의보는 개연성 있는 현실로 다가온다. 다만 청소년문학 답게(?) 작은 희망을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밑줄>

할아버지와 수향 씨가 함께 일했던 회사는 도시의 지상과 지하와 여러 거대한 구조물을 설계하는 것에도 관여했다. 여기서 관여했다라는 말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수단을 써서 일의 방향을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끌고 갔다는 뜻이다. 할아버지는 수향 씨보다 먼저 알아챘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 그 누구도 매끈한 도덕성이 보장된 매뉴얼을 따르며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 도시가 온통 그렇게 설계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일의 가장 선두에 서서 땅을 파내는 일을 지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대로 두면 이 도시의 모든 오수가 한곳으로 냅다 흘러갈 거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가정을 꾸린 후였다. 가족 모두가 할아버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참았다. 엄마가 회상하는 서창식의 전성기였다. 엄마의 표현을 한 번 더 빌리자면, ‘단단히 고장 나기전 말이다.

할아버지와 수향 씨가 친해졌던 이유는 간단했다. 말이 통했다. 신문을 펼친 채 눈을 감고 검지를 허공에 돌리다 기사 하나를 쿡 찍어 보면, 그 기사에 대해서 할아버지와 수향 씨는 정말이지 쌍둥이처럼 똑 닮은 논평을 해 냈다.

할아버지는 신문에서 자주 보던 우두머리가 긴 팔을 뻗어 허수아비 사장을 세우곤 기업을 키워 내는 걸 지켜보았다. 그 기업만이 워터프루프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성공시킨 건 당연했다. 배리어를 맞고 튕겨나가는 빗물의 성분이 어떻게 변하는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높으신 분들이 눈감아 준 유일한 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튕겨나간 빗방울 하나하나의 변화는 무시하고 지나갈 수준이니 무해하다고 기업은 광고했으나, 그 빗방울들이 모여 어딘가에 잔뜩 고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러나 제아무리 위험하다 한들 보통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 곳에 모아 둔다면 상관없었다.

통협동이 그곳이었다.

할아버지는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걸 폭로하고 싸우면 어떨지 물었던 날 처음으로, 서창식과 이수향은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고야 말았다.

나는 그곳 사람들이 걱정돼 미치겠어. 그곳에는 물고기 하나 없이 썩은 내 나는 늪이 생길 거고 사람 몸에 해로운 벌레만이 가득할 거야. 죽음의 마을이 될 거야. 우리는 지금 멀쩡한 마을을 사람이 살 수 없도록 만들고 있어. 사람이 통과해서는 안 되는 길들을 내고 있다고. 저승 가는 길이나 마찬가지야. 이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돼. 무고한 사람들이 파멸할 걸 알면서 겨우 월급이나 받자고 이럴 수는 없다고.

목에 핏대를 올리던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수향 씨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에겐 겨우 월급이구나. 미안한데 창식 씨, 나는 싸울 수 없어. 싸움도 배가 든든해야 할 수 있거든, 근데 나는 아니야. 그리고 창식 씨, 창식 씨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동료들 대부분이 나와 같은 처지야. 창식 씨가 생각도 교양도 없다고 싫어하는 지혁 씨나 이문 씨, 정오 씨 다 나랑 똑같은 사람들이야. 한 달만 월급을 받지 못해도 집에서 쫓겨날 사람들이라고. 부모님이 신혼집을 사 준 창식 씨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월급의 대부분을 한 달 방세로 내고 있어. 그 싸움을 위해서 밖으로 나앉는다면 누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줄 것 같아? 창식 씨가? 부모님의 돈으로?

아버지는 싸우지 않았다. 대신 어느 특정 집단의 미래를 갈기갈기 찢으며 그것이 발전이라 말하는 장면들을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말라가다가 조용히 회사를 나왔다. 함께 싸울 사람은커녕 할아버지의 생각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여 줄 이조차 없었다.

그리고 수향 씨는 그런 할아버지를 모르는 척했다.

같이 말을 섞으면 내 미래를 망쳐 버릴 것 같았어. 서창식이란 사람은 부모가 돈이 많아서 저럴 수 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했어. 나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결국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어. 작은 동의 표시라도 하면 바로 나를 진창으로 끌어들일 것 같아서. 그때는 내가…….”

수향 씨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쳤다.

그때는 내가, 이 도시와 이 나라가 진짜로 진창, 끝없는 펄밭이 될 거라는 걸 몰랐지.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어.”

 

 

작가의 말

서울에서 발생한 기록적인 폭우로 반지하 주택에 거주하던 시민들이 여럿 사망했던 날, 방의 불을 모두 끈 채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솔직히 말하자면 기후 위기라는 네 글자 말에 크게 걱정하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지금 사람들의 코앞에 놓여 있는 수많은 문제에 비해 약간은 먼 시기의 이야기라고 착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날 하수구가 범람하고 사람들이 죽는 걸 보며 제가 너무 안이했다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후 위기라는 문제가 벌써 내 근처 누군가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조금 뒤늦게 알게 된 것이죠.

물론 인류는 참 끈질기고 성실해서, 아마 쉽게 멸종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어떤 기후 위기가 찾아와도 명맥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낼 것 같아요. 마치 소설 속에서 누비스를 개발한 것처럼요. 하지만 그런 성공 사례가 역사에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수많은 목숨, 혹은 지독히 괴로워야 했던 개개인의 나날은 슬프게도 기억되거나 호명되는 일이 드뭅니다.

폭우가 내리던 시기, 저는 몇 달 후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 시작하던 참이었는데, 경제적으로 사정이 썩 좋지 않고 서울의 집값은 너무 비싸서 반지하 주택을 염두에 두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저 일이 내 일이 될 수도 있었다는 자각과 함께, 기후 위기를 늦추려는 모든 시도의 효과가 빠른 시일 내에 가시화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 저를 더욱 슬프게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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