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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해 봐요 - 판사 김동현 에세이
김동현 지음 / 콘택트 / 2022년 4월
평점 :
과고, 카이스트, 연대 로스쿨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의료사고로 한순간에 시력을 잃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상상하기도 싫지만 분노하고 좌절하고 말았을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극복했다. 아니 극복이 아니라 적응했다. 아니 오히려 진화했다. 몸의 시력을 잃고 맘의 시력을 얻었다.
하늘이 저자에게 그런 고통을 주신 것은 어찌 보면 이런 진화를 원하셨던 것일까? 남의 도움 없이 혼자의 능력으로 충분했던 그에게, 남의 도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키워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월세를 송금하여 세 달 분의 월세를 밀린 세입자를 집주인이 법대로 내쫓았다. 저자는 이를 두고 고민을 하다가 세입자의 편을 들어주는 판결을 한다.
신은 저자 개인에겐 원치 않은 장애를 주었으니 너무나 불공평하다, 하지만 저자는 장애를 계기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눈을 떴고 그 결과 소외된 이들을 배려하는 판결을 하게 되었으니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는 오히려 공평하다.
성경에서 선한 욥이 고통을 받고, 심지어 신의 아들이 예수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 신은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남부끄럽게 살지 않도록 고난을 주신다. 신의 아들조차도 거부할 수 없었다.
<밑줄>
어떤 선택이든 후회가 남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고, 길을 잘못 들었으면 돌아가면 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이다. 조금 방황하고 돌아가더라도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이 책은 내가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장애라는 건 그냥 불편한 상태에 적응하고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는 것이지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마지막 3천 배를 마쳤다.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실망스럽지 않았다. 편안하고 담담했다. 스님께서는 기도를 마친 내게 말씀하셨다.
“육신의 눈을 뜨지 못했지만 이제 마음의 눈을 뜬 거야.”
스님 말씀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내가 바라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또 다른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자기에게 큰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다. 나라고 다를 바 없었다. 사고 직후,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를 낼 기운마저 없었다. 그래 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도 알았다. 사고가 난 그날 밤 나는 절망과 분노와 한숨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문득 병실 구석에 웅크린 채 잠든 의사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저 의사도 자기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닐 텐데 새벽까지 혼자 동분서주하며 사고를 수습하려고 애쓰던 모습이 생각나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밉고 화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 도리는 하는 사람이다 싶었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렇다고 나를 착해빠진 순둥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상대방 입장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내 기준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그쪽이 상당한 힘의 우위를 쥔 상태라면. 나는 시킨다고 무조건 하는 스타일이 못 된다. 일일이 돌볼 여유가 없어 그냥 넘어가는 일도 많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군대에 있을 때도 부당한 지시에는 들이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 직장에서는 할 말 하려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위원장까지 했다.
현대와 같은 위험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나 사고 또는 질병으로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노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기능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 사람이 본인이 될 수도, 가족, 친구, 이웃이 될 수도 있다. 그때 가서 불편한 것을 해결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바꾸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은 우리 모두에게도 살기 좋은 세상이다.
세상에서 제일 가는 복이 사람 복이라는데 정말 과분한 복을 받았다. 내 존재도 그들에게 복이었으면 한다. 민폐 끼치기를 세상 무엇보다 싫어하던 나였지만 이 시간을 통해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조금씩 기대고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 人 이다.
한번은 고민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어느 가게가 코로나19로 영업을 못 하게 되면서 월세가 밀렸다. 나중에 두 달 분 월세를 송금했는데 착오로 다른 사람에게 보냈다. 이걸 알아차린 것은 세 달 분의 월세가 밀린 뒤였다. 부랴부랴 월세를 다시 보냈다. 명백한 과실이긴 하지만 후폭풍은 컸다. 임대인은 계약갱신을 거절하고 가게를 비워 달라고 했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3기분의 차임에 해당하는 금액에 이를 때까지 차임을 연체한 사실이 있으면 임대인이 계약갱신을 거절할 수 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법적으로 임대인이 인도와 원상회복을 요구할 수 있다. 영업도 제대로 못 해 보고 권리금까지 모두 날릴 판이었다.
임대인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았다. 월세가 또 밀릴지 모르니 임차인을 내보내고 새로 들이고 싶을 것이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직접 영업을 해도 괜찮다. 법적 요건은 다 갖추었으니 나라도 그럴 것 같다. 임차인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 보았다. 월세가 밀린 건 잘못이 맞지만 송금 한 번 잘못했다고 억대의 돈을 투자한 가게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법이 너무한다. 법은 왜 이러하며 판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냐,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모른다.
우리 민법은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해야 한다.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조항으로 판단하는 사건은 극히 예외적이다. 구체적인 개별 조항이 있음에도 이런 추상적인 일반 조항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왔지만, 임대인 손을 들어 주자니 임대인의 이익에 비해 임차인의 손해가 너무 컸다. 고민 끝에 상급심에서 파기될 각오를 하고 권리남용이라며 임차인 손을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임대인이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되었다.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선거로 선출하는데 판사를 왜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 않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선거는 다수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대표로 선출하는 절차다. 그렇게 뽑힌 사람들이 또다시 다수결로 법을 만든다. 애초에 다수의 논리가 지배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같이 승자독식의 선거 구조에서는 그런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힘 있고, 목소리 큰 사람들의 의견이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찍어 누른다. 수십 년째 통과되지 않는 수많은 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다 누가 죽기라도 하면 여론에 밀려 겨우 통과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부도 다를 바가 없다. 대통령제에서 지지율이라는 것은 정책을 추진하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기득권에 눌려 물러서는 일이 수없이 생긴다. 다수를 위해서라면 소수를 희생시키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게 다수결의 최대 부작용이고, 선출된 권력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법관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서 소외된 사람의 인권을 법관이 챙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독립성을 보장하고 탄핵 절차에 의해서만 신분을 박탈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도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고 사회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 공익은 파편화된 사익이다. 판사로서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까지 소홀히하지 않고 소중하게 지켜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