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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사람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조은영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평점 :
생물학자이자 달리기 선수인 베른트 하인리히(Bernd Heinrich 1940~)의 과학책, 달리기책, 자서전이다. Bernd라는 이름이 뜻이 곰처럼 강한(bern곰+hard강한=Bernhard → Bernd)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독일계이고, 운명적으로 생물학자이다. 전작 ‘우리는 왜 달리는가’가 60대에 쓴 책인데, 이건 80대에 쓴 책이니 두 책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과학자에게 신은 자연이다.
<밑줄>
우리는 타고난 달리기 선수다. 이게 현존하는 호미니드 중에서도 인간을 고유하게 만드는 점이다(도구를 만들어 썼다는 이유로 유인원보다 우월하다 할 수도 없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이유로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도 없다). 발자국은 그 주인의 행동은 물론이고 체형에 대한 간접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가볍게 쌓인 눈 위에서 달릴 때와 걸을 때 남은 흔적을 비교해보았다. 화산의 얇은 응회암층에 보존된 인간 이전 사람들의 발자취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고대 호미니드들은 걷는 건 물론이고 정말 달릴 수 있었다. 그들이 현재의 달리기 선수와 전혀 달랐다고 가정할 이유도 없다.
추위에 민감한 점, 털이 없는 몸, 두껍고 부스스한 머리카락, 특히 땀을 다량으로 흘리는 것과 같은 인간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달리도록 태어났고 뜨거운 기후에서 기원한 게 분명하다.
달리기는 식량을 구하고 포식자에게서 도망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암컷과 수컷 모두에게 유익하다. 이 능력은 인간이 수백만 년 전 형편없는 사냥꾼으로 시작해 대형 고양잇과나 갯과 동물들이 죽인 사체를 먹고 살던 아프리카의 너른 벌판에서 특히 장점으로 여겨졌다. 나는 이 인류 진화의 요람에서 독수리들이 하늘에서 맴돌다가 포식자가 죽인 사체로 내려오는 모습과 한낮의 열기를 견디지 못한 사자가 먹이를 앞에 두고도 그늘에서 쉬는 장면을 수시로 보았다. 땀을 흘리는 능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독수리가 가리키는 살육의 현장으로 뛰어갈 수 있었고, 먹이를 지키는 맹수가 없는 짧은 틈을 활용할 수 있었다. 더위를 견디고 뛰어다니는 만큼 더 많이 먹이를 구해 자손들을 먹일 수 있었고, 그 결과 땀을 흘리는 반응이 선택됨과 동시에 물에 접근하기 쉬워야 했을 것이다.
인간과 다른 동물(많은 새를 제외하고)의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인간의 아기는 무력할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몸이 크고 부모가 쉽게 옮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는 이동할 때 아기가 들러붙을 수 있는 두꺼운 털이 없다. 그러므로 어린 생명은 보호가 필요했고 어미가 아기를 돌봐야 했다. 그 바람에 먹을 것을 구해올 사람이 필요해졌고, 주거지는 물론이며 음식을 제공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짝을 선호하게 되었다. 최근까지도 많은 부족에서 남성은 영양의 일종인 일런드나 쿠두 같은 대형 먹잇감을 구해와 자신이 훌륭한 사냥꾼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받지 못했다. 이는 아마 현대에 와서는 외식, 자동차, 집, 넉넉한 통장 잔고같이 가족을 부양할 잠재력을 나타내는 조건들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물학적으로 역사의 훨씬 이전부터 같은 종족이었으며 진화적으로 선택된 사냥꾼이다.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 애쓰고, 사회적 존재로서 스포츠 팀, 가문, 나라처럼 자신보다 큰 가치가 있는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제는 그 가치를 글로벌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속한 자연으로 보면 어떨까? 자연을 사랑하고 원하며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그러기만 한다면 자연은 영원히 장엄하고 아름답게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이다.
어린 시절 메인주에서 다닌 굿윌학교에서의 나의 가치는 일요일 예배 전 흰 셔츠를 빨아 다림질하고, 교회와 저녁 공부 시간 전에 주기도문을 외우고, 고등학교 조회 시간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에 있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았다면 이내 혼란스러웠겠지만 우리는 따라야 할 확실함을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이었기에 아무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특히 아웃사이더였던 나는 더 큰 압박을 느꼈다. 모든 것이 그저 막막하기만 하고 논리를 거부한 채 불투명해 보였다. 자연이 곧 신이라는 사실을 진작 배웠더라면 덜 외롭고 덜 불안했을 것이다. 아마 진작 자연에 대한 이해와 헌신을 자처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여든 번째 생일을 치른 나는 더는 과거처럼 달리기 선수도, 과학자도 아니다. 허나 나는 내가 바라던 꿈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달리기 선수와 과학자로서의 역할은 최근까지도 내 관심과 에너지를 차지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더 관심을 쏟지 못한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평생 독행하고 긴급한 과제에 감정을 억누르며 지낸 바람에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충만함을 놓치고 살았다. 인생의 마지막 단락을 쓰며 이제 내가 달려야 할 새로운 경주는 더 깊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임을 다시금 느낀다.
내 죽음으로 숲속에서 잔치를 열고 싶기도 하다. 거기서 울트라 마라톤 결승선에 차려진 만찬처럼 모든 것의 출발점인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모두와 공짜 맥주를 나누고 싶다. 내 마지막이 축하의 자리가 되면 좋겠다. 많은 이름과 명언이 새겨진 테이블을 둘러싸고 예전에 그랬듯 사람들이 마음과 악기로 연주하는 록 음악이 울려 퍼지면 좋겠다. 나를 둘러싼 토양은 미국밤나무가 자라는 데 좋은 거름이 될 것이다. 그 자리를 찾은 모든 이들이 근처에서 묘목 한 그루씩을 찾아 집에 가져가 심어도 좋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웨스트브룩 로드를 거치고 텀블다운 산의 산자락을 지나 웨브 호수를 한 바퀴 뛰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