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산문집 (천줄읽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박지원 지음, 박수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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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다가 읽기 싫어하기에 꾸짖었더니, 그 애가 말합디다.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자는 푸르지가 않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굶어 죽이겠소.”

 

어릴 때 천자문을 공부하면서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을 아무 생각 없이 암송했다. 그런데 이 어린 아이는 아마도 낮 하늘은 검지 않고 푸르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밤 하늘은 검으니 그 아이의 생각이 틀렸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창의적이라고 평가해 주는 연암의 태도를 눈여겨 보게 된다.

 

자다 깨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잤다. 깨워 줄 사람이 없어 혹은 하루 종일 푹 자기도 했다. 때로는 혹 글을 써서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조그만 서양 거문고를 새로 배워, 피곤해지면 두어 가락 타기도 했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 주면 문득 기뻐하며 술을 들이켰다. 취하고 나면 스스로를 찬미했다.”

 

휴일에만 가능한 삶인데, 평일에도 이럴 수 있으면 건물주 백수냐 가능할까? 하지만 연암은 그리 넉넉한 삶이 아니었다. 자발적인 가난을 이렇게 즐길 수 있으려면 자본주의의 때를 얼마나 벗겨내야 가능할까?

 

나의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나?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나면 형님을 바라봤지.

이제 형님 보고프면 어디에서 볼까나

두건 쓰고 도포 입고서 냇물 비친 나를 보리.”

 

연암은 죽은 친구, 누나, 형을 위한 조문을 썼다. 하지만 틀에 박힌 형식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썼다. 그만큼 진실함이 묻어 나오는 글들이다. 특히 고인이 된 형을 위해 쓴 시는 동시처럼 순수하다.

 

똥오줌은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밭에 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라기같이 아끼게 된다. 길에는 버린 덩어리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는 오쟁이를 둘러 메고 말 꼬리를 따라다니기도 한다. 이렇게 모은 똥을 거름간에다 쌓아 두는데 혹은 네모반듯하게 쌓거나 혹은 여덟모로 혹은 여섯모로 혹은 누각 모양으로 쌓아 올린다. 똥거름을 쌓아 올린 맵시를 보아도 천하의 문물제도는 벌써 여기에 버젓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기와 조각과 조약돌, 똥거름이야말로 진정 장관이다. 왜 하필 성곽과 연못, 궁실과 누각, 점포와 사찰, 목축과 광막한 벌판, 나무숲의 기묘하고 환상적인 풍광만을 장관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장관론-일신수필-열하일기)”

저 엄행수는 똥을 지고 거름을 메어 먹고사니, 지극히 더럽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밥벌이하는 것을 보면 지극히 향기롭단다. 그의 처신은 더럽기 짝이 없지만 그 의로움을 지킴은 지극히 고상하단다. 그의 뜻을 미루어 보자면 비록 엄청난 녹봉도 그를 움직이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지. (예덕선생전)”

 

연암의 똥사랑(?)은 장관론과 예덕선생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청나라 여행 중에 넓은 들판, 높은 건축물 등을 장관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얘기할 때, 연암은 똥거름 쌓아 놓은 맵시를 장관이라고 얘기한다. 장작 쌓아 놓은 것을 보고 신랑감을 고른다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화려한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관점이 보인다. 예덕선생의 예덕(穢德)은 더러운 덕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반어적으로 쓰였다. 똥을 모아서 거름을 만드는 건 표면적으론 더러워 보이나 그 거름으로 인해 먹을 것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이면을 볼 땐 덕이 된다는 말이다.

 

의원 의()는 의심할 의(). 그 의심스런 바를 사람들에게 시험해 해마다 수만 명을 죽게 만든다. 무당 무()는 속일 무(). 귀신을 속이고 백성을 미혹케 해 해마다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다. 그래서 사람들의 분노가 뼛속으로 들어와 금비녀로 변했으니 독해서 먹을 수가 없다.

예전에 내 듣기로 선비 유()는 아첨할 유()라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네가 평소에는 세상의 나쁜 이름을 모아 멋대로 내게 붙이더니 지금 다급해지자 눈앞에서 아첨을 하니, 누가 네 말을 믿겠느냐! (호질)”

 

연암은 아재개그의 달인이다. 의사는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심하는[] 사람이고, 무당은 제사장[]이 아니라 사기꾼[]이며, 선비는 학자[]가 아니라 아첨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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