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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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윌슨을 읽게 된다

윌슨이 최재천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지구를 정복한 생물이 개미와 인간인데

인간이 개미와 같은 점은 진사회성을 가졌다는 점이고 

차이점은 개미와 달리 다른 생물과 공진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지구를 정복한 인간이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다만 과학자답게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물론 다른 생물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전제 조건을 지킨다면 말이다.

덤으로 근친상간, 동성애, 성욕 등 인간의 본능에 대한 탁월한 분석들을 읽게 된다.

 

 

<밑줄>

개미와 흰개미의 진화 속도가 느렸기에 다른 생물들은 대항 수단을 진화시킬 수 있었고, 결국 생태계는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그 결과 개미들과 흰개미들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나머지 육상생물권을 초토화하는 대신에, 그 생물권의 핵심요소가 되었다. 오늘날 그들이 지배하는 생태계는 지속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정반대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한 종으로 이루어진 인류는 겨우 수십만년 전에 출현하여 지난 6만년간 전 세계로 퍼졌다. 인류는 나머지 생물권과 공진화할 시간이 없었다. 다른 종들 역시 인류의 대량 학살에 대비할 시간이 없었다. 이 부족한 시간 때문에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생물들은 곧 끔찍한 종말을 맞이했다.

곤충의 여왕은 로봇처럼 움직이는 자식들을 본능이 이끄는 대로 낳을 수 있었다. 반면에 선행인류는 개체 사이의 동맹과 협력에 의존해야 했다. 곤충의 경우에는 세대마다 이루어지는 여왕 계통에서의 개체선택을 통해 진사회성이 진화했다. 반면에 선행인류에게서는 개체 수준의 선택과 집단 수준의 선택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진사회성이 진화했다.

 

전문가들은 늘어난 장기 기억, 특히 꺼내어 작업 기억에 집어넣을 수 있는 장기기억과 단기간에 시나리오를 짜고 전략을 세우는 능력이 아프리카를 탈출하기 직전과 이후에 유럽을 비롯한 각지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는 데에 동의한다. 복잡한 문화의 문턱까지 밀고 간 추진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집단선택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의도를 읽고 협력하는 한편, 경쟁하는 집단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구성원들을 지닌 집단은 그것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집단보다 엄청난 이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집단 구성원 사이의 경쟁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그 경쟁은 한 개인이 남보다 유리하게 만드는 형질의 자연선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새 환경으로 진출하고 강력한 적수와 경쟁하는 종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집단 내의 단결과 협동이었다.

 

개체선택은 한 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경쟁이 벌어짐으로써 일어난다. 그것은 각 구성원에게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본능을 빚어낸다. 대조적으로 집단선택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 차이나 직접적인 충돌, 또는 양쪽 모두를 통해 우리 사회에 경쟁이 벌어져서 일어난다. 집단 선택은 서로에게 이타적인 경향을 띠는 본능을 빚어낸다. 개체선택은 우리가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수를 빚어내는 반면, 집단선택은 미덕의 많은 부분을 형성한다.

 

이기적인 개인이 이타적인 개인을 이기는 반면,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은 이기주의자들의 집단을 이긴다. 개체선택만이 지배한다면, 사회는 해체될 것이다. 집단 선택만이 지배한다면, 인류 집단은 개미 군체와 비슷해질 것이다.


인간은 사회 관계망 속에 얽혀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는 자신이 진화한 이 마음 환경이 아닌 다른 곳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유년기부터 우리는 남의 의도를 읽고, 관심사가 같다는 기미를 조금이라도 보이면 금방 협력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한 실험에서는 아이들에게 용기의 뚜껑을 따는 법을 보여 주었다. 그런 다음 어른들에게 뚜껑을 따는 법을 몰라 쩔쩔 매는 시늉을 하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도와주러 방 건너편으로 왔다. 침팬지를 같은 상황에 두고 실험해 보니, 협동 의식이 훨씬 덜 발달한 그들은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또 침팬지들의 지능을 검사하여, 글자를 배우지 않은 생후 2.5세 미취학 아동들의 지능과 비교한 실험도 있다. 물리적 공간적 문제를 풀 때 침팬지와 어린아이는 거의 대등했다. 반면에 다양한 사회성 검사에서는 어린아이가 침팬지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어린아이는 시범을 지켜볼 때 더 많은 것을 배웠고, 보상물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단서들을 더 잘 이해했고, 남들의 시선을 따라가서 표적을 찾아냈고, 보상물을 찾는 과정에서 남의 행동 의도를 파악했다. 인간은 모든 도전 과제를 능란하게 해결해 내는 고도의 일반 지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생활의 전문가로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공한 듯하다. 의사소통과 의도읽기를 통해 협동함으로써, 집단은 독립생활을 하는 개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성취한다. 심지어 개인이 독립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까지 얻어낸다.

 

대다수의 문화에서는 금기와 법으로 근친상간에 대한 개인의 혐오감을 사회적으로 강화한다. 그 문화들은 근친상간으로 결함 있는 아이를 낳을 위험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근친상간의 파괴적인 결과는 인간만이 아니라 식물과 다른 동물에게서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온건하든 심각하든 근친 교배의 결과에 취약한 종들은 거의 다 어떤 식이로든 생물학적으로 프로그램된 방법을 사용하여 근친상간을 회피한다.

 

인간 여성은 외부 생식기를 숨기고 배란기에 있음을 광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영장류 암컷과 다르다. 그 결과 남녀 모두는 결합하면, 지속적으로 빈번하게 성교를 하게 된다. 이 행위는 유전적으로 적응성을 띤다. 여성과 아이가 아버지의 도움을 계속 받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번식과 무관하게 쾌락을 주는 성교를 통해 남성의 헌신적인 행동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며, 많은 상황에서는 그것에 사활이 걸려 있기도 한다. 사람의 아기는 잘 조직된 커다란 뇌와 높은 지능을 확보하기 위해, 발달하는 동안 유달리 긴 기간을 무력한 상태로 지내야 한다.

 

동성애자가 성적 선호도가 다르고 번식을 덜 한다는 이유로 동성애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는 잘못된 것이다. 동성애의 존재는 인류의 다양성에 어떻게 건설적으로 기여하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동성애를 비난하는 사회는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다.

 

외계 지적 생명체가 우리 은하 어딘가에 살고 있고 발전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진화하는 자신들의 문명이 종교적 신앙, 이데올로기, 호전적인 국가 사이의 경쟁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문제는 파벌들이 어떤 식으로 나뉘어 있든 모두의 협동을 통해 합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거대한 해결책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이르렀다면, 그들은 다른 태양계를 개척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고향 행성에 머문 채 거기에서 이룰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들을 탐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지닌 맹목적인 믿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몹시 원한다면, 22세기쯤이면 지구는 영원한 낙원이 되거나 적어도 그 초입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생물들에게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히겠지만, 서로에게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소박한 윤리관, 이성을 가차 없이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 태도, 우리가 진정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자세를 갖게 된다면, 우리의 꿈은 이곳 지구에서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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