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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임금 - 몽상, 그 너머를 꿈꾸는 최고임금에 관하여
샘 피지개티 지음, 허윤정 옮김 / 루아크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클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셀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빠를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잠을 안 잘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숨을 참을 수 있을까? 고작해야 2~3배? 그런데 “극소수 억만장자는 지구상의 일반 성인보다 27만9000배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있단다. 불평등이 극한에 온 것 같다. 그 해결책이 바로 이 책에 있다.
<밑줄>
우리는 대부분 과하지 않으려 한다. 중용을 지킬 때 모든 것이 더 잘 돌아간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다. 무엇이든 과하면, 심지어 건강에 필요한 요소나 좋은 마음도 지나치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식을 하면 심각한 비만으로 이어질 수 있고, 운동을 너무 격렬하게 해도 몸이 상할 수 있다. 사랑도 지나치면 숨 막히는 집착으로 변한다.
과하면 엉망이 되는 법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실상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기에 과함을 방지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둔다. 가령, 도로에서 최고 속도를 제한하고, 공장에서 하천으로 내다버리는 폐수를 규제한다. 이웃 주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소음도 통제한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에 제한을 가하지는 않는다. 개인 소득은 제한하지 않는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는 ‘속도’에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부자로 말이다.
2017년 중반에 상위 1퍼센트의 갑부들이 전 세계 부의 50.8퍼센트, 곧 나머지 99퍼센트 사람들의 부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은 부를 보유. 순자산이 5000만 달러 이상인 ‘초고액자산가’가 14만 8000명 이상이고, 이 가운데 약 절반은 미국에 있다고 추정. 극소수 억만장자는 지구상의 일반 성인보다 27만9000배 많은 자산을 보유
미국에서도 불평등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다 위태롭게 만든다. 이혼율은 불평등이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미국에서 최고치를 달린다. 소득이 최상위 경제층에 심하게 집중된 주에서는 탄소 배출량이 더 많았으며 환경보호에 더 소극적이었다.
확연한 불평등 국가인 미국은 인당 평균 건강관리비용을 선진국보다 ‘3배 가까이’ 지출하고 있는데도 국민의 기대수명이 선진국들 가운데 거의 바닥 수준이었다.
1970년대 후반 이래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공화당, 민주당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부자들에게 대단히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부자들이 내는 세금을 줄이고 부자들이 경영하는 사업에 대해 규제를 풀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1978년 이후 최하위 50퍼센트 미국인의 실질소득을 실제로 1퍼센트가 줄었다. 반면 최상위 1퍼센트의 부자들의 실질소득은 같은 기간 3배 가까이 늘었다.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에 연동된 국가에서는 사회 극빈층의 소득이 먼저 증가해야만 최고 부유층도 자신의 개인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어서다. 그런 사회에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증진하면서 개인의 기득권을 누릴 것이다. 착취들이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게 되는 것이다.
2015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0.01퍼센트 갑부 지위에 오르려면 최소 1130만 달러의 소득을 올려야 했다. 이 상위 0.01퍼센트 부자들의 평균 소득은 3160만 달러였는데, 이는 최저임금 직종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미국인 노동자 연소득의 ‘2100배’에 가까운 금액이다. 미국의 최저임금노동자는 상위 0.01퍼센트 부자가 단 1년 만에 벌어드리는 금액의 돈을 모으려면 ‘2000년’을 꼬박 일해야 하는 셈이다.
미국에서는 1963년 91퍼센트였던 최상위 소득층의 세율이 1965년에는 70퍼센트로, 1982년에는 50퍼센트로 그리고 1988년에는 28퍼센트까지 떨어졌다.
해리슨은 1만7000명의 캐나다퍼시픽철도 직원의 일자리를 없앴다. 이는 회사 전체 인력의 34퍼센트에 달하는 숫자였다. 일자리 감축은 매우 힘든 일일 수 있다. 해리슨은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수를 확실하게 받았다. 그는 캐나다퍼시픽철도에서 CEO로 장기재직하는 동안 4년에 걸쳐 8900만 달러를 챙겼다. 이 돈은 전임자가 동일한 기간을 재직하면서 받았던 연봉의 두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오늘날 기업의 중역 회의실은 헌터 해리슨 같은 임원들과 보상을 갈망하는 고위 간부들로 넘쳐난다. 경제정책연구소 산출에 따르면, 1978년에서 2015년 사이 대기업의 CEO 보수는 ‘약 941퍼센트 증가했고, 이는 주식시장의 성장보다 70퍼센트 정도 더 빠른 속도이며, 같은 기간 일반 노동자의 보수가 힘들게 10.3퍼센트 늘어난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인상 폭이었다.
기업의 CEO들은 최정상에 앉아 탐욕의 화신이 되었다. 1965년, 미국의 주요 CEO들은 일반 노동자보다 평균 20배 많은 보수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CEO와 일반 노동자의 보수 차이가 평균 300배 이상 더 벌어졌다.
모든 사람을 대표해야 할 정치체제가 억만장자들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그들을 대신해 행동하는 백만장자 정부를 낳는다. 이렇게 억만장자 계층의 자금을 받아 임명된 정부가 생물권을 보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지켜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사자가 야채스프를 먹고 살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름없다.
2000년도에 소득이 100만 달러가 넘었던 가계들이 실제 기부금액보다 1280억 달러를 더 기부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개인 순자산은 연말에 더 증가했을 것
2005년, 미국의 권위 있는 의료기관인 메모리얼슨론케터링암센터에서는 암 연구를 위해 수천만 달러를 기부한 억만장자 데이비드 코크에게 답례로 기업 리더십 우수상을 수여했다. 이 엄청난 기부금은 환경보호국이 포름알데히드를 발암물질로 분류하지 못하도록 코크인더스트리가 맹렬한 로비를 펼치는 동안 암센터에 전달된 것이다.
만약 사회가 부자들이 벌어들이는 소득에 상한을 두면 부자들은 지금처럼 열심히 일할 동기를 잃고, 그 상한선까지만 수입을 올린 뒤 한껏 뽐내면서 석양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기업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자리 창출자’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창출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경제는 박살난다.
과연 타당한 논리일까? 그런 논리는 우리가 갑부들에게 고용을 신세지고 있다고 믿을 때만 맞다. 하지만 우리 경제는 현재 진짜 부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도 않고 그들에게 기대고 있지도 않다. 지금까지 그런 적도 없다. 걸출한 부자 벤처 투자가 닉 하나우어는 실제로 부자들이 일자리를 최대한 창출하지 않음으로써 진짜 부자가 된다고 말한다.
하나우어는 2013년 미국 상원 경제정책 청문회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고용을 늘리는 것이 자본가의 최후 수단이고, 고객 수요가 늘어나 고용 증가가 필요할 때, 그것도 꼭 필요할 때만 하는 조치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부자들만으로는 경제 활력을 유지할 만큼의 수요가 절대로 제공되지 않는다고 하나우어는 설명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저는 중간 임금의 1000배를 벌지만, 1000배만큼 물건을 사지는 않습니다. 저희 가족은 차를 세대 소유하고 있습니다. 3000대가 아니고요”
하나우어의 상원 청문회 증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탄탄하고 활발한 중산층만이 건전한 일자리 증대에 필요한 수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부자들은 그런 경제를 창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경제를 죽이고 있다. 하나우어는 돈이 ‘소수의 수중에만’ 들어가는 사회는 ‘소비를 억누르고 수요를 떨어뜨리는 죽음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며 자신의 발언을 요약했다.
상부에 무게가 실린 경제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말도 한 가지 맞는 게 있다. 엄청난 부자가 되는 기회가 강한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강하게 말이다. 그러나 계석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갈망은 모든 것을 소진시킨다. 갈망이 너무 큰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균형감각을 모두 잃을 수 있다. 그들은 가족을 속이거나 건강을 위태롭게 만든다. 직장에서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부정행위를 일삼으며 남의 것을 도용할 지도 모른다.
소득에 상한을 두는 사회는 그런 사악한 행위의 동기를 둔화시킨다. 최고임금이 존재하는 사회는 엄청난 부자가 되는 기회를 제거함으로써 사회 전체에 간단하고도 격조 높은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삶은 큰 부를 좇는 것 이상일 수도 있고, 그 이상이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좋은 삶에 대한 이런 정의를 반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떠 자신의 일이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으며 일터로 향한다. 어쨌든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경제에 기여를 한다. 큰 부를 동기로 삼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자기 일이 가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일부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한껏 움켜쥘 수 있는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이런 생각을 떠올리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인간은 공정성을 중시한다. 모든 직원이 최선을 다해 일하기를 바라는 기업은 모든 직원의 노동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소수의 최상층 직원에게 나머지 직원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보수를 주는 급여체계는 직원들의 노동을 경시하는 처사이며, 그런 평가절하는 노동자의 마음을 회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곧 최고 임원들이 아침 한나절 만에 버는 돈이 일반 노동자가 한 해 동안 버는 돈보다 많으면, 그 기업에 무슨 동기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선배 평등주의자들은 재분배성 조세제도를 터무니없이 큰 부에 대한 이상적인 해독제로 여겼다. 그들은 선진 국가들의 사회에서 소득과 상속 재산에 대한 누진세율을 투쟁으로 쟁취했으며, 이 누진세율은 20세기 중반 사회를 더 큰 평등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이룬 큰 평등은 지속되지 못했다. 최상위층에서 ‘시작되는’ 부와 소득 재분배에 기초한 공평에 이르는 접근법은 장기적으로 최상위층이 ‘가진’ 정치적 힘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얻은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최상위층에 집중된 부와 소득을 재분배하는 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부와 소득이 집중되는 것을 먼저 막아야 한다. 공공지갑의 힘을 활용해 기업 최상위층의 소득을 제한하는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면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눈에 띄게 앞으로 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