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불명 야샤르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비극은 동사무소 직원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뒷 표지의 광고문구대로, 야샤르의 비극은 정말 작은 실수에서 시작되었다.
아니, 생사불명이라니? 뇌사? 실종?
그건 아니다. 여기, 도플갱어도 아니면서 본인이 생사불명이라고 떳떳이(?)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의 입을 빌어 사태를 파악해 보자.

"그건 당신이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그들은 제게 조금이라도 이로운 일이면 '넌 죽었어'라고 하고, 자신들이 아쉬우면 '넌 살아 있어'라고 한다니까요. 학교에 가려고 하니까 '넌 죽었어'라고 했고, 세금을 징수할 때는 '넌 살아 있어'라고 했어요. 소송을 걸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소송을 거느냐고 했고, 정신병원에 가둘 때는 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스파이와 친하게 지내는 게 알려지면 절 살아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즉각 교수형에 처할 게 뻔하다고요."

오호라 통제라.....듣기만 해도 억울한데, 당한 자는 오죽할꼬. 나 어려서부터 <호적에 빨간 줄>을 두려워 하는 어른들의 말을 종종 듣고 살았다. 그때야 호랑이가 곶감 무서워 하는 격이지, 그깟 호적에 줄 하나 그어진다고 무슨~ 허투로 넘겼는데, 아, 생사불명 야샤르의 천일야화스러운 일생 얘기를 듣고 나니 그것이 아니네. 이건 당최, 호적에 빨간글씨로 '사망'이라고 쓰여있으니, 야샤르, 살아있으되 산 목숨이 아니다.

터키를 왜 형제국가, 형제국가 하는가 했더니, 아지즈 네신의 입담을 따라가다 보니 터키와 한국은 정말 형제국가가 맞는가 보다.

"아니, 사람들이 모두 급해서 쩔쩔매고 있는데 기차는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요?"
"당신 화성에서 왔소?"
"예? 화성에서 오다니요?"
"아니, 이 나라에서 언제 기차가 시간표에 따라 운행된 적이 있소?"
"그렇다면 시간표는 왜 써놓은 거요?"
"왜냐고? 시간표가 없으면 기차가 얼마나 늦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뭐 하나 시간표대로 운영되는 법이 없는 이 나라, 경직되고 고루한 관료주의, 책상머리 행정, '빽' 아니면 해결되는 일이 없는, 그래서 있는 사람은 계속 있고 없는 자는 아무리 사방팔방 뛰어도 평생 없는.... 하긴, 그러고 보면 난 온실 속의 화초인가 보다. 위에 나열한 숨 턱턱 막히는 상황을 뭐 하나 몸으로 체험해 봤어야 말이지. 그저 뉴스 속에서, 책 속에서 딴 세상 얘기인 듯 구경이나 했지.
헌데, 민쯩 없는 죄로,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야샤르의 이야기는 그냥 편안히 앉아 들어넘기게 되질 않는다. 설탕 국자에 소다가루 넣은 듯 뭉게뭉게 부풀어 오른, 현실감 없는 사건들임에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내 뱃속에도 누군가 소다를 들이부은 듯 뭉게뭉게뭉게뭉게.....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이야기가 한 꼭지 끝날때마다 야샤르의 감방 동료들과 함께 이렇게 외치게 되는 것이다.

"에이, 씨발!!!!"

"이런, 제기랄!!!!!!" 

생사불명 야샤르로 처음 만난 작가, 아지즈 네신의 문학 세계는 '풍자'라는 말로 압축된다 한다. 작가는 자신의 풍자관을 이렇게 정의했다.
"풍자는 세계를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제해줍니다."
그렇다. 야샤르의 이야기는, 적어도 나, 본인의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내 곁의 누군가의 이야기....아니지, 얼마 후 내가 겪을 이야기의 뻥튀기 판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당최, 이야기로서는 재미있으되 에피소드 하나가 끝날때마다 울분을 삭이느라 한동안 덮어두어야 진척이 되는 책을 써낸 작가는, <날카로운 풍자를 통해 불의와 권위를 비판, 우리 삶을 더 이상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하지 않은 순수한 꿈>을 실현시킬 제대로 된 무기 하나를 손에 쥔 듯 하다.
아니지, 이 책을 통해, 그 무기를 내 손에 꽉, 쥐어 주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6-09-15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고 동사무소갈때 가져가세요. 화나게 하면 이 책으로 후려치세요. 할래다 말았습니다.

진/우맘 2006-09-1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만두님, 좋은 방법임다!!!!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 동사무소는 그 정도는 아니죠. ^^

로드무비 2006-09-16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반가워라.
전 빨리 읽겠다 해놓고 딴짓만 하고 있네요.ㅎㅎ
리뷰 보니 무척 재미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