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 레이몬드 카버 소설전집 3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집사재 / 1996년 6월
평점 :
절판


살다보면 누구나, 가끔은, '조금 묘한 일'을 겪을 때가 있다.
'거 참.....이상하네.'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딱히 나에게 아무런 득도 실도 끼치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일. 혹은, 그런 순간. 누군가에게 이야기 해 주자니 어떤 점이 묘했는지를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을 것만 같아 포기해 버리고 마는.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내 인생에 기록되어 있던 그런 묘한 순간들을 신기하리만치 제대로 묘사해 놓았다.

어쩌면 '묘한 일'이 아니라 '이상한 순간'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특히, 결혼 생활 도중에 찾아 오는 이상 기류.
사소한 말에 자신도 놀랄만치 크게 상처 입을 때. 아무 일도 없는데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은 권태의 순간. 그러나 결국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가 잊혀지는 그런 순간들.
일찍이 결혼하여 자녀를 뒀다는 작가의 체험에서 배어나온 것일까? 카버는 평이한 일상 속의 섬세한 떨림을 잡아내는 탁월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
'별 거 아닌 일'들을 설명해 내는 일은 '대단한 사건'을 늘어놓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 하나의 단어만 잘 못 놓여도 모든 것이 영 글러버리지 않을까?

기승전결이나 반전을 즐기는 독자라면 그다지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식의 김빠지는 잡담이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것에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푸욱, 꺼져버리는 듯한, 결말도 없고 설명도 없는 이야기들이 더 현실과 가까운 듯 하여 미덥다. 게다가 매 순간 매 문장마다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과 분위기가 여과없이 전달되는 데는....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처음 만난 레이몬드 카버, 이 작가가 슬슬 좋아지기 시작한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권두에 실린 서너편의 에세이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것이 궤변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자신만의 뚜렷한 작가론을 가진 작가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글쓰기에 대하여'와 '존 가드너:교사로서의 작가'에서 펼치는 담담하고도 줏대있는 목소리가 흐뭇했다.
앞으로 이어질 카버와의 만남이 매우 기대되는 바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완성 2004-10-29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맨 앞에 나온 단편 하나만 읽어봤거든요. 뚱뚱한 사람이 식당에 왔던..
뭔가 질척거리는 느낌이 들면서 재밌게 읽긴 했는데 책 뒤에 붙은 여러 유명인사들의 찬사가 너무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래서 덮고 말았는데..어째 알라딘 마을 안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흠, 그럼 한 번 제대로 읽어볼까..헤헤.

진/우맘 2004-10-30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견이 분분? ㅎㅎ, 어디선가 찬반 양론이 펼쳐지기라도? ^^
나는 좋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진짜 재미있어, 읽어봐!"라고 선뜻 권할 만한 작가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