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어느 대목에서 그 혼백이 내게 씌었을까.

"내 아모재나 업을 아비 보내리니 자진하지 말지라. 애고 내 아해야, 자진하지 말지라."던 서신 속 할미의 외침이 유독 생생하더니, 그 이후로는 줄창 책과 현실이 뒤섞여 들었다.
엷은 빙의였다. 상룡의 번뇌 속 짧은 행복에는 같이 웃고, 괴한들이 정실의 배를 짓이길 때는 언뜻, 손이 배 언저리로 가더니...... 결국 갓 태어난 생명을 밟은 그 통탄할 비정함 앞에서는 아이의 어미가 되어 울었다. 크게 울면 안 되는 것처럼, 아니, 어이없음에 크게 울 기력도 없는 것처럼 끄윽끅 속울음을 울었다.

소설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내 곧 읽을 것이므로 미리 김 빼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와중에, '정실'이라는 단어가 눈에 걸리면 막연히 처첩간의 애증이야기인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 이런 이야기인 줄 몰랐다. 이리도 가슴을 내리칠 줄 알았으면 미리 숨이라도 들이마셔 놓을 것을.
이 두 개의 생,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무슨 원죄라도 되는 듯 굴레를 벗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들을 보며 차마 여성의 삶 운운을 못하겠다. 남아선호나 뒤틀린 유교 사상을 입에 담기 전에, 빙의 체험으로 맥이 풀린 내가 보는 것은 허망함이다. 인생이, 누구에게나 인생은 가뭇 없이 불타버리는 얇은 편지처럼 허망한 것이라는 어이 없는 결론. 그것이었다.

작가는,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렸다 한다. 맹렬히 불타오르는 옛날식 정열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그래서 이 소설에 혹시라도 불쾌할 무리하고 과장된 부분이 있다면, 그 역시 작가가 추구했던 뜨거움의 일부로 용서해 달란다.
내게는, 무슨 검부러기처럼 일시에 사그라드는 결말이 불쾌했다면 불쾌했다. 그러나, 뭐 용서하고 자시고 할 입장이 되는가를 가릴 것도 없이, 그냥 용서하기로 한다. 그네가 말하고 싶었다는 정열의 뒷자락에서 언뜻, 그 쿨하다는 관계보다 더 시린 기운을 느끼긴 했지만....그렇게 뼛속까지 시린 것은 어쩌면, 데일만큼 뜨거운 것과 끝이 닿아 있는 듯 싶었다.

넘치는 리뷰다. 무슨 소리인지 해독하기 힘든 단어들이 그냥 소용돌이 치고 있다. 부끄럽지만, 그 소용돌이 자체가 어쩌면 제일 정직한 리뷰다.
오랜만에, 가슴 밑바닥까지 뒤흔드는 책을 발견한 것이다. 평소에는 쓰일 데 없어 마음 속 심해에 잠잠히 가라앉아 있던 갖가지 감정들이, 태풍 지나간 바다처럼 속속들이 뒤집혀 드러났다.
태풍이 뒤집은 바다에서는 모든 어종이 풍요롭게 자란단다. 이제 당분간 내 마음 속이 그러하겠지. 사소한 일상 하나도 더 굵고 여문 감정으로 돌아올 것이다.

책이, 이렇게 쓰일 때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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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8-19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리뷰가 장난이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까지 숨죽이게 하는군요. 추천합니다.
그나저나, 마태님께 선물받은 이 책, 빨리 읽어야 하는데...제가 요즘 읽을 책이 좀 쌓이는군요..엡엡.

진/우맘 2004-08-1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역시, 마냐님 밖에 없습니다.TT

마태우스 2004-08-23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있잖습니까. 추천 했으니 이뻐해 주세요.

진/우맘 2004-08-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조금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그간의 정리를 봐서, 이뻐해 드리지요.^^
역시, 마씨들이 짱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