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
현대 예술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는 게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의 전환이 시작된다. 예술 작품의 정보 구조를 우리는 둘로 나눌 수 있다. 가령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을 생각해보라. 우린 이 작품 속의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이게 바로 그 작품의 '의미 정보'다. 이제 이 내용을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나아가 그림 속에 보이는 형체들이 인물이며, 나무며, 들판이라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려라. 그럼 그림 속엔 순수한 형태와 색채만 남는다. 이게 바로 작품의 '미적 정보'다. 의미 정보를 중시한 고전 회화에선 형태나 색채가 주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 이제 현대 예술을 보고 '저게 뭘 그린거냐'고 물으면 실례가 되는 건 이 때문이다. 알겠는가?-4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