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심령학자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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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안개 긴 밤이었다. 서울 도심 곳곳에 벽이 나타났다."

서울 도심 한 복판에 갑자기 나타난 벽. 물리적인 현상이 아닌 '요새빙의'라는 형태로 도시 규모로 발생한 심령현상의 해결을 위해 시에서는 비상대책반을 꾸리고 '고고심령학자'들을 동원한다.

그들은 심령현상을 과거를 발굴하기 위한 도구로써 제한하고 심령현상 자체에 매몰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객관적인 자세로 관찰한다. 그래서 이른바 '유령'과 같은 심령현상이 일어나는 현장을 '발굴현장'으로 규정하고 철저하게 그 현상에서 객관적 관찰자의 자세를 유지하고 유령의 목소리를 통해 옛 언어나 복식 등을 찾아내도록 훈련받는다.

"그럼 발굴 원칙 숙지하고. 뭐뭐였죠? 개별 연구자가 될 것. 옆 사람을 적국 스파이라고 가정할 것. 자, 이제 오 분 전부터 조은수 학생 옆에 앉아 있던 5세기 혼령에 대해서 기록해보세요. 놀라는 건 상관없지만 손은 멈추지 말고."

역시 유령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야 제맛이라는 느낌. 이 책에서 유일하게 섬뜻했하게 놀랐던 장면. 이 마지막 현장실습 과정을 통해 처음 심령현상을 마주하게 되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심령학자로 학자의 길로 갈지 아니면 두려움에 굴복해 무속인(!)의 길로 들어설지 결정이 된다.

SF작품으로 특이한 제목의 '고고심령학자'라는 책이 눈에 들어온건 라디오의 책소개 코너를 통해서였다. 이영도의 '드래곤라자' 이후로는 국내 작가가 쓴 판타지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 편이라 '고고심령학자'라는 판타지 소설같은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손에 잡고 읽자마자 이야기속으로 빠져든건 무엇보다 재미있었고 '고고심령학'이라는 특이한 소재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분야에서 묵묵히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학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작은 천제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천문학자라도 어느 밤 권태에 지쳐 그 일을 함부로 내팽개쳐서는 안 됐다. 그가 보지 않으면 인류 저체를 통틀어 그 별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지 모른다. 하필 그 순간 그 천체가 무슨 특별한 신호를 발산하기라도 한다면, 불운하게도 인류는 그 신호를 놓치고 마는 셈이다.
고고심령학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의무를 지는 일이었다. 남들은 있는지도 모르는 의무였지만, 그만큼 책임감이 큰 임무였다."

그리고 그들은 '요새빙의'로 인해 모두가 파멸의 위험 앞에 서 있게 되었을 때조차 전문가로서의 마지막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리를 지킨다.

"대피해야 되는 건 다들 마찬가지잖아요. 모두가 대피해야 되는 재난 상황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해당 분야 전문가 몇 명은 현장을 지켜보고 있어야 되는 거니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분야 전문가가 우리다 보니. 빙의가 완성될 게 확실시되는 날인데 이 사람들이 달리 어디를 가겠어요?"

배명훈 작가는 심령현상이라는 빤해보이는 소재를 이용해 생각지 못한 시선으로 탄탄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를 영리하게 만들어간다. SF단편과 중단편을 꾸준하게 발표해 온 작가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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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18-07-25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작가의 작품중 춤추는 사신이라는 작품 읽어봤는데 어느 멸망하는 작은 나라에 말과 문자를 구사하지 않고 기묘한 몸짓으로 표현하는 사신이 등장하는데 읽다보니 테트창의 작품이 떠오르더군요. 한국sf작품중 이작가의 작품이 가장 세련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비가꾸는꿈 2018-07-26 01:46   좋아요 0 | URL
오, 꼭 챙겨서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