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부터 장장 4년간 부정기적으로 연재했던 알파벳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고작 이걸 이렇게나 오래 걸렸다니 확실히 추리소설 리뷰어로서는 집중력이 거의 사라졌나 보다ㅠ.,ㅠ 암튼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
가져주신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 또 이런 거대(?) 기획물을 쓸지 모르겠지만 곧 다시 만나요^.~
Villain - 악당
선정작 -
<서른 개의 관> by 모리스 르블랑
최종 후보작
- <시티즌 빈스> by 제스 월터
처음 이 알파벳 시리즈를 쓸 때부터 단어 수가 적은 'V'부터
'Z'까지가 난관이 될 것을 직감했는데 예상대로였다. 특히 V는 '빅토리'부터 '빅팀'까지 별의별 단어를 다 떠올려보다가 문득 추리소설 사상
최고의 캐릭터 하나를 소개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다름 아닌 도둑의 왕이자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일단 뤼팽을 낙점하고 악당을 뜻하는
'빌런'이라는 단어를 나중에 끼워맞춘 셈인데, 사실 뤼팽은 쓰리꾼, 빈집털이, 들치기 등을 전문으로 하는 도둑임에 틀림없지만 진짜로 독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악행을 저지른 적은 거의 없으니 본인이 악당으로 소개되는 걸 알았다면 조금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순수문학을 지향했으나
시쳇말로 영 뜨지를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바다 건너 영국에서 매부리코에 날카로운 인상의 명탐정이 신드롬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풍문을 듣자 그와 비슷한 추리소설로 한 재산 일굴 결심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똑같이 탐정을 등장시키는 건 작가로서 자존심이 상하니까
정반대인 도둑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무후무한 대도 아르센 뤼팽 이야기들을 쓰는데, 순수문학으로 갈고 닦은 유려한 필력에 멋진 캐릭터, 처음 써본
것치곤 의외로 재능 있었던 추리소설 플롯 역량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조국 프랑스에서 셜록 홈스만큼의 인기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 후 르블랑은
30년 넘는 세월 동안 20여 편의 뤼팽 시리즈를 쓰면서 애초 꿈꿨던 순수문학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지만 훈장도 타고, 영화 판권도
팔아서 백만장자도 되고, 세계적인 명사의 지위까지 얻었으니 펜 한 자루로 인생역전을 이룬, 개인적으로 참 부러운 양반이다ㅠ.,ㅠ 코난 도일보다
홈스가 더 유명하듯이 르블랑보다 더 유명한 인물은 당연히 아르센 뤼팽일 터. 범죄자이면서도 저열하지 않고, 바람둥이면서도 추잡하지 않은,
호쾌하고 낭만적인 괴도 이미지는 뤼팽을 삽시간에 문학계의 슈퍼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개인적으로 2-3년 전에 모 출판사의 뤼팽 시리즈 출간의 감수
일을 한 적이 있다. 금전적으로는 어디 가서 말하기 민망한 금액을 받고 몇 달간 집에 틀어박혀 7,000페이지 이상을 읽었는데, 꼭 돈을 떠나서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뤼팽 시리즈를 다 읽어볼까 싶어 기쁜 마음으로 일을 맡았었다. 그리고 얻은 깨달음은 다음부터는 절대로 돈을 떠나지
말자...가 아니고 생각보다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가 탁월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우리가 흔히 홈스는 추리, 뤼팽은 모험으로 거칠게 구분하기
일쑤였는데, 찬찬히 다시 보니까 플롯이나 트릭, 반전 등 추리소설로의 장치도 절대 홈스에 뒤떨어지지 않더라. 특히 내가 시리즈 최고작으로 꼽는
<서른 개의 관>은 신비한 섬에서 끔찍한 전설이 재현되어 무려 수십 명의 사람이 죽는 엄청난 사건에서 뤼팽이 천의무봉의 추리를
펼친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싶은, 다분히 환상적인 설정들도 전부 뤼팽의 명추리로 해결되는 걸 보면서 완전히 넉아웃 되는 기분이었다.
뤼팽 팬이라면 <수정마개>나 <기암성>의 모험소설 터치를 더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추리소설 팬으로서는 역시 <서른
개의 관>이 최고 걸작이다. 으스스한 분위기도 일품이니 이번 여름에 꼭 읽어보시길...최종 후보작에 뽑힌 <시티즌 빈스>는
뤼팽보다 더 악당 같지 않은 인물이지만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고, 꼭 많은 독자들에게 진가를 알리고 싶은 작품이라 넣었다. 사실 주인공 빈스가
신용카드 사기꾼이니 악당이라면 악당이 아니겠는가. 물론 앞에 小자가 붙겠지만. 마피아와 일하던 조무래기 사기꾼 빈스는 어쩔 수 없이 법정에 서서
마피아를 고발하고 새로운 신분을 얻는다. 범죄자로서의 과거를 잊고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곧 마피아의 킬러가 그를 제거하기 위해 빈스의 마을에
나타난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쫓기면서도 범죄자로서의 과거를 벗고, 온전한 시민으로서의 재생을 위해 대통령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한 빈스의
분투가 유쾌하면서도 눈물겹다. 민주사회에서 투표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올해 우리 국민들도 체감해봤으니 아직 안 읽어본 분들이 있다면 소악당
빈스의 시민으로서의 갱생기인 <시티즌 빈스>를 절대 놓치지 마시라.
Wife
- 아내
선정작 -
<레베카> by 대프니 듀 모리에
최종 후보작
- <나를 찾아줘> by 길리언 플린
원시시대에서 역사가 태동하면서 사회문화적으로 가장 달라진 건
아마도 결혼제도가 아닐까 싶다. 원시시대에는 동굴이나 기초적인 촌락 같은 곳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남편과 아내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공동으로 육아를 했을 듯한데, 요즘 장가 가기가 너무 힘들어 마흔이 다 되도록 혼자 사는 필자 입장에선 역시 옛날이 좋았어, 하며 담배를
빼어물게 된다. 지금 무슨 얘기를-_-;; 아무튼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서서히 결혼제도가 정착되면서 일부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일부일처의
문화가 자리잡게 되는데, 덕분에 예전에는 하지 않아도 좋았던 고민도 생겨나고 말았다. 결혼이란 게 마치 복권 뽑는 것 같아서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향후의 인생이 180도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결혼 전에 최대한 알아본다 한들 사람 속이 물 속처럼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도
아니니 배우자의 전모를 완벽하게 파악할 방법도 없다. 남녀를 통틀어 운 좋게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배우자를 만나면 그런대로 한 세상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천성이 음탕하거나 사치스럽거나 무능력하다면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는 셈이니까 결혼만큼 신중해야 할 것도 세상에 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이 좋은 사람인줄 알고 결혼했지만 알고 보니 무서운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는 오래된 동화 '푸른 수염' 같은 이야기는 결혼으로
시작되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여성들의 무의식적인 공포를 반영하지 않았을까 싶다. 가난한 고아 처지의 여자가 우연히 매너 좋고 재력 빵빵한
미남 귀족에게 끌려 결혼에 골인했다가 죽은 전처 '레베카'의 그림자에 온갖 고생을 하면서 영혼까지 탈탈 털린다는 <레베카>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히치콕의 동명 영화와 60년대에 만들어진 <새>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대프니 듀 모리에.
아무래도 여성 작가이기 때문인지 미묘한 심리 묘사가 일품인데, 보잘것없는 신분과 레베카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외모의 여주인공 '나(끝까지
이름이 안 나온다)'가 느끼는 전반부의 자격지심부터 서서히 레베카와 관련된 전모가 드러나는 후반부의 서스펜스까지 단 한순간도 독자들의 주의를
놓아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1930년대 작품답지 않은 레베카의 악녀 포스로 회상 장면조차 없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한
부부의 삶을 나락으로 몰아놓는 대단히 지능적이고 현대적인 캐릭터다. 고딕 로망스처럼 시작하지만 한 구의 시체가 등장하면서부터 탁월한 범죄
추리소설로 전환하는 <레베카>에서 작가가 여주인공의 이름을 보여주지 않는 건 왜일까? 꼭 (이름이 있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더라도,
그 어느 누구도 결혼으로 인한 고초를 겪을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여자가 잘못된(?) 결혼으로 인해 고초를
겪는 소설을 소개했으니 공평하게 이번에는 남자 편으로. <나를 찾아줘>는 불륜을 저지른 남편이, 본인 생각보다 아내가 훨씬 더
무시무시한 인물이었음을 점차 알게 되는 과정이 일품인 스릴러다. 소설도 꽤나 베스트셀러였으며, <레베카>처럼 영화로도 만들어져 대단한
흥행을 기록했다. 가정생활에 얽힌 범죄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른바 '도메스틱 스릴러'의 선구자격인 작품으로 비슷비슷한 플롯의 유사작들이 쏟아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아내가 아니라 그 역전구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요즘 인기 있는 페미니즘의 영향을 타고
히트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독서시장의 주된 손님이 여성들이라 이러한 유행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X-file - 엑스파일
선정작 -
<망량의 상자> by 교고쿠 나쓰히코
후보작 -
<염매처럼 신들린 것> by 미쓰다 신조
본격적으로 억지를 부릴 순간이다. 도저히 X로 시작되는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연전에 대히트한 드라마 <엑스파일>을 가져왔다. 드라마가 하도 흥행해 '초자연적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일에
대한 문건'을 뜻하는 보통명사화됐기에 떳떳하게 사용한다. 우겨봐야 억지라고요-_-? 하여튼 초자연적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일이라면 UFO나
외계인, 초고대문명, 초능력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유령이나 요괴 등이 과연 실존할까 하는 것일 터.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넘어, 우리 주변에서 때로는 도움을 주고, 때로는 징벌도 가하는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으니
도깨비부터 갓파, 강시, 악마, 뱀파이어, 미이라 등 국적을 불문하고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이야기가 발견된다. 그래도 역시나 유령이나 요괴
이야기의 챔피언 나라는 뭐니뭐니 해도 일본이 아닐까 싶은데, 요괴의 나라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수천 개의 요괴가 오늘도 아이들의 악몽 속에서
활약(?)하고 있단다. 이렇게 요괴가 인기 있는 나라이다 보니 아마추어 요괴 연구가도 많은 게 당연지사. 아무래도 뭐 하나에 꽂히면 상상을
초월하는 오타쿠의 나라답게 요괴 오타쿠도 없으면 이상할 텐데, <망량의 상자>의 작가 교고쿠 나쓰히코가 바로 유명한 요괴 오타쿠이다.
원래는 책표지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지만 취미로 써서 투고한 <우부메의 여름>과 후속작 <망량의 상자>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지금은 요괴를 소재로 한 기묘한 추리소설의 1인자로 우뚝 섰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워낙 인기가 있어 자세한 소개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만, 추젠지 아키히코라는 퇴마사(?), 범인의 과거가 그냥(!) 보이는 장미십자탐정 에노키즈, 화자 역할을 하는 괴기소설가
세키구치 등이 요괴의 소행으로만 보이는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조사해나가는 절륜한 재미의 추리소설 시리즈다. 모든 시리즈의 제목에 그 책의 핵심
테마인 요괴 이름이 등장하며, 온갖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굴비 꿰듯 한 달음에 주르륵 꿰어지면서 진실이 드러나는 후반부의 진상 풀이 장면이
트레이드마크. 특히 명작은 <망량의 상자>로 열차 사고 때문에 온 몸이 토막난 소녀와 머리를 들고 다니는 남자, 정체불명의 연구소가
독자들의 혼을 온통 빼놓는데, 거기 더해 주인공 추젠지는 요괴에 대한 잡설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 읽다 보면 대략 정신이 아득해진다.
어렵게어렵게 후반부까지 읽으면 추젠지의 사건 풀이가 보상처럼 주어지는데, 너무도 놀라운 진상이라 그야말로 압권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배경인
1950년대에 비해 지나치게 발달한 과학이나 여러 요소들을 볼 때 리얼리즘에 기반한 추리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캐릭터성이
강한 재패니메이션이나 전기소설 등의 요소가 짙다. 1990년대 후반부터의 라이트노벨 열풍에도 직접적으로 기여한 현대 일본 추리소설의 정점으로
저자의 건강 악화 때문에 후속작들의 출간이 더딘 게 아쉬울 따름이다...교고쿠 나쓰히코의 대성공으로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제법
나왔는데, 역시 요괴전문가 탐정을 등장시킨 미쓰다 신조만큼은 단순히 교고쿠 아류작이라고 부른다면 많이 섭섭할 것 같다. 방랑 환상소설가 '도조
겐야'가 교고쿠 시리즈와 비슷한 시대적 배경인 1950년대의 일본 오지를 돌아다니면서 <산마처럼 비웃는 것>,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등 제목마다 이름이 들어간 요괴와 관련된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 시리즈(쓰고 보니 교고쿠 판박이잖아-_-;;)도 교고쿠
못지않은 수준급의 추리소설들이기에. 밀실 강의나 추리소설에서 목 잘린 시체가 등장하는 이유에 대한 강의를 작중에 넣는 등 교고쿠보다는 정통적인
본격 추리소설에 가까우며, 저자도 캐릭터보다는 추리소설적인 트릭에 더욱 집중하는 눈치이다. 특히 교고쿠 나쓰히코 특유의 살인적인 수다가 없으니
교고쿠 '순한 맛'이라고나 할까, 추리소설 팬들이라면 읽기 훨씬 편하다. '염매'라는 귀신이 무려 십여 명 이상 등장하는 엄청나게 복잡한
추리소설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은 플롯이 복잡한 만큼 해결이 짜릿해 감히 일독을 권한다.
Yesterday - 과거
선정작 -
<장미의 이름> by 움베르토 에코
최종 후보작
- <핑거스미스> by 세라 워터스
예스터데이라고 해서 '어제'라는 뜻보다는 좀 더 광의의
의미인 '과거'를 사용했다. 과거, 즉 역사를 소재로 한 추리소설은 장르의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쭉 인기가 있었다. 아무래도 고대 이집트나
당나라, 고대 로마 등 이국적이고 근사한 배경을 등장시키기도 좋고, 시저의 암살이나 십자군 전쟁 등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현장감 있게
묘사할 수도 있어 역사에 흥미가 깊고, 또 웬만큼 역사적 지식도 가진 추리소설가라면 꼭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토 에코 또한 지식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양반이라 돈도 벌고, 학식 자랑도 할 겸 역사 추리소설을 한 권 썼는데 이 작품이
그 유명한 <장미의 이름>이다. 가톨릭의 위세가 정점에 달했던 중세시대, 가상의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배스커빌
사람 윌리엄과 제자 아드소. 그들은 (하느님이 천지창조에 걸린 시간인) 딱 일주일 동안 묵시록과 유사한 형태로 살해당한 네 수도사의 죽음을
밝혀낸다. 윌리엄이 '배스커빌' 사람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일종의 셜록 홈스 패스터시이기도 한데, 윌리엄은 당시 기준에서 과학수사를 신봉하며
무려 로저 베이컨의 제자답게 '귀납법'과 '삼단논법' 등의 추리법을 보여줘 완전히 과거판 셜록 홈스이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제자
아드소는 당연히 왓슨 역할을 맡는데, 사부 윌리엄은 홈스보다는 인간미가 더 있고 따뜻한 성품이라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제자에 대한 여러
배려들이 흐뭇하게 느껴진다. 추리소설로서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단순히 추리소설로만 평가하기에는 들어간 노고가 좀 아깝다. 종합 지식인답게 교권과
속권이 충돌한 당시의 역사적 배경, 기독교파 사이의 이단 논쟁, 수도원의 세밀한 묘사와 중세인의 생활상 등 모든 부분에서 배울거리가 넘친다.
물론 추리소설의 플롯을 더 좋아하고 집중하는 나로서는 제발 수도원 기둥 묘사보다는 용의자에게 데려가달라고, 하면서 비명이 절로
나오긴 했다만 참고 읽으면 절로 지식이 늘어감을 인정할 수밖에 없긴 하다. 유독 소설책에서도 지식이나 지적인 느낌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독서시장에서는 이러한 점이 특히 잘 먹혀 이미 교양인 필독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기호학이나 중세사에 큰 관심이 없어
교양서로의 가치는 잘 모르겠지만 흥미진진한 역사 '추리소설'로서의 매력만큼은 보증한다...최종 후보작인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는
작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이다. <핑거스미스>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배경으로 했다면,
<아가씨>는 일제시대랄까. 주인 아씨와 하녀의 이야기가 중심축이라는 건 두 매체 다 비슷하고, 이야기 전개의 3분의 1까지는 완전히
똑같은 진행이다. 하지만 정신병원과 관련된 첫 번째 대반전이 펼쳐지는 순간부터 영화와 원작은 다른 길을 가는데, 내 기준으로는 원작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첫 번째 기함했던 반전과 같은 수준의 놀라운 반전이 두 번이나 더 펼쳐져 그야말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물론 <아가씨>도 다른 부분에서 예술적 성취를 거둔 구석이 있겠지만 이야기의 재미만큼은 원작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영화만 보신 분들도 이참에 꼭 원작을 읽어보시길. 저자 세라 워터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레즈비언, 도색소설 등을 연구한 학자로서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을 주로 쓰고 있으며 매 작품마다 높은 완성도로 갈채를 받고 있는 주목할 만한 소설가이다.
Zonk
- 취하다
선정작 -
<800만 가지 죽는 방법> by 로렌스 블록
최종 후보작
- <밤의 파수꾼> by 켄 브루언
Z도 마땅한 게 없어서 영어사전을 뒤적였다. 'zonk'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가 술이나 약에 '취하다'라는 뜻이라 술에 관한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중국 같은 곳에서도
곡주의 유적이 발견될 정도로 오래 됐으며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인류의 충실한 친구로 늘 함께 해왔다. 특히 동서고금의 작가들은 거의 대부분 술을
좋아했는데, 글밥을 암만 먹어봐야 출세와는 큰 인연이 없으니 호의호식과도 거리가 멀기 마련. 그저 부실한 안주에 애꿎은 술병만 붙들고 고달픈
처지를 한탄하며 그나마 시름을 잊는 게 유일한 호사렷다. 만약 운이 좋아 돈푼이나 만지는 작가가 됐다면 그때는 괜찮은 안주에 맛 좋은 술로
대취해서 흥 깨나 누리며 살아갈 테니 역시 술이 빠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술에 취한 몽롱한 상태에서 보는 환상 같은 것들이 작품
아이디어에도 도움이 될 수 있어 그런 면에서도 술병을 놓을 수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작가만큼 술을 좋아하는 인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작가들이 이렇게 술을 좋아하니 작가들이 쓰는 소설에도 술이 많이 등장할 수밖에.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수십 편의 추리소설을 쓴 로렌스 블록도
술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작가이다. 작가의 대표적인 시리즈 캐릭터인 매트 스커더가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으며 사건들을 해결하는 초창기 시리즈들이
특히 그러한데,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책장에서 술 냄새가 날 정도로 술 얘기가 넘쳐난다. 전직 경찰이었던 알코올중독의
사립탑정 매트 스커더는 술에 취하면 더욱 감상적이 돼서 뉴욕 시민 800만 명, 그 하나하나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오직 술병 하나만을
의지하며 고독하게 도시를 방랑하는 하드보일드 탐정 캐릭터는 매트 스커더 이후 하나의 원형으로 굳어졌는데,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나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같은 인기 캐릭터에서도 비슷한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매트 스커더는 후기 작품들에서 술을 끊는데,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흥미가 좀 떨어지는 걸 어쩔 수 없더라...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술맛을 돋군 추리소설은 최종 후보작인 <밤의
파수꾼>이다. 아일랜드 추리소설가 켄 브루언의 작품인데, 개인적으로 이 작가가 현재 알코올중독이거나 한때 중독이었다는 데 100만 원도 걸
수 있다. 그만큼 알코올중독자 특유의 기이한 언행이나 또다시 술에 취해 모든 걸 망치고 말았다는 자괴감, 버티고 버티다 끝내 술의 유혹에
무너지는 모습 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 사립탐정 잭 테일러가 여고생의 자살사건을 조사하는 이야기인 <밤의 파수꾼>은 추리소설의
플롯보다는 알코올중독자의 내면에 더 집중했고, 흥겹게 술에 취한 아저씨의 어마어마한 유머들이 쏟아진다. 책장을 덮자마다 혼자서(!) 술집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진귀한 경험을 하게 해준 책이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술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애주가로서 따뜻하고 흥겨운 술자리 속에서 범인에 대한 단서를 잡는다거나 추리를 완성시키는 등 즐거운 알코올 미스터리를 봤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