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열렬히 시청했던 <신돈>의 종영이 한달 앞으로 다가와 정확히 9회분 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슬슬 출연진이나 작가, 연출진 모두  숨가쁘게 달려온 말에서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네요.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애청했던 팬으로써 아쉬움이 큽니다. 현재까지 50회를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큰 실망을 주지 않았고, 그 완성도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던 대단한 드라마였습니다. 제가 그동안 드라마를 즐겨보면서 김수현이라는 이름만 알았었는데, 이번에 정하연 님을 새로 알게 된 게 가장 큰 수확인 것 같습니다. 그 정도 베테랑 작가님의 진가를 이제야 알아보노라고 부끄럽게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1+1이 언제나 2가 된다면 그것은 예술 작품이 아닐 것입니다. 1+1의 답이 3이 될 수도 있고, 1,000이 될 수도 있음을 <신돈>은 보여주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신돈>은 이미 고정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도 비할 데 없는 상상력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로 우리에게 역사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해석이 참신합니다. 예를 들어, 간절히 회임을 원하는 노국공주를 부추긴 건 초선입니다. 초선은 자신이 사모하는 신돈의 마음이 노국공주에게 쏠려 있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3년 기한으로 암자에 은거한 신돈이 노국공주의 부탁으로 인해 1년만에 나오게 된 걸 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거죠. 노국공주에게 임신의 비책을 알려주고, 약까지 갖다주며 정성을 다하는 초선의 모습에는 노국공주에 대한 질투가 깔려 있습니다. 임신을 하면 필연적으로 죽게 되는 노국공주를 제거하고 싶었던 거죠. 게다가 만에 하나 출산에 성공을 하면 자신이 사모하는 신돈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굳건해집니다. 그녀는 노국공주의 임신을 부추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기존의 사극이라면 초선은 단지 노국공주에 대한 봉건주의적 충성심 때문에 임신의 비책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려졌을 겁니다. 드라마 <신돈>에서는 인물의 행동에 더욱 그럴싸한 이유를 제공함으로 한층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질투와 정치적 성공이라는 이중의 이유가 초선에게 더해짐으로써 그 인물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더욱 공감가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이라는 낡은 시대를 그리고 있지만, 이 작품의 역사 해석 및 인물 해석은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최영이라는 인물도 그간의 충성심 강한 장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는 왕이 정치적 이유로 정변을 유도해 정적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으며, 군부의 수장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지키는데도 여념이 없습니다. 악역인 김용마저도 단순한 악의 화신이 아닌, 자신보다 다른 신하를 더욱 편애하는 왕에 대한 애증이 폭발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왕을 죽이려 흥왕사의 난을 일으키면서도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지금까지 왕을 죽이려는 역신의 눈물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사극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악역이라고 언제나 사람을 죽이는 생각만 할까요? 그들도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압니다. 김용의 눈물은 감히 말해 사극의 새로운 지점을 밝혀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공민왕은 지엄한 왕의 신분이면서도 약한 자신의 처지에 괴로워하고, 눈물을 자주 흘립니다. 다정다감한 노국공주는 그 누구보다, 심지어 왕보다 더 강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어요. 타이틀롤인 신돈은 핍박받는 백성을 구하는 수호자이지만, 미천한 자신의 신분에 강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개혁의 와중에 입만 열면 뱉어내는 '노비의 자식'운운은 신분에 컴플렉스를 가진 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듯 <신돈>에서는 종이장처럼 얇은 인물이 없습니다. 모두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정말로 우리 주변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드라마 <신돈>의 성과는 너무 많습니다. 그동안의 드라마에서 고승이랍시고 나오는 인물이 '나무아미타불'만 지껄이기 일쑤였는데, 여기 나오는 월선 스님은 정말 고승의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썩어빠진 세상에 절망하며 부처님을 원망하는 신돈에게 월선 스님은 이런 말을 남깁니다.

"부처님께서도 꿈을 꾸신게야. 설마하니 부처님께서 아름다운 세상이 그리 쉽게 오시리라고 생각했겠느냐. 부처님께서도 꿈을 꾸신거지. 그 꿈이 아름다우니 사람들도 그 꿈을 믿고 의지하는 게 아니겠느냐. 천년의 세월을 기다렸는데, 다시 천년을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무에 있겠느냐."

드라마에서 들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명대사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꿈을 꾸셨다, 이거야말로 고승의 화두에 손색없는 말씀입니다. 이건 어느 문학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신돈>의 출연진들도 자신들이 일생일대의 작품을 하고 있는 걸 잘 알고 있는 듯 보입니다. 모두들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돈 역의 손창민과 공민왕의 정보석은 올해 말 연기대상 심사위원들의 선택을 어렵게 하기 충분합니다. 두 분 모두 당대 제일의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어요. 노국공주 역의 서지혜는 이 작품 최고의 발견입니다. 신인 여배우에 불과한 서지혜가 이 정도의 연기력을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지혜는 드라마가 정체기에 빠져 있을 때마다 한방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반전시켜 왔습니다. 이것은 각본이 아무리 좋아도 연기자가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차려진 밥상을 놓치지 않고 똑 따먹는 감각이 있는 배우로 앞으로 더욱 대성할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신돈>의 인기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도 대단한 스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아 있습니다. 영리하고 근성이 있는 배우니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들 공감하다시피 <신돈>의 미술과 세트 등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드라마가 연극은 아니니 볼거리도 무시못하는 법인데, <신돈>을 보면 일단 눈이 즐겁습니다. 되도 않는 싸구려 소품과 세트로 빈축을 샀던 모 방송국의 사극과는 상당히 비교됩니다. 이렇듯 <신돈>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최선을 선보였습니다. 이 정도의 작품은 운때가 맞아야 나오는 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이 작품을 정하연 선생이 아닌 다른 분이 썼더라면, 손창민 씨가 신돈 역을 고사했더라면 우리가 보는 <신돈>은 없었을 것입니다. 뭐가 되려니까 하늘이 도운 셈이죠.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방영되는 시점에 열혈팬이었다는 사실은 자랑스럽습니다. 처음으로 드라마의 커뮤니티 사이트도 방문해봤고, 그 분들에게도 큰 애정을 느꼈습니다. 비록 떵떵거리며 잘 나가는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욱 이 드라마의 팬들은 서로 더 아껴주며 깊이 공감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돈>을 응원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역시 시청률 20%의 장벽을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100명을 초대해 마음껏 먹고 배를 채우라는 잔치상에 20명 밖에 오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좀 답답합니다. 100명이 아니라 1,000명도 즐길 수 있는 이 기름진 잔치에 왜 오지 않을까 하고 말예요.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결국 잔치의 진가를 아는 20명이 실컷 즐기는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우리는 잔치에 오지 않은 80명을 비웃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포함한 20명에게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잔치도 <신돈> 정도면 할 만 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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