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로보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민서각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몇년 전에 영화화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화이트 아웃>의 원작자, 심포 유이치의 작품 <스트로보>가 출간되었습니다. 사진가가 주인공이고, 사진을 소재로 한 다섯 편의 연작 단편을 모은 단편집인데 재미있는 시도가 있습니다. 사진가가 쉰살이 되는 첫 번째 단편부터 시작해 마흔 두살, 서른 일곱 살의 모습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리고 있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사랑한 우리 영화 <박하사탕>과 비슷한 구조로 보시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각 단편의 제목을 소개해 드리면...

제5장 영정| 50세

제4장 암실 | 42세

제3장 스트로보 | 37세

제2장 한순간 | 31세

제1장 졸업 사진 | 22세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진을 소재로 한 단편집이라 읽으면서 그동안 찍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아르바이트한 돈을 탈탈 털어 무려 비행기를 타고 강릉에 놀러갔다가 돈이 떨어져 비참한 2박3일을 보냈던 일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밤새도록 강릉 바다만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낡이 밝아 해가 떴습니다. 모두 해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그 감흥에 빠져 있었는데 마침 뒤에 있던 친구 녀석 하나가 해를 바라보는 우리 일행의 뒷모습을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사진은 찬란한 아침 해를 보며 저 높이 떠오르는 붉은 태양처럼 희망찬 미래를 다짐하는 남자들의 뒷모습이 멋지게 담겨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사진 몇 장쯤은 찍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가도 사진은 남습니다. 그 사진을 보며 가끔 흐뭇하게 미소짓고, 때로는 눈물짓기도 하지요. 그러고 보면 오래된 앨범 속에 꽂혀 있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스트로보>에도 그런 감동이 있었습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핵심이 되는 사진 한 장이 있고, 그 사진에 담긴 비밀이 풀리는 결말에서는 눈물 한 방울이 눈에 저도 모르게 고이게 되더군요. 작가인 심포 유이치가 가장 신경쓴 부분은 역시 감동과 재미인 것 같습니다. 매 에피소드마다 사진을 매개로 한 감동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억지스럽거나 과장되지 않은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감동입니다. 더 파고들면 눈물의 홍수를 만들어낼 수 있을만한 장면에서도 작가는 살짝 멈추고 숨을 고릅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사진 한 장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설교조나 가르치는 듯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고요. 사진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는 정도로 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소품의 느낌이 나지만 사실 소설(小說)은 소설이지 대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가 좋습니다. 섭씨 100도로 들끓는 작품이 아닌 인간의 체온과 같은 섭씨 36.5도 정도의 따스하고 안온한 기분이 드는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소설가로 유명한 작가답게 미스터리적인 재미를 주는데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각 단편들은 모두 일정한 미스터리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자 사진으로 일가를 이룬 주인공의 사진 선배가 어느 순간부터 여자를 찍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주인공과 독자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이 작품에는 그런 일상사의 미스터리에도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작가가 직접 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네요.

 

또한 다섯 장면에는 모두 일종의 수수께끼를 설정해보았습니다. 다만 무엇이 사라졌다거나, 누가 수상한 인물인가 하는 그런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살인이나 불가사의한 사건을 만나게 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되돌아보면 이상하게 보였던 사람의 행동에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 이면에 그 사람의 숨은 본심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도. 시각을 바꾸면 이런 상황들은 충분히 미스터리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가장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무리 없는 미스터리가 되는 게 아닐까.

 

살인이나 실종 등의 범죄가 나와야만 미스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불가해한 것은 사람이 아닐까, 그런 불가해한 사람과 불가해한 행동을 그려보는 것도 좋은 미스터리가 될 수 있다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갑니다.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라 누가 보셔도 크게 후회하지 않을 연작 단편집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위에 적은 것 같은, 남들이 들으면 하나도 재미없지만 저에게는 큰 의미로 남아있던 사진에 대한 기억까지 떠오르게 만든 잊지 못할 작품이었습니다. <스트로보>를 읽고 옷장 깊숙한 곳에 쳐박아 두었던 앨범의 먼지를 탈탈 털고 지난 추억에 잠겨보시는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진이란 참 좋은 거예요."

히로에가 사이드보드 쪽을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구로베가 글라스를 손에 든 채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바로 그리운 옛날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걸."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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