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문
렌죠 미키히코 지음, 김현희 옮김 / 더블유출판사(에이치엔비,도서출판 홍)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제목인 <연문>은 한자로 戀文이라고 씁니다. 사모하는 글, 즉 연애편지를 말하는 거지요. 제목 그대로 아름답고 그만큼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다룬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84년 제 91회 나오키 상 수상작이고, 이듬해 영화화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2003년에 드라마화되서 다시 한 번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하네요. 그만큼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서는 잊을 수 없는 연애소설의 고전으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연애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연문>만큼은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연문>에 실린 첫 번째 작품은 제목과 같은 의미인 <러브레터>입니다. 철없는 연하의 남편을 둔 아내가 있습니다. 장난을 잘 치는 남편은 어느날 평소처럼 가벼운 말투로 말합니다. '미안해'라고..그 말을 남겨두고 남편은 떠납니다. 알고보니 남편이 결혼 전 사귀던 여자가 백혈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고, 그는 그런 그녀의 곁을 보살펴주기 위해 떠난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그 일을 계기로 병든 남편의 옛애인을 만나게 되고, 뜻밖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 사이가 됩니다. 이 작품은 연애편지와 그것에 쓰인 사랑의 의미를 묻고 있습니다. 사랑은 정말로 상대방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자유를 줄 수 있는 용기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지껏 본 가장 눈물나는 러브레터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붉은 입술>은 정말 좋은 작품입니다. 아내를 병으로 잃은 중고차 판매점 직원에게 장모가 찾아옵니다. 아내가 죽음으로 해서 인연이 끝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튼튼한 장모는 씩씩하게도 집안일을 도맡아하며 옛사위의 삶에 침투합니다. 옛사위가 새로 사귀는 여자를 품평하기도 하며 훼방을 놓기도 하지요. 기묘하지만 따뜻한 관계가 지속되다가 남자는 장모의 옛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사랑 이야기가 붉은 입술 연지 하나를 매개로 교차하며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줍니다. 머리속에서 구체적으로 장면을 그려보면 엄청나게 눈물나는 작품이지요.

 

<13년 만에 부르는 자장가>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재혼한 어머니의 새남편은 주인공보다 3살이나 어린 32살. 당연히 주인공은 그를 싫어하지요. 하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붙임성 좋고 싹싹한 새남편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새남편은 주인공의 속도 모르고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부탁합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요. 묘하게 아버지라는 이름에 집착하는 새남편과 주인공의 가족사와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이 펼쳐지다 따뜻하게  마무리됩니다.

 

<피에로>는 아내를 위해 언제나 헌신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늘 남을 웃기는 걸 좋아하는 친절하고 재미있는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합니다. '난 괜찮아.'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서서히 외로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자신이 다른 남자를 만나 바람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서도 남편은 '난 괜찮아'로 일관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의 의미와 가치를 잃고 나서야 깨닫는 안타까움의 정서가 작품을 지배합니다. 늘 소중한 건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아는 법이니까요...

 

마지막 작품인 <재회>는 감정이 고장난 사람을 제외한 독자 모두를 눈물나게 만들 애절한 사랑이야기입니다. 성공만을 쫓는 불나방같은 인생을 사는 카메라맨 주인공을 그의 사촌 누이는 사랑합니다. 남자가 아직 어른이 되기 전, 거짓말만 만들어내는 어른이 되기 전부터 그를 알았던 사촌 누이는 마침내 사랑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친척이고 결혼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눈을 피해 평생 도피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공의 꿈을 꾸는 남자는 받아들일 수 없었죠. 누이는 남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합니다. 다섯 장의 사진을 남기고 떠나간 누이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3년 뒤에 사망합니다. 20년이 지나서야 주인공은 다섯 장의 사진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숨겨야 했던, 하지만 너무도 알리고 싶던 사랑의 의미가 담긴 사진을 말입니다.

 

이상 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좋습니다. 작가 렌죠 미키히코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는데 감탄에 감탄을 곱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다섯 편의 작품 모두 특색이 있고, 기품이 있습니다. 원래 추리소설작가로 데뷔했던 사람답게 작품마다 나름의 미스터리를 깔아두고 있습니다.(사람이 죽거나 하는 범죄적인 것이 아닌, 인생과 사랑의 미스터리를 말입니다.) 주인공들의 행적에 알수 없는 미스터를 깔아둠으로 독자의 호기심과 집중력을 이끌어가다 결말에 이르러 모든 비밀이 밝혀지면 둔중한 감동의 망치로 가슴을 세게 때립니다. 깊은 여운과 넓은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진짜 감동을 만들어내는 진짜 작가입니다.

 

<붉은 입술>에서 장모의 사랑을 상징하는 반딧불이를 도시의 자동차 불빛으로 형상화낸 대목이나, 슬롯머신 유리창에 비친 눈물의 의미를 말하는 대목은 쓸쓸하고 삭막한 도시 생활에 윤기를 주는 명장면들입니다. <재회>에서의 다섯 장의 사진은 눈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그려지고요. 원래 시나리오를 공부했다는 사람답게 활자를 마음 속의 영상으로 바꾸어 주는 마술사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들이 영화화되고 드라마화되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의 관찰력과 감수성, 상상력에 모두 경의를 표합니다. 작가 후기를 읽어보니 자전적인 이야기도 있고, 부모님의 이야기, 실제에서 약간 부풀린 이야기들이 섞여 있지만 전부 현실 속에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공의 이야기가 아닌 실제의 이야기가 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작가 렌죠 미키히코는 1948년생으로 원래 <戻り川心中>라는 추리소설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언급한 작품은 일본추리소설의 걸작 리스트에서 항상 상위권에 위치하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연문>같은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도 기품있게 잘 쓰시네요. 이런 작가의 작품을 더 볼 수 없다는 건 진짜 비극입니다. 겨우 단편집 하나 읽고 좀 너무 나갔다 싶은 생각도 있지만 이분이야말로 현재 일본 최고의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분간 이 생각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네요...

 

 

 

작품 속에 나온 몇 마디의 대사들은 실제로 현실 속에서 제가 직접 들은 것들입니다. 이 책은 그렇게--- 제게 소박하지만 멋진 명장면과 명대사를 주신 만만찮은 아마추어 명배우들에게 제가 보내는 '러브레터입니다.'

 

- 렌조 미키히코 (작가의 말 중에서)

 

 

그럼 난 보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여자를 울릴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이 내가 할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을 전하는 그런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까?... 술 취한 눈에 비치는 하얀 원고지가 마냥 눈부시기만 하다.

그래, 하고 머릿속에서 번쩍인다. 그것을 하면 된다, 나를 울렸던 <재회>를...

"렌죠 씨, <재회>를 주세요."

이것이 바로 원작자에게 보내는 엉터리 시나리오 작가의 '러브레터(戀文)'입니다.

 

- 시나리오 작가 아라이 하루히코  (작품 해설 중에서)

 

 

올 겨울은 유난히도 따스했다.

하지만 느지막히 찾아온 추위는 싸락눈을 찬바람에 태우고 살며시 이 도시에 내려앉았다.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쌓이지는 않았지만

1월의 눈송이가

조용히 땅 속으로 녹아 스며들었듯 러브레터(戀文)의 감동도 그렇게 오래도록 스며들 것 같다.

 

- 옮긴이 김현희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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