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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무게 1
케빈 길포일 지음, 이옥용 옮김 / 북앳북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2006년에 출간된 <그림자의 무게>는 케빈 길포일이라는 미국 작가의 처녀작으로 그야말로 완전히 묻힌 책이다. 아마 국내 장르소설 중에서 비교적 인기가 적은 SF 설정이 깔려 있어 그런 게 아닐까 짐작되는데 일독의 가치가 분명히 있는 책이라 예전부터 아쉬웠었다. 출판사는 문학수첩의 성인 브랜드인 '북앳북스'. <해리 포터>로 대성공해서 그런지 이곳은 주로 영미권의 책만 내는데, 당시 참신한 데뷔작으로 각광을 받고 있던 케빈 길포일도 국적 덕분에 문학수첩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 같다. 전체 680쪽의 분량이라 분권을 했는데 아마 독자들이 분권을 싫어하는 요즘 나왔다면 분명히 비난을 받았으리라. 개인적으로는 분권을 해서 사랑받은 책도 있고, 만약 분권으로 판매가 망한다 해도 그것 역시 출판사의 선택이라 크게 투덜대지 않는 편이지만 독자들의 기호가 단권에 있다면 귀 기울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뭐니뭐니 해도 지갑 여는 사람이 갑 아니겠는가.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읽어본 이 책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전에 읽었을 때만 해도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성인끼리의 경우에 한정하여 남자는 모두 반말, 여자는 모두 존댓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번역자가 여성이었음에도 자연스럽게 이랬던 걸로 알 수 있듯이 10년 전만 해도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첫 출판사에서 이런 것도 무의식적인 남녀차별이라며 반기를 든 여성 편집자로 인해 번역 말투에 관한 회의를 열었던 기억도 난다. 새삼 세월은 많은 걸 변화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말투도 변하고...
<그림자의 무게>는 이른바 '하이 콘셉트'가 빛나는 책이다. 그게 뭐냐 하면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할 때 과연 독자에게 먹히는 쌈박한 게 있느냐는 것인데, '공룡 화석 속에서 공룡의 피를 빤 모기를 채취해 그 DNA로 공룡을 현대에 부활시킨다. 하지만 관광 상품화된 공룡이 탈출해 온 세상이 쑥대밭이 된다.'는 한 줄 줄거리라면 아마 어느 누구도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이 책의 하이 콘셉트 역시 간단하지만 매우 효과적이다. '딸을 살해당한 복제 전문 의사가 우연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범인의 DNA를 얻게 된다. 딸의 살인자를 찾기 위해 의사는 불법으로 범인을 복제하고, 복제당한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주변에서 관찰한다. 이 아이가 성인이 되면 살인자의 얼굴과 똑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초반 100쪽 안에 이런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제시되는데 어찌 읽기를 중단하겠는가. 요약된 줄거리 몇 줄만으로도 책을 집어들게 만드는 힘, 이게 바로 하이 콘셉트의 궁극적인 역할일 테고 그런 면에서 <그림자의 무게>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내 생각에 비록 뒤의 이야기는 바꾸더라도 초반 설정만큼은 우리나라에서도 영화화를 시도해볼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듯하다.
이야기의 진행은 여타의 미국식 스릴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1, 2, 3...식으로 숫자를 붙인 짤막한 챕터들이 나열되며 2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것이다. 하드보일드나 본격 추리소설을 보면 철저하게 주인공이나 관찰자의 시점에서만 그들의 눈에 비친 풍경들이 제시되며 시공간 이동도 어느 정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스릴러는 짤막한 챕터마다 A에서 B로 자유자재로 등장인물이 전환되며, 배경도 뉴욕이었다가 바로 다음 장에서 시카고로 이동하는 등 그 제약이 덜한 편이다. 혹시 이런 형태를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씬 넘버가 있는 짤막한 챕터, 등장인물과 시공간 배경의 유연한 변화... 바로 영화 대본 말이다. 내 생각에 할리웃 영화는 19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을 넘어 전 세계까지) 엔터테인먼트의 확고한 기준이 되었고, 범죄소설 작가들 역시 그 영향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받아들여 스릴러 소설이 영화 대본의 형식과 비슷해진 게 아닌가 추측된다.
강력한 초반 콘셉트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림자의 무게>는 의외로 느긋한 페이스를 보인다. 특히 사립탐정들이 어쩌다 사건에 끼어들어 헛다리를 짚는 장면들은 분량도 만만찮고, 내용 진행상 곁가지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굳이 전개에 비효율적인 이런 장면들을 추가했을까. 물론 분량이 늘어나야 200페이지 책이 300페이지가 되고, 20달러 하드커버를 30달러에 팔아먹을 수 있는 마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좀 잔인하게 농담한 말이고, 실은 마땅히 작가적인 야심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락적인 재미에 방점을 찍은 다른 스릴러와 달리 <그림자의 무게>의 주제는 제법 진지한 편인데, 아무래도 인간 복제가 주소재이다 보니 복제를 감행한 의사, 그리고 원치 않게 살인자의 DNA로 태어난 아이의 정체성 찾기에 꽤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런 정체성의 문제는 소설 속에서 <심즈>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합친 듯이 묘사되는 '섀도 월드'라는 게임에서 가상의 '나'를 키우는 유저들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더구나 이 책을 가장 가슴 아프게 기억되게 만드는 결말부의 두 가지 반전은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신의 영역에까지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에 한계가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전개상 꼭 필요하지 않은 사립탐정들의 이야기도 바로 이런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쓰였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림자의 무게>는 현실과 게임에서 벌어지는 두 가지 연쇄살인을 추적하는 스릴러로서도 충분히 매력 있고, 진지한 주제를 곱씹는 맛도 제법이다. 하드 SF도 아니니 어려울까 걱정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꼭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