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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3.67>은 국내에서 최초로 출간되는 홍콩산 추리소설이다. 내 또래라면 대부분 알 텐데 우리나라에서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는 홍콩영화가 지금의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다. 쿵푸나 무협, 코미디도 홍콩이 자랑하는 장르겠지만 주윤발이나 유덕화, 양조위 등이 출연하는 느아르, 범죄, 형사물이 특히 인기를 끌었는데, 본인 또한 예외는 아니라서 가본 적도 없는 홍콩의 음침한 뒷골목이나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 등을 눈 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이다. 홍콩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데다, 추리소설을 밥보다 좋아하는 나로서는 홍콩과 추리소설을 모듬으로 제공한다는 말에 안 읽어볼 재간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물론 편견이겠지만) 중국산 하면 왠지 짝퉁, 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솔직히 우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의 700쪽에 달하는 책을 순식간에 다 읽고 나서 새삼 잊고 있었던 한 가지를 떠올리게 됐다. 중국인들하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전부터 이야기에 통달한 민족이 아니던가. <서유기>, <금병매>, <홍루몽>, 근래의 <사조영웅전>까지 불세출의 이야기들이 중국 문사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다행히 이번 <13.67> 역시 중국산 이야기의 어마어마한 뒷심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는 역작이라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맞아. 이 사람들은 원래 잘하는 사람들이었어, 하면서.
요즘 인기 있는 추리소설은 거칠게 사건풀이에 집중하는 '본격추리'와 사건수사의 와중에 드러나는 현대 사회의 참혹한 진실과 황폐해진 인간성을 그리는 '사화파 추리'로 나눌 수 있다. <13.67>이 물론 홍콩의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관전둬'라는 천재적인 형사가 40년이 넘는 경찰생활 동안 마주친 여섯 개의 특별한 사건을 다룬 연작단편집인 이 책만큼은 본격추리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주인공이 형사라고 해서 잠복, 미행, 탐문 등 실제 형사들의 수사 기법으로 사건을 해결한다기보다는 관전둬의 천재적인 추리에 의해 사건의 숨겨진 이면이 밝혀진다는 점에서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하는 본격추리의 짜릿한 쾌감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역사가 긴 서구나 일본의 본격추리에 비해 좀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신선한 맛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단언컨대 이 책에 실린 여섯 개의 트릭은 서구나 일본의 어떤 본격추리에 나오는 트릭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작가 찬호께이는 얼핏 스쳐 지나가는 소소한 설정이나 배경 이야기 등에 단서를 위화감 없이 숨겨두는 데 명수이고, 성동격서 식으로 '이것'에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나 사실 진짜 힌트는 '저것'에 있었다는 미스디렉션도 절묘하게 구사하는 고도의 본격추리 테크니션이다. 각 단편마다 사건의 진상도 몇 번이나 뒤집혀 독자의 예상을 매번 빗나가게 하는 반전의 명수이기도 하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책이 단순히 천재 탐정의 활약을 담은 본격추리라고만 보기에는 사회파의 장점 또한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여섯 개의 사건은 전부 인질극, 유괴, 삼합회 범죄, 총기 탈옥, 폭탄 테러 등 홍콩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강력 사건들을 소재로 삼고 있어 현실감이 넘치며,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67년부터 2013년까지 홍콩 사회의 변모를 실감나게 그려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레 백년 동안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뀐 홍콩이라는 특수한 도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놀라운 트릭과 반전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반적인 본격추리의 무대 배경이 도쿄이든, 뉴욕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은 데 비해 <13.67>은 반드시 홍콩이어야만 가능하고, 홍콩이어야만 이야기의 맛이 사는 본격추리라는 점에서 작가의 배경 선택의 탁월함에 감탄하게 된다. 트릭과 추리만이 우선시되는 현실성이 벗어난 세계 안에서도 고집스레 현실성을 추구하는 작가의 특징은 범인들의 범행 동기에도 영향을 미쳐, 금전이나 애정, 복수 등으로 비교적 동기가 (트릭보다는) 중요시되지 않고 단순한 통상적인 본격추리와 달리 좀 더 내밀한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13.67>은 역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늙고 병든 관전둬 형사가 혼수상태에 빠져 일생일대의 호적수와 대결하는 첫 단편이 2013년의 시점이고, 두 번째 단편은 정년퇴직한 그가 경찰의 고문으로 위촉되어 프리랜서에 가까운 상태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범죄를 해결하는 데 이 당시가 2001년이다. 이런 식으로 관전둬의 20대 초반 시절을 그린 1967년의 마지막 단편까지 그의 인생을 되짚어 간다. 이러한 역순 방식의 서술은 독자들에게 그 자체로 하나의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맛을 선사한다. 청년 관전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떻게 변모해 가는가를 순서대로 차근차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독특한 개성을 가진 현재의 관전둬가 먼저 제시되고 일종의 시간여행을 통해 그의 성격 형성 과정을 뚝뚝 떼서 척 던져놓는 것이다. 모든 걸 드러내놓고 떠벌리는 사람보다, 은근한 비밀 한 가지를 숨겨두는 사람이 때로 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러한 서술 방식의 장점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 단편들이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절묘하게 합쳐지는 첫 번째와 마지막 단편이 단연 시선을 잡아끄는데 경찰조직보다 시민의 안전을 늘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대의를 위해 가끔 소소한 규정 위반도 서슴지 않는 관전둬의 신념에 얽힌 비밀이 밝혀진다. 더구나 인간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특히 한 점 어둠도 없었던 청운의 청년들이 어떻게 변해가는가, 그들은 왜 범죄에 발을 담가아먄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성찰에서 오는 짙은 비애가 책장을 다 덮고 나서도 문학적 여운으로 오래도록 남았다.
길게 적은 것처럼 <13.67>의 장점은 굉장하다. 본격추리로서도 성취가 뛰어나고, 홍콩의 변화상과 범죄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사실성으로 사회파의 장점도 아울러 취하고 있다. 보통의 추리소설이 대개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경찰이 출동해 진상을 재구성하는 형태가 많다면, 이 책은 격렬한 총격전이나 유괴에서의 몸값 전달 과정 등 역동적인 상황 속에서 추리의 단초가 숨겨져 있어 영상화의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작가의 문장력도 탁월하고, 일본의 요코야마 히데오를 연상시키는 경찰조직에 대한 정밀한 조사 등을 보면 작가적 성실성도 크게 인정할 만하다. 추리문학에 있어 미래의 대가 출현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기분이랄까. 개인적으로 찬호께이에게서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스타 추리소설가의 초기 출간 시절(지금처럼 수많은 작품들이 범람하기 전)의 생생함과 신선함을 느꼈다. 홍콩 추리소설은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나머지 너무 많이 출간되어 어쩌면 더 이상 산뜻하게 느껴지지 않는 일본 추리소설의 진정한 대안이 될 듯하다. 그리고 찬호께이라는 이름을 앞으로 자주 들을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든다. 단 한 권 읽어보고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13.67>은 단 한 권으로 그 책이 출간된 나라의 추리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올려줄 만한 작품이었다. 그만큼 걸작이라고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