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스의 산 I
다카무라 카오루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오랫동안 힘들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어제 새벽 3시 탄력받아서 읽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시더라구요. 아버님 말씀이 아직까지 안자고 뭐하냐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성공한다 하시며 훈계를 하시더군요. 새벽 3시에..-_-;;;  냉큼 불끄고 20분쯤 자는 척 하다가 다시 불키고 읽어야지 했는데 깜빡 잠들었습니다. -_-;;;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100여쪽을 남겨두고요.  아침 8시 일어나자마자 책을 찾고 다시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 때문에 저는 아침 한나절 멍해 있어야 했죠...



생각해 보면 참 읽는데 오래 걸린 책이었습니다. 얼추 20일쯤 걸린 것 같아요. 저는 탄력받으면 가스에 스파크가 일듯이 800쪽짜리 책도 하루에 다 읽는데 읽다가 막혀서 점화가 안되는 책은 정말 오래 걸리거든요. 지금까지 가장 힘들게 읽은 책은 크리스타아나 브랜드의 <제제벨의 죽음>..-_-;



이 책의 초반에는 일본의 미나미 알프스(알프스는 스위스에 있는 거 아냐?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저도 그랬습니다. 모든 흉내내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스위스의 알프스를 본떠서 이름 붙인 듯 합니다.) 의 산들에 대한 지리한 묘사가 계속됩니다. 그 부분이 한 50쪽쯤 계속되는데 저는 거기를 넘어가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작품의 주인공은 바로 그 '산'이더군요. 주인공인 산의 모습을 끈질기게 묘사해낸 작가의 끈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 작품에는 제 1장 <발아> 부분에서 3가지의 사건이 제시됩니다. 1976년도의 일가족 승용차 배기 가스 자살 사건 (하지만 사내 아이 한명은 살아나죠...)과 산 속의 노동자가 술에 취해 등산객을 때려 죽이는 사건...1988년 백골의 사체가 발견되는 사건이 바로 3가지 사건들입니다.



이 세 사건들은 향후 20년에 걸쳐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에게 커다란 운명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세 사건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절묘한 구성이 돋보이고,  관계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하나로 얽히게 되고, 거기서 파생되는 인생의 우연성, 아이러니가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건은 1991년 현재로 돌아와 정신병에 고통받는 청년이 자신과 상관없어 보이는 무려 20살 이상이나 나이 많은 사회의 엘리트들을 연쇄적으로 죽이면서 시작합니다. 왜 청년은 누가 봐도 무관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했을까요? 이게 바로 이 책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우리의 수사 1과 7계 소속 고다 주임과 다른 뛰어난 형사들의 최대 고민거리도 바로 이것이죠. 현재의 사건과 과거의 사건과의 연결고리, 과거의 피해자와 가해자, 현재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고다 주임은 분투합니다. 최종장에 이르러 드러나는 충격적인 이야기에 독자는 그저 아연해질 뿐이죠...



이 작품은 제가 여지껏 읽어본 경찰 수사물 중에 최고였습니다. 초반에 범인이 노출되는 약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수사 과정의 정밀한 묘사와 현실감 넘치는 전개로 인해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특히 고다는 중간 관리자 입장에서 위에서 치이고 밑에서 올라오는 여러 동료 경찰들과의 알력을 경험하는데 아주 실감납니다. 기존의 경찰물이 무조건적인 동지 의식과 절대적인 우정이었다면 이 작품의 형사들은 동료를 기만하고 정보를 먼저 얻으려고 설치기도 하고, 공을 다투기도 하고, 장기화된 수사에 신경질도 내면서 드잡이질도 하는 등 아주 현실적입니다.



작가의 세밀한 묘사에는 두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남편이 경찰이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정교할 수가 없을텐데 말예요. 현대 일본의 정확한 경찰 직급명부터 수사반 편성, 캐리어와 논캐리어의 하는 일 구분 등 도처에서 엄청난 취재를 했음을 증명하는 장면들이 튀어나옵니다. 이 정교하고 세밀한 현대 일본의 경찰 수사 과정 묘사만 봐도 이 책은 걸작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산'에서 시작되고 산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니만큼 이 작품은 산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산의 장중함과 모든 걸 앗아가는 산의 비정함, 산의 적막함, 외로움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산의 넉넉함, 인간의 더러운 본성을 드러내게 만드는 산의 잔인함과 용서할 줄 아는 산의 관용...작품의 모든 부분에 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분명 현대 일본 추리 소설의 걸작입니다. 경찰 소설 계통에서는 따라올 작품이 없을 듯 보입니다. 고다 주임과 다른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동료 형사들을 한번 만나보시길...머리 속에는 산의 이미지를 가득 담고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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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10-27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구하기 힘든 거 같던데... 아, 무지하게 읽고 싶어졌습니다. 남아 있는 곳 없는지 찾아봐야겠네요. ^^;

jedai2000 2005-10-2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걸작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구하시길...혹시 헌책방에서라도 발견하면 구해드리겠습니다..^^;;

panda78 2005-11-0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에도 잘 안 나오더라구요....흙흙.. 석양에 빛나는 감도 읽고 싶은데..

jedai2000 2005-11-0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정말 읽어보셔야 하는 책인데 답답하네요. <레이디 조커> 포함해서 다시 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