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시간이 난 김에, 아주 모처럼 추리소설 추천글을 끼적인다. 내용인즉슨 각 알파벳 철자에 해당하는 추리소설 장르 중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최고작을 재미삼아 선정했다. 매우 아주 모처럼 시간이 나는 추리소설 마니아가 있다면 가볍게 읽어봐주시길^^

 

 

 

Assassin - 암살

 

선정작 - <자칼의 날> by 프레드릭 포사이스

 

 

 

 

 

 

 

 

 

 

 

 

 

 

최종 후보작 - <피닉스> by 에이모스 어리처, 일라이 랜도

 

 

 

 

 

 

 

 

 

 

 

 

 

 

암살을 소재로 하는 추리소설 중 넘버원은 누가 뭐래도 프레드릭 포사이스를 스타 작가로 만들어준 1971년작 <자칼의 날>이 아닐까. 프랑스인들이 아직도 존경하는 대통령 하면 첫손에 꼽는 샤를 드골의 암살 지령을 받은 프로페셔널 킬러 '자칼'이 표적에 한 발, 한 발 접근해가는 과정을 포사이스가 기자 출신답게 정교하고 냉철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독립시킨 드골에 반발한 극우파가 실제로 드골의 암살 계획을 세웠던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물론 암살자 자칼의 이야기만 나오는 건 아니고, 그를 막으려는 르벨 총경의 이야기도 한 축이다. 암살의 세부적인 얼개가 워낙 정밀해 현실 속의 암살자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 한국에서는 특히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조총련 문세광이 이 작품을 읽었다고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수사 검사였던 이가 현재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씨였는데, 두 사람의 이런 문답은 유명하다. "혹시 <자칼의 날>을 읽었나?", "아니, 그 책을 검사 님도 읽으셨습니까?" 그러니 장래 희망이 암살자인 사람은 꼭 <자칼의 날>을 읽으시길... 최종 후보작인 <피닉스> 또한 암살물의 잊지 못할 고전이다. 이 작품은 이스라엘이 6일 만에 중동 지역을 제패한 '6일 전쟁'의 영웅 모세 다얀을 노리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킬러 '피닉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피닉스>가 유독 재미있는 이유는 PLO가 다얀의 암살을 외주로 준 전 세계급 킬러가 세 명이라는 것. 읽는 이로 하여금 셋 중 누가 피닉스일까, 그리고 피닉스의 진짜 계획은 무엇일까를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개인적으로 암살물을 읽으면 항상 막는 사람보다 암살자에 감정이입해서 읽는 경향이 있는데, 어쩌면 나도 마음속에서는 암살을 꿈꾸는 게 아닌가 싶어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누구나 마음속에 죽이고 싶은 사람 하나쯤은 있는 법이잖나. 어쩌면 암살물이 인기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리만족. 내가 마음속으로 꿈만 꾸는 일을 멋지게 실행으로 옮기는 용자를 응원하는 마음!

 

 

 

Bad Boy - 나쁜 놈

 

선정작 - <불야성> by 하세 세이슈

 

 

 

 

 

 

 

 

 

 

 

 

 

최종 후보작 - <인간사냥> by 리처드 스터크​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안티히어로를 열거하는 데 <불야성>의 류젠이는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 된다. 악당이지만 인간미가 있다거나, 세상 모두가 적이지만 내 여자에게만큼은 따뜻하다거나 따위를 기대하지 마라. 이 작품의 류젠이는 생존본능과 악으로 똘똘 뭉친 철저한 악한이니까. 물론 중국 삼합회가 지배한 가부키초를 떠도는 류젠이가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대만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라는 이유로 대만인 조직의 핵심부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푼돈이라도 벌어 쓰려면 냉정하고 위악적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런 류젠이에게 어느 날 가쿠키초 최대 계파인 상하이방의 보스로부터 버튼이 떨어진다. 보스의 오른팔을 죽이고 잠적한 류젠이의 옛 친구 우푸춘이 가부키초에 다시 나타났다는 정보가 있으니 3일 안에 그를 찾아오라고. 그렇게 못하면 물론 류젠이의 목숨은 없다. 친구가 뭐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류젠이 앞에 우푸춘의 애인이 나타나면서 사태는 갈수록 꼬인다. 과연 류젠이는 3일 안에 우푸춘을 대령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알량한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을까? <불야성>은 대강 이런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이 죄다 악당, 아니면 악녀라서 악의 에너지가 페이지마다 들끓는 희귀한 소설. 아침부터 밤까지 회사에서 시달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절대로 겪을 수 없는 암흑가의 비정한 현실이 너무도 차갑고 뜨겁게 펼쳐져 가히 한 번 잡으면 놓을 수가 없는 책이다. 안타깝게도 두 개의 속편들은 그저 그렇다... 최종 후보작인 <인간사냥>은 '파커'라는 삼류 갱이 자신을 배신한 조직에 복수하는 내용. 영화로도 몇 차례나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소설인데, 요즘 세대에게는 특히 멜 깁슨이 주연한 <페이백>의 원작이라고 하면 대개 알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파커는 후속 시리즈가 수십 편이나 나올 정도로 대인기를 끌었다. 개인적으로 미국 대중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데, 암흑가에 몸담았지만 조직보다는 독불장군으로 행세하며, 농담을 찍찍 날리면서 무표정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녀석이라면 누구나 파커의 또 다른 자아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이다. 모 출판사에서 시리즈가 속속 출간될 예정이라고 해서 기대 중.

 

 

 

Courtroom - 법정

 

선정작 - <무죄추정> by 스콧 터로

 

 

 

 

 

 

 

 

 

 

 

 

 

 

 

최종 후보작 - <이노센트> by 스콧 터로

 

 

 

 

 

 

 

 

 

 

 

 

 

 

 

송사에 휘말렸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나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소송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라서 그런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래식 탐정하면 역시 변호사 탐정 페리 메이슨이다. 하지만 40~50년대 최고의 인기소설로 명성을 날린 페리 메이슨 시리즈는 지금 보면 어쩔 수 없이 조금 낡은 구석이 있고, 90년대에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변호사 출신 작가 존 그리샴의 작품은 법정 추리소설이라기보다 법정을 무대로 한 대중 스릴러에 가까워 베스트로 꼽기에는 아무래도 망설여진다. 하지만 그다지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변호사 출신의 대가 스콧 터로가 있기 때문이다. 터로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무죄추정>을 아직도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꼭 읽어보라. 바로 이 작품을 법정 추리소설의 올타임 베스트로 꼽는 필자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할 것이다. 80년대 소설계의 대히트작 <무죄추정>은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의혹>의 원작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잘 만든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로 기억할 만큼 영화도 충분히 인기를 끌었다. 미국추리작가협회상 등 유독 수상 복이 없었던 게 안타까운데 개인적으로 각종 추리소설 시상식에서 역대 가장 부당하게 무시당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직 검사로 재직 중인 주인공 러스티가 내연관계인 동료 여검사의 살해 용의자가 되면서 엄청난 법정 공방이 벌어진다는 게 주요 골자로 작품 곳곳에 법조인만이 쓸 수 있는 리얼리티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단서가 비교적 공정하게 제공되는 본격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최종 후보작인 <이노센트>는 스콧 터로가 20년만에 새로 쓴 <무죄추정>의 공식 후속편으로 전작의 인상적인 등장인물들이 모조리 출연한다. 세월이 흘러 항소법원의 법원장이자 대법관 후보가 된 러스티가 이번에는 아내의 살해 용의자가 되는 이야기인데, 전작에서 불륜 때문에 그렇게 고초를 겪은 사람이 이번에도 또! 비슷한 일로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참 그게(?) 뭐길래, 하고 절로 한탄하게 된다. 토머스 H. 쿡을 연상시키는 서정성과 아름다운 문장, 진짜 전문가들이 들려주는 법정 공방의 짜릿함, 본격 추리소설의 트릭과 반전까지 재미난 요소란 요소는 다 갖고 있다. 두 작품 중 하나만 고르라면 어쩔 수 없이 <무죄추정>이지만 속편도 못지않다.

 

 

 

Detective - 탐정

 

선정자 - 셜록 홈스

 

 

 

 

 

 

 

 

 

 

 

 

 

최종 후보자 - 필립 말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냥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실루엣만 보여줘도 셜록 홈스라는 이름이 탁 튀어나올 것이다. 이런 데도 탐정의 대명사로 셜록 홈스 외의 다른 인물을 대겠는가. 이처럼 셜록 홈스는 하나의 신화이며 거대한 세계이자 시대를 뛰어넘는 진정한 아이콘이다. 최근에 인기를 끈 BBC드라마를 통해 또 한 번 재조명된 것처럼 홈스는 태어난 순간부터 언제나 최고였고, 앞으로도 최고의 탐정으로 늘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셜록 홈스의 인기 요인은 무엇일까? 날카로운 지성과 추리력으로 불가사의한 사건을 척척 해결해내는 히어로적인 면모가 첫 번째이며, 곤경에 처한 의뢰인을 한결같이 도우려 하는 따뜻한 마음씨, 육체적인 완력에 (일부 분야에 한정되긴 하지만) 지식인다운 교양, 마지막으로 친구 왓슨에게 노상 틱틱대면서도 본질적으로는 그를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는 진실한 우정에 우리가 홀딱 반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추리소설이 존재하는 이상 홈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모습을 바꿔 영원히,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리라... 최종 후보자는 홈스보다는 대중성이 살짝 떨어지지만 홈스와 더불어 대중문화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또 하나의 명 캐릭터, 필립 말로이다. 솔직히 지금까지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 대부분은 필립 말로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인칭 시점으로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사색하는 관찰자이자, 내내 세상에 대해 빈정거리면서도 소중한 인간성, 다시 말해 사람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는 철학자. 현대 사회의 온갖 병폐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당당하게 그에 맞서는 비열한 거리의 기사. 정말이지 여지껏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 가운데 이 정도의 매력을 풍기는 남자가 또 있을까 싶다.

 

 

 

Evil - 악(惡)

 

선정자 - 한니발 렉터

 

 

 

 

 

 

 

 

 

 

 

 

 

 

최종 후보자 - 모리아티 교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SES가 있으면 핑클이 있는 것처럼(응?), 탐정이 있으면 그에 대적하는 악이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수많은 탐정들만큼이나 많은 악당들이 추리소설의 세계 속에서 명멸해 갔지만, 우리 뇌리 속에 지울 수 없는 인물은 단연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교수라고 할 수 있겠다. 인육을 즐기는 엽기적인 연쇄살인마지만 심리학이나 철학, 자연과학 등 각종 지식에 통달했으며 고상한 기품과 나름의 취향까지 겸비한 희대의 악당 렉터 교수의 출현 이후로 시시한 실수로 붙잡히는 시시한 악당들은 추리소설의 세계에서 발 붙일 곳을 잃었다. 요즘 독자의 취향대로라면 아이큐 180에 수학이나 천문학, 의학 등에 어지간한 전문지식이 있어야지 그나마 악당으로 행세한다. 그러니 악의 제국을 꿈꾸는 자들이여,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 기자 출신 작가인 토머스 해리스의 <레드 드래곤>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한니발 렉터는 그 후 3편의 후속작에 더 등장하며 저자를 돈방석에 앉게 해주었는데, 역시나 오스카 작품상까지 받은 <양들의 침묵>이 가장 유명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양들의 침묵> 영화에서 렉터 교수를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명연기 덕분에 렉터의 인기가 더욱 올라갔다는 것이다. 소설이 영화의 기반이 되고, 영화는 소설과 등장인물의 인기를 더욱 끌어올려주었으니 행복한 윈윈 사례랄까. 비디오가 라디오스타뿐 아니라 소설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현대 대중문화계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최종 후보자인 모리아티 교수는 셜록 홈스의 영원한 맞수이다. 코난 도일의 업적 중 단연 최고는 역시 추리소설의 대중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영웅(홈스)이 충실한 사이드킥(왓슨)과 함께 슈퍼 빌런(모리아티)과 대적한다는 영웅소설의 공식을 확립한 점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수천 가닥의 줄로 된 범죄의 집을 치고, 그 한가운데에서 각각의 줄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거미'인 절대악 모리아티야말로 진정한 홈스의 라이벌이다. 

 

 

 

Future - 미래

 

선정작 - <별의 계승자> by 제임스 P. 호건

 

 

 

 

 

 

 

 

 

 

 

 

 

 

최종 후보작 - <강철도시> by 아이작 아시모프

 

 

 

 

 

 

 

 

 

 

 

 

 

 

SF는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일부 마니아층을 제외하고는 '공상과학'이라고 불리며 폄하를 당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공상'이 어떻게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추리소설과 어울리겠는가, 당연히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잘 쓴 SF소설은 대개 허무맹랑한 공상에 그치지 않고, 과학에 기반한 정교한 가설과 상상력을 내세우므로 이것저것 따지기 좋아하는 논리적인 추리소설과 잘 결합한다. 하긴 단서만 공정하게 주어지고, 주어진 물리법칙에만 충실하다면 명왕성으로 향하는 우주선 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달에서 발견된 우주복 입은 인간 사체(놀랍게도 연대 측정 결과 지금으로부터 5만 년 전의 인간이다)의 비밀을 파헤치는 <별의 계승자>는 탁월한 SF요, 추리소설이다. 일군의 과학자들이 그 사체에 관해 각종 가설을 내세우며 논리 대결을 펼치는, 액션보다는 말만 많은 소설이지만 그 가설들이 하나같이 흥미진진해 빠져들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도출되는 진실에는 그야말로 헉 소리가 절로 난다.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너무X100 재미있는 소설이니 웃돈을 주고라도 꼭 구해보시길...<강철도시>는 SF추리소설의 최고작을 뽑을 때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걸작. 외계의 지배를 받게 된 식민지 상태의 지구 형사가 외계인이 만든 로봇 형사와 더불어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내용으로 <별의 계승자>보다는 훨씬 정통적인 추리소설의 형태를 갖고 있다. SF의 대가 중의 대가인 아시모프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특히 좋아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흑거미 클럽>이라는 단편 추리소설집을 낸 적도 있다. 그런 아시모프가 본인의 장기인 SF에 추리를 제대로 결합시켜 멋진 화학작용을 일궈낸 작품.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점차 가까워지는 인간과 로봇의 우정 또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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