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의 섬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흑사의 섬>은 오래전부터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오노 후유미의 작품입니다. 1980년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부 아야쓰지 유키토와 함께 '교토대 추리소설 연구회'에서 활동했고, 그의 부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입니다. 좋은 시절이라 국내에도 대부분의 신본격 작가들 대표작이 들어와 있어서 어지간히 읽어봤는데, 유독 오노 후유미의 작품은 기회가 없었거든요. 게다가 출신과 달리 그녀의 출세작은 <시귀> 같은 호러소설이나 대히트를 친 <십이국기> 같은 동양풍 판타지라서 딱히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2001년작 <흑사의 섬>은 완전한 본격 추리소설이라기에 더 망설일 이유 없이 붙잡게 되었습니다. 이건 갑자기 생각난 여담인데, 제가 대학 다닐 때 선배 하나가 TV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십이국기>를 '열두 나라의 명기(名妓)'들이 나오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인 줄 알고 다운받았던 적이 있었더랬죠...


 

간단히 말해, <흑사의 섬>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떠올리게 하는, 폭풍우로 고립된 섬에서의 살인사건을 탐정이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본격 추리소설의 영원불멸한 테마에다가 고결한 인간성보다 개화기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잘못된 인습이나 사이비 종교 등에 매몰된 섬 사람들의 추악한 모습이라는 요코미조 세이시 풍미를 끼얹어 자신 있게 내놓은 요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비슷한 느낌을 주는 책이라면 역시 세이시의 대표작 <옥문도>를 꼽아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에는 '흑사의 섬'을 '검은 뱀의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식 종교가 아닌 '사이비(黑祠)의 섬'을 뜻하는 것이더군요. 장점이나 단점, 혹은 약점이 케익을 반으로 자르듯 선명하게 나뉘는 작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정하라면 <흑사의 섬의 천일야화>라고 하겠습니다. 탐정이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야차도'라는 섬에 도착한 데다, 이 섬의 절대적인 존재가 증거를 미리감치 전부 은폐해버렸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탐문밖에 없어요. 관계자를 만나 끝없이 증언을 듣고 또 듣는 게 탐정의 조사 내용 전부입니다. 게다가 탐정이 하필이면(?) 십 수 년 전에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과 현재 일어난 두 건의 살인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어서 관계자 한 명씩마다 알리바이를 무려 네 번이나 들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말과 정보의 홍수, 큰따옴표로 시작하는 문장이 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 섬마을 사람들은 다들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건지, 방문객이 별로 없어서 외로웠던 걸까요ㅠ.ㅠ?  반드시 일일이 따져봐야 하는 살인사건이 네 개나 등장하는 책의 내용상 어쩔 수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구성이 지나치게 복잡해져서 내용을 따라가기 쉽지는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토착 종교와 전근대적인 영주가 여전히 지배권을 행사하는 '흑사의 섬'에 탐정이 당도해 분위기를 잡아가는 초반부는 아주 좋았습니다.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도 입을 모아 그런 일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고 잡아떼는 마을 사람들의 천연덕스러운 악의는 은근히 소름이 끼쳐 호러소설로 일가를 이룬 오노 후유미의 실력을 엿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이 세이시가 활약하던 1950년대가 아니라 2000년대에 나왔다는 걸 생각해보면 과연 아직까지 이런 곳이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죠. 어쩔 수 없이 몰입감이 떨어지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본격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탐정 역의 시키부는 끈질기고 자기 일에 열심이라는 미덕을 제외하면 거의 매력이 없어요. 사건을 조사하기도 바빠 어떤 인간미를 보여줄 기회도 없었고요. 유감스럽게도 주인공 시키부가 이럴진대, 다른 등장인물들도 백지장처럼 얄팍하게 보이는 건 마찬가지겠지요. 추리소설을 다른 말로 탐정소설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결정적으로 탐정의 성격이 이처럼 평면적이라면 커다란 흠결이 되는 것입니다.

 

 

책이 거의 끝나가는 데도 장점이 별로 보이지 않아 낭패로구나 생각할 때 사건의 전모와 진범(그리고 진짜 00)이 드러납니다. 천만다행으로 여기서 상당 부분 점수를 땁니다. 어쩌면 본격 추리소설은 모든 게 뒤떨어져도 트릭만 쌈박하면 적당히 만족하며 책장을 덮을 수 있는데, <흑사의 섬>이 딱 그런 작품이었어요. 여기서부터는 살짜쿵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범인이 두 희생자 후보 여성 가운데 유독 동기가 없는 쪽을 골라서 죽인 것. 그리고 자기들끼리 수십 년간 모여 살아 얼굴을 모르는 주민이 하나도 없는 섬에서 목격자가 범인의 얼굴을 '낯선 이'라고 지목한 것. 이 두 가지 포인트는 대단히 공정하고 분명한 단서들이라서 꼼꼼히 따져보면 독자도 충분히 진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뭐 저도 못 맞췄지만 이런 힌트를 놓치면 너무 분하죠, 흑흑. 명쾌하게 떨어지는 해설이긴 하지만 역시나 텍스트로만 읽으면 꽤 헷갈리는 트릭이라 확실하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등으로 각색되면 훨씬 재미있을 작품이라고 사료됩니다.

 

 

430페이지의 힘든 독서를 버티고 마지막 50페이지의 쾌감을 즐길 수 있는 독자라면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단순히 트릭의 측면에서는 2000년대 이후 일본 본격 추리소설에서 가장 좋은 작품 중의 하나라고도 생각이 들 정도예요. 개인적으로 처음 만난 오노 후유미의 작품이 꽤 만족스러워서 더 찾아 읽어볼 계획입니다. 고전적인 본격 추리소설의 한계를 새로운 시도로 돌파하는 '신본격' 추리소설 운동을 주창한 일군의 작가들. 결사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맞부딪치게 되는 위기가 있습니다. 새로움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새로움 빼고는 다른 모든 게 허망한 주화입마 식의 작품이 나올 수도 있을 테고, 또 운 좋게 초반에 남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한방으로 성공했다 해도 새로운 걸 끊임없이 반복하면 어느새 그 새로움 또한 낡게 느껴지는 자기 딜레마가 그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신본격은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고 운동 역시 휴지기를 맞은 듯하지만, 젊고 열정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끈질기게 지속했던 작가들이 어느덧 중견이 된 지금도 충분히 멋지고 보기 좋습니다. 오노 후유미도 바로 그런 작가 중의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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