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평점 :
사형제도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룬 데뷔작 <13계단>으로 홈런을 친 다카노 가즈아키의 복귀작이다. 작년 여름에 사놓고도 688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과 페이지마다 빼곡한 글자를 겁내 안 읽고 버티다가 며칠 전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막상 한 번 잡으니까 놓을 수가 없더라. 다 읽고 난 소감은 간단히 말해, 다카노 가즈아키의 현재까지 최고작이라는 것. 최근 일본 추리소설은 연애나 인간관계 등 다소 소소한 테마의 일상 미스터리가 많고, 그 배경이나 설정도 가능하면 평범하게 꾸며 자연스레 독자의 공감을 사는 내용이 인기였던 것 같다. 나와 우리 이웃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듯한 아기자기한 재미의 추리소설, 과연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도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작가의 시공을 뛰어넘는 상상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대하고 치밀한 자료조사, 거대하고 진지한 주제를 거침없이 다루는 역작이 그리웠던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한 거니까 조금만 관찰력을 키우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기분의 작품과 이런 정교한 구성과 과학적인 설명, 뛰어난 상상력이 어우러진 소설을 나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어, 하는 기분의 작품. 당연히 둘 중 우열을 가릴 수는 없을 테지만, 역시 대부분의 독자를 진정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후자이리라. 몹시 거친 분류이지만 <제노사이드>는 바로 후자, 다시 말해 비범한 작가가 열과 성을 다해야만 쓸 수 있어 독자들의 자연스런 존경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제노사이드>는 일본과 아프리카의 두 주인공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일본 쪽 주인공은 얼마 전 지병으로 아버지를 잃은 평범한 약학 대학원생, 고가 겐토. 물론 전공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한 듯 약학 지식이 꽤나 탁월해 평범하다는 말에는 살짝 어폐가 있다(관련 지식이 전무한 진짜 '평범한' 독자들이 보기에는 약학계의 슈퍼히어로다). 겐토의 아버지 또한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학자였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조금 궁상맞아 보이는 언행으로 인해 겐토는 과학자로서 아버지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날아온 아버지의 예약 이메일 한 통은 겐토의 평범한 삶을 모험과 진지한 연구로 가득찬 신세계로 안내하는데, 이 부분은 흡사 히치콕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목표 기한 안에 궁극의 신약을 개발할 것. 다만 도처에 위험이 있으니 조심할 것. 겐토는 왜 자신이 이 신약을 개발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정체불명의 적에게 쫓기면서 연구를 계속한다.
아프리카 쪽 주인공은 아들이 걸린 불치의 유전병 치료비를 대기 위해 이라크 등 교전지역에서 용병 생활을 하는 전직 군인, 조너선 예거. 예거는 거액의 사례를 약속받고 다른 용병 세 명과 함께 특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아프리카 콩고로 잠입한다. 그러나 작전 개시에 대비한 모의 훈련에서 예거는 한 가지 의혹을 느끼는데, 왠지 그들의 제거 목표가 어린이의 몸집을 가진 것 같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남의 아들을 죽일 수 있을까? 도덕적 딜레마를 애써 묻어두고 어쨌든 서서히 목표 지역으로 나아가는 예거 일행의 앞을 아프리카의 무자비한 정글 외에도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준군사 조직들이 가로막는다. 겐토의 챕터가 서스펜스 영화라면, 예거의 챕터는 흡사 브루스 윌리스가 나올 듯한 액션영화 같은 모험과 위기의 연속이다. 개인적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지는 두 이야기가 어떻게 접점을 이룰지 몹시 궁금했는데, 마침내 하나로 맞닥뜨린 이야기의 본질을 알고 나서 굉장히 감탄했다. 온 사방으로 뻗어 나간 이야기 줄기가 이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린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제목은 '종족 말살'을 뜻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터나 아프리카 부족 간의 격렬한 인종 청소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듯한데, 인류 역사상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는 비극이다. 다만 이 책에서의 제노사이드는 인류와 인류 간의 제노사이드가 아니라는 데 재미의 핵심이 있다. 내용을 전혀 모르고 보면 훨씬 놀랄 일이 많을 듯해, 구체적으로 현 인류의 제노사이드 대상을 밝히지는 않겠다. 아무튼 이 책에 나오는 인류의 '적'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비범한 능력을 지녀 현 인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석학들과도 멋진 적수가 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체스 게임처럼 전개되는 두 세력 간의 치열한 두뇌싸움에 흠뻑 젖어보시길. 약학, 인터넷, 항공, 인류학 등 다양한 전문 영역을 깊이 있는 취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마이클 크라이튼,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선배 과학 스릴러 작가에 부끄럽지 않고, 아프리카에서의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와 그 와중에 마주치는 소년병 등 현대 아프리카의 비극을 그린다는 점에서 후나도 요이치의 모험소설도 생각난다. 어떻게 봐도 모처럼 만난 소설계의 역작임에는 틀림없다. 데뷔작과 몇 편의 후속작들에서 이만한 깜냥을 짐작하지는 못했는데,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낸 작가에 박수를 보내며, 독자들에게도 강력하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