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으로 매월 읽은 미스터리를 짤막하게 정리해 그 달의 베스트를 정하려 합니다. 나이 먹다 보니 하는 것도 없이 바빠 길게 독후감을 쓸 시간이 없어 편법을 쓰게 되네요...

 

 




<제물의 야회 - 가노 료이치>

 

미스터리 동호회 등에서 평이 대단히 좋았던 가노 료이치의 하드보일드 스릴러. <양들의 침묵>을 비롯해 영미권에서 대단히 인기 있는 사이코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연쇄 살인범이 등장한다. 그는 여성 하프 연주자의 아름다운 손을 탐내 그녀를 죽이고 손을 잘라 가져간다. 그와 맞서는 두 남자는 어두운 과거를 가진 프로 살인청부업자와 아이를 잃고 아내와 별거중인 고독한 형사. 비록 살인으로 먹고 살지만, 어딘지 모를 기품과 철저한 장인정신을 가진 청부업자의 캐릭터는 오사와 아리마사의 <독원숭이>에 등장하는 중국인 킬러 '독원숭이'를 떠오르게 만들며, 고독한 형사 역시 일본 경찰소설에서 자주 본 듯한 인물이다. 십수 년 전인 중학교 때 엽기 살인을 저지른 과거가 있는 자가 핵심 용의자라는 설정을 통해 소년범죄 및 소년범 관리의 허와 실을 지적하기도 하며, 야쿠자 세력 간의 암투를 긴장감 넘치게 그리는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굉장히 두꺼운 작품이지만 질리지 않고 재미있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 서양식의 이상심리가 주제인 스릴러, 각종 소설과 영화, 만화 등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킬러들의 총격전과 격투, 전형적인 일본 경찰소설의 클리쉐가 혼합되어 있어 독창성 면에서는 약간 감점을 주고 싶다.

 

 


<고식2 - 사쿠라바 가즈키>

 

<내 남자>로 나오키상을 탄 바 있는 사쿠라바 가즈키는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라이트노벨 작가로 출발해 서서히 영역을 넓히고 문단에서도 인정받은 특이한 이력의 작가다. 라이트노벨 시절의 대표작인 '고식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고식2 - 그 죄는 이름도 없이>는 라이트노벨을 그리 읽지 않는 내게도 미스터리색이 비교적 강해 만족스러웠다. 1차대전이 막 끝난 유럽을 배경으로, 독일과 스위스 국경 어딘가에 있다는 가공의 왕국 소뷔르에 유학간 일본인 소년 카즈야와 '늑대'라는 소문이 있는 천재 소녀 빅토리카가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빅토리카의 과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그녀의 어머니가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과거의 살인사건에 도전한다. 당시 살해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간단한 사실만으로 명추리를 펼치는 빅토리카의 활약이 대단하며 일종의 밀실 미스터리로도 볼 수 있을 듯. '고식 시리즈'는 라이트노벨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 소소한 유머와 소년소녀가 겪는 아슬아슬한 모험담, 사건풀이의 재미, 서서히 싹트는 알콩달콩한 로맨스까지 즐길 만한 요소가 많다.

 

 





 

<악몽의 엘리베이터 - 기노시타 한타>

 

아마도 연극 극본가이자 연출가인 작가가 연극용으로 썼으리라 보여지는 유머 서스펜스. 사건이 대부분 엘리베이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데, 이 간단한 설명만 듣고는 그 안에서 일이 있어봐야 얼마나,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일이 다 벌어지므로 쉴 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다 어느새 마지막 장을 보게 된다(물론 페이지 수가 적은 탓도 있다). 평범한 바텐더가 회식 때 술에 뻗은 여직원을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정신을 잃는다. 눈을 떠보니 고장난 엘리베이터 안이고, 뭘 해도 어색한 수염남, 메뚜기를 닮은 오타쿠, 음침한 분위기의 여자와 함께다. 바텐더는 아내가 출산 예정이라 엘리베이터를 탈출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천하태평이니 속이 탈 수밖에...1장은 바텐더, 2장은 메뚜기 오타쿠, 3장은 수염남 각각 세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점차적으로 대체 이날  엘리베이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의 퍼즐이 맞춰지는 구조라 연극으로 보자면 3막극이 아닐까 싶다. 바텐더의 절박함과 대비되는 다른 사람들의 느긋하고 엉뚱한 반응이 웃음과 더불어 애가 타는 서스펜스를 발생시키는 포인트. 반전도 비교적 괜찮아 재미있게 읽었지만, 단지 계속 꼬여가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등장인물들을 몇 명 죽이기까지 한 건 조금 지나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유령은 밤에 나타난다 - 하야미네 카오루>

 

아동 추리소설가 하야미네 카오루의 자칭 명탐정 '유메미즈 키요시로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전작에 이어 유메미즈는 옆집 사는 세쌍둥이 아이, 마이, 미이와 함께 새로운 사건에 도전한다. 이번 사건은 학교 시계탑의 종이 울리면 누군가가 죽는다는 '학교 전설'과 관련되어 있으며, 한밤중 갑자기 하늘에서 학교 운동장으로 책상, 의자, 마네킹이 날아오는 등 그야말로 기묘한 일들 천지다. 유메미즈가 단번에 밝혀낸 사건의 진상은 일종의 거대한 장치 트릭이라 볼 수 있을 텐데,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솔직히 현실감은 제로다. 그러나 아동용 미스터리를 보며 리얼리티를 따질 독자들은 많지 않을 테니, 큰 약점은 아닐 터. 작가 하야미네 카오루는 본격 미스터리에서의 리얼리티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유메미즈 키요시로 시리즈'를 쓰고 있어, 일본에서는 벌써 13권이 나왔고 25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아동용 추리소설까지 활발히 창작되고 있는 일본이 문득 부러워진다.

 

 





 

<구부러진 경첩 - 존 딕슨 카>

 

밀실 추리소설의 마스터, 고전 추리소설의 세 대가 중 한 명인 존 딕슨 카의 대표작이다(나머지 두 대가는 당연히 애거서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이리라).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가장 출간을 손꼽아 기다렸던 작품으로, 이번 <구부러진 경첩> 출간을 기화로 크리스티나 퀸에 비해 유독 국내 출간 편수가 적은 카의 작품들이 속속 나와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작품의 배경은 언제나처럼 영국의 시골 마을. 마을에서 존경받는 존 판리 경에게 불청객이 찾아온다. 불청객은 타이타닉 호 침몰사건 때 머리에 충격을 받아 원래 존 판리였던 자신과 떠돌이 서커스 단원의 신분이 바뀌었고, 지금 존 판리 경 행세를 하고 있는 남자는 사기꾼 패트릭 고어에 불과할 뿐이라 주장한다. 마침 어린 시절 존 판리 경이 재미삼아 찍어두었던 지문이 남아 있음이 알려지고 그 지문 감식이 이뤄지는 순간에 현재의 존 판리 경이 정원에서 목이 잘려 죽는다. 목격자들은 여럿이 있으나, 존 판리 경이 허공에서 팔을 휘두르는 모습만 보았을 뿐 그곳에 제2의 인물은 없었다. 일종의 '열린 밀실'이라 할 정원의 보이지 않는 살인자의 정체는? 카가 창조한 명탐정 기디온 펠이 펼쳐내는 사건의 해답은 두 가지인데 놀랍게도 둘다 말이 되고 논리적이다. <왕자와 거지>를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플롯과 카의 전매특허인 독창적인 트릭이 결합된 고전 본격 미스터리의 명편으로 처음 선정하는 '이 달의 미스터리'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때로 대체 무슨 말인지를 이해할 수 없는 어색한 번역과 줄 맞추기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조악한 편집은 크게 유감스럽다. 기왕에 대가 존 딕슨 카의 명작을 출간하는데,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뛰어난 만듦새까지 뒷받침되면 더욱 반응이 좋을 거라 생각한다.

 

 

 

 

2009년 5월의 미스터리: <구부러진 경첩 - 존 딕슨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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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2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9-07-01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글님...늦게 답변을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정도로 힘든 삶을 살고 있어서요. 전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취지에는 깊이 공감을 합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시국 선언까지의 행동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네요. 일단은 잠시 관망하는 중이랍니다. 저는 비록 합세하지 못했지만, 뜻이 맞는 애국자 분들이 두루 모이셔서 꼭 뜻하는 바를 이루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