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 블랙 블랙 캣(Black Cat) 14
앤 클리브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2006년 영국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레이븐 블랙>은 고전적인 '퍼즐 미스터리'라는 문구를 달고 국내에 소개됐다. 하드보일드부터 사이코 스릴러, 스파이 소설까지 미스터리의 소장르는 무수히 많지만 퍼즐 미스터리야말로 미스터리 팬들의 영원한 고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미스터리 팬들이 코널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퍼즐 미스터리로 이 장르를 읽기 시작했을 테니까. 요즘의 미국 미스터리 시장을 보면 워낙 영화가 발달한 나라라서 그런지 일단 영화화하기 좋게끔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속도감을 중시하며, 영화의 교차편집 같은 기법으로 깜짝쇼를 펼쳐 독자를 잡아끄는 스릴러가 대세지만, 퍼즐 미스터리 전통이 강한 영국 쪽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하기야 월키 콜린즈부터 코넌 도일, 체스터튼을 거쳐 피터 러브시나 에드먼드 크리스핀, 콜린 덱스터까지 영국 퍼즐 미스터리의 전통이 몇 년이랴. 더구나 영국 미스터리는 여성이 초강세라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세이어즈, 마저리 앨링햄, 조세핀 테이, 루스 렌들, PD 제임스, 최근의 미넷 월터스 등 그야말로 세계 미스터리를 빛낸 거룩한 이름들이 즐비하다. <레이븐 블랙>의 작가 앤 클리브스는 영국 미스터리의 오랜 두 전통을 계승할 만한 적자로 평가받고 있으니, 퍼즐 미스터리를 쓰는 여성 작가란 이야기다. 영국풍의 퍼즐 미스터리는 역시 약간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두뇌 유희를 중시하고, 시골 마을이나 섬처럼 넓지 않은 공간적 배경과 그 안의 좁은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사건이 벌어지며, 용의자는 반드시 작품에 등장하는 소수의 인물로 한정되는 특징이 있다. 물론 모든 단서가 독자에게 제공되어야 하는 공정함은 퍼즐 미스터리의 알파와 오메가다.



<레이븐 블랙>은 스코틀랜드령의 작은 섬 셰틀랜드에서 열여섯 살 소녀가 살해되면서 시작된다. 마음까지 차디 차게 얼어붙을 듯한 겨울날 들판 한가운데서 목이 졸려 죽은 소녀 캐서린은 죽기 전 백치에 가까운 노인 매그너스의 집에 들렀었다. 매그너스의 집에 들어간 것까지는 목격자가 있는데 나온 걸 본 사람이 없으므로 당연히 매그너스가 용의자가 되는데, 한 가지 더 매그너스의 혐의를 굳건히 해주는 이유가 있었으니 8년 전 매그너스 옆집에 살았던 열 살 소녀가 실종된 채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도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상태였는데 비슷한 일이 또 벌어져서 수사진들과 마을 사람들의 의심의 눈초리는 모두 매그너스에게 가 있다. 하지만 지역 경찰 페레즈 형사만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매그너스가 범인이 아닐 거라 생각하며 캐서린의 친구 샐리, 학교 선생님 스콧, 부잣집 망나니 로버트 등을 탐문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전체적으로 아주 흡인력 있는 이야기에 차분한 듯 하면서도 힘있게 작품을 이끌어가는 솜씨가 돋보인다. 실제로 거의 단숨에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전매 특허였던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전부 아는 좁은 시골 마을을 떠도는 악의와 그 안에 오래도록 숨겨진 비밀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도 현대에 맞게 충분히 잘 살려냈고,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돋보인다. 살해된 캐서린의 넘치는 에너지와 친구들에게 다가가려고 너무 힘을 주다 오히려 더욱 멀어져버리는 샐리의 모습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시체를 처음 발견한 프랜에게 남모르는 연심을 품고 그 곁을 맴도는 페레즈 형사는 소박한 성품 속에 감춰진 열정이 생생해 근래 읽었던 미스터리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주인공이었다. 친구의 아내였던 프랜에게 결국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페레즈의 담담하고도 씁쓸한 결말도 일품이다.


전체적으로 매우 우수해 과연 수상작감이다, 라는 생각은 들지만 아쉬움도 제법 크다. 퍼즐 미스터리라는 문구에 비춰보면 확실히 좀 섭섭한데, 사실 퍼즐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캐서린을 살해한 범인이 의외의 인물이라 놀랍긴 하지만 페레즈가 추리한 것은 아니다. 사건의 모든 것을 지켜본 한 용의자가 결국 입을 열어 진실을 털어놓으면서 범인을 안 것뿐이지, 단서나 증언을 통해 추리로 도출해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라 의심이 가는 인물은 있겠지만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 라는 생각은 있어도 왜라고는 말하기 어렵겠다. 단서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꽤 잘 읽히는 책이라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가 나오고 범인의 이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모든 용의자들의 증언을 꼼꼼히 분석해 허점을 찾고, 물리적 심리적 단서를 이용해 범인을 맞추는 짜릿한 퍼즐 미스터리의 재미는 느끼기 어렵다. 이런 면에서 좀더 능숙하게 단서와 증언을 배치했더라면 제2의 애거서 크리스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앤 클리브스는 아직까진 약간 부족한 듯하다. 하기사 애거서 크리스티의 경지에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건 아니지...퍼즐적 재미가 떨어지는 것 말고는 분명히 재미있고 훌륭한 소설이니 너무 큰 기대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즐길 만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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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8-10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좀 섭섭하죠..쫌 무난하고..작가가 동일주인공 시리즈로 동일지역의 계절별로 글을 쓴다는데 읽게 될지 모르겠어요

jedai2000 2007-08-10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너무 무난해서 약간 실망했습니다만 쉽고 편하게 읽히고 그 섬의 분위기나 인물들이 마음에 들어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습니다. 다음 시리즈는 우리나라에서 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솔직히 골드대거의 명성에는 약간 못 미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