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베스트를 뽑아놓고도 귀찮아서 나중에 써야지 했는데 벌써 6월이네-_-;; 코로나로 아직도 외출이 부담되는 분들의 즐거운 독서를 위해 늦게나마 정리해본다.


5위 <우먼 인 윈도> - AJ 핀











AJ 핀이라는 신인작가의 초대형 히트작. 미국에서 10여 년 만에 데뷔작이 베스트셀러 1위를 찍었으며 100만 부를 넘게 팔고 헐리웃에 영화 판권도 팔았다고 한다. 어떻게 썼길래 신인작가, 아니 작가라면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성공을 데뷔작으로 기록했는지 궁금했다. 600페이지가 넘는 매우 두꺼운 책을 하루 만에 읽고 역시 팔리는 물건에는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히치콕의 <이창> 70프로+<현기증> 30프로로 이뤄져 있으며, 히치콕만큼 유명하진 않은 90년대 스릴러 <카피캣>도 레퍼런스로 참조한 듯하다. 도입부에는 드러나지 않는 모종의 사건으로 광장공포증을 얻게 된 여성 정신과 의사가 있다. 그녀, 애나 폭스는 한국의 히키코모리(글쓴이 같은)에게 한 수 배워야 할 듯하다. 나 같으면 독서, 게임, 영화, 넷플릭스 등으로 하루가 모자랄 텐데 애나는 술과 신경의약품, 온라인 체스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러다 질리면 창문으로 동네를 구경하는 게 낙인데 어느 날 새로 이사 온 3인 가족의 아내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살해당했다는 아내를 데려오는데, 놀랍게도 멀쩡히 살아 있는 그녀는 며칠간 지켜본 그 여자가 아니었다! 음모와 계략으로 점철된 히치콕풍 세계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지만 문제는 애나가 광장공포증으로 외부 활동이 불가능하며 음주와 약물 의존증 때문에 주변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복이 불가능한 이중고와 싸우며 그날 밤의 진실에 접근해가는 애나에겐 빼어난 반전과 의외의 범인이 기다리고 있다. 작가는 그간 벌어졌던 기기묘묘한 일들이 차근차근 설명되는 결말에서의 복선 회수도 매우 잘해냈다. 게다가 주인공을 고전 스릴러 광으로 설정해서 영화 얘기를 많이 넣었으며 영화에 딱 어울리는 장면들이 많아 영화 프로듀서들이 군침을 흘렸을 법하다. 다만 독자가 지나치게 많은 분량과 느린 템포(200페이지가 지나고 나서야 사건 발생)의 이중고와 싸우며 독서를 해야 하는 건 단점이다. AJ 핀은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이 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동정표를 많이 얻었는데 알고 보니 모두 거짓말이었다. 본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연극성 장애였다고 해명했지만 지금까지도 비난을 꽤나 받고 있다. 그러나 <우먼 인 윈도>에서의 실력을 보면 작가생활의 결정적인 문제는 안 될 것 같다.



4위 <조용한 무더위> - 와카타케 나나미











귀여운 곰 탈이 나오는표지 그림만 보면 서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소소한 사건을 해결하는 발랄한 일상계 미스터리 같지만 여기저기서 맞기도 하고 크고 작은 사고도 당하는 등 몸을 아끼지 않는 프로페셔널 탐정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는 소프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단편집이다. 전체 6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첫 작품은 6월, 마지막 작품은 12월에 끝나 하무라의 반년을 보여주는 계절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표제작 '조용한 무더위'는 아주아주 유명한 고전 탐정소설의 모두가 아는 트릭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본격 미스터리이고, '소에지마 씨 가라사대'는 서점에 매인 하무라가 전화로만 인질극 사건을 해결하는 안락의자 탐정물이며, 제목부터 <붉은 수확>의 패러디인 '붉은 흉작'은 대실 해밋 류의 고전 하드보일드에 바치는 오마쥬, '성야 플러스 1'은 하무라가 고객의 귀중품(?)을 운반하며 겪는 온갖 위험 속에서 음모(?)의 실체를 깨닫는 모험물이다(이것 역시 제목 자체가 모험소설의 고전 <심야 플러스 1>의 패러디). 데뷔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부터 절찬받은 인간 내면에 은밀하게 자리잡은 악의, 독기 등을 은근하게 그리는 필체는 여전한 가운데, 하무라가 탐정뿐만 아니라 추리소설 전문 서점에서 알바로 투잡을 뛰기에 독특하고 유머 넘치는 조연들이 많이 나와 예전 작품들보다 한결 읽기 편안해졌다.예전에 초기작 두 권이 나왔다가 절판된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가 중간에 몇 작품 건너뛰고 국내에 새로 출간되는 셈인데, 그새 일본에선 드라마화도 되고 매년 신작들이 미스터리 전문 잡지에서 높은 랭킹에 오르는 등 오히려 예전보다 신분이 더욱 상승한 느낌이다. 2020년에 국내 출간된 <녹슨 도르래> 역시 뛰어난 작품이었다(나만의 2020년 베스트에서는 최상위권도 노려볼 만하다고 생각 중). 앞으로도 하무라 아키라의 활약이 속속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팬들은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3위 미스터리 아레나 - 후카미 레이이치로











작년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처럼 기발하고 새로운 기법으로 고갈 위기에 놓인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돌파구를 열어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아이디어로 반은 먹고 들어가는 추리소설이라 그 아이디어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향에 따라 반응이 극심하게 나뉠 듯. 도입부는 평범하게(?) 친구들 10여 명이 모인 산 속 콘도에서의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그 순간, 갑자기 챕터가 바뀌며 또 다른 화자가 끼어든다. 그는 바로 <미스터리 아레나>라는 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 <홍백가합전>이 이미 역사 속에 사라진 근미래의 일본에서는 1년의 마지막 날을 온 가족이 이 프로그램과 함께 보낸다는데, 도입부의 살인사건은 실제가 아니라 이 프로그램의 문제에 불과했다. 이 문제를 풀러 나온 참가자들 중 가장 빨리 맞춘 1인만 거액을 받기에 확신이 서면 중간에라도 바로 버저를 누르고 답을 말해야 한다. '내 생각에 범인은 누구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고.' 그런데 참가자들이 전부 추리소설에 쩛어 있는 것들이라 기상천외한 답을 쏟아낸다. 서술트릭, 성별오인, 정통 본격파, 다중인격 등 참가자들 수만큼이나 다양한 가설들이 말 그대로 쏟아진다. 독자를 속이는 추리소설의 고전적인 수법들이 총망라되고 있어 추리소설(특히 본격) 마니아들은 더욱 흐뭇하게 볼 수 있다. 더불어 작중의 문제가 추리소설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추리소설에 대한 소설, 즉 메타 추리소설이기도 해서 추리소설의 각종 법칙이나 클리쉐를 토대로 가설을 제시하는 참가자들은 영락없이 우리 추리소설 마니아들을 떠올리게 한다. 평범하게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해답이라는 추리소설은 더 이상 자극을 못 주는 걸까? <마루타마치 르부아>,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이 작품처럼 마치 백화점식으로 여러 개의 가설이 폭죽처럼 터지는 추리소설로 한계를 돌파하려는 노력이 갸륵하기도 하고, 좀 애처롭게도 보이는 게 사실이다. 작가의 아이디어에 감탄했고 매우 흥미로웠지만 결말이 좀 와장창 느낌인 건 아쉬웠다. 기왕에 여러 가설이 나온 김에 정말 끝판왕 격의 강력한 정답이 제시되길 바랐는데 그런 스타일의 결말은 아니었다.



2위 <사일런트 페이션트> -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나를 찾아줘> 이래로 몇 년간 계속 지속되고 있는 도메스틱 스릴러 장르로 볼 수 있다.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음모, 살인이 주요 테마인 이 장르는 특히 전 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독서 시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20-40대 여성들의 구미를 사로잡아 몇 년째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해당 여성층은 밀리터리나 스파이, 액션, 프로파일러, 경찰물보다는 연애나 부부관계, 가정에서의 학대 등 현실적인 우리네 삶에 밀착된 얘기에 더욱 관심이 많아 보여 도메스틱 스릴러의 유행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얘기를 주로 다루다 보니 가정학대나 데이트폭력, 불륜 등의 소재가 남발되어 감정적으로 공감은 가지만 추리소설로서는 순도가 떨어지는 도메스틱 스릴러도 제법 보여 읽고 나서 실망한 작품도 꽤 된다. 독자의 공감을 얻고 너만 그런 게 아니라며 다독이는 소설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는 책장을 딱 덮었을 때 뒤통수가 얼얼한 반전이나 상상도 못했던 범인의 정체 같은 것에서 짜릿함을 느끼기 위함이 아닐까. 일상에서는 접하기 힘든 지적 쾌감 말이다. 특히 그런 점에서 <사일런트 페이션트>는 고만고만한 도메스틱 스릴러 중 단연 발군이다. 남편을 총기로 살해하고 몇 년째 입을 닫은 환자를 치료하려 노력하는 정신과 의사가 나오는 중심 줄거리는 뻔한 편인데 트릭에서 독자를 완전히 한 방 먹인다. 영국 작가가 아니라 아야쓰지 유키토나 아비코 다케마루 같은 일본의 신본격파가 떠오르는 음울한 분위기와 트릭지향적인 스타일이 서양 스릴러에 접목되니까 어디서도 접하지 못한 퓨전음식을 먹는 듯한 묘한 맛이 탄생했다. 기분 좋은 독서였고, 저자 알렉스 마이클리디스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우먼 인 윈도>의 AJ 핀과 멋진 라이벌이 될 듯하다.



1위 <기도의 막이 내릴 때> -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가히 추리소설의 제왕이라 할 만큼 인기가 드높은 히가시노 게이고지만 독자에게서나 평론가에게서나 비평적인 평가는 갈수록 떨어지는 추세인 듯하다. 워낙 많은 작품을 쓰다 보니 그중에 범작도 있고, 누가 봐도 돈 때문에 쓴 것 같은 안이한 작품들도 많아져서 자연히 평균이 내려간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추리소설가 중 한 명이고, 왕성한 생산력과 꿋꿋한 작가적 태도를 존경까지 하지만 어디서 그해의 베스트 추리소설을 얘기하는 자리에 게이고를 거론하는 건 좀 수준(?)이 떨어져 보이는 게 아닐까 스스로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다 읽고 몇 번을 고쳐 생각해봐도 이 작품은 내게 2019년 최고의 추리소설이다. 이 양반이 날림으로 쓰는 것도 많지만 적어도 본인의 양대 캐릭터인 가가 교이치로 형사와 '갈릴레오' 유가와 교수 얘기는 문장부터 구성, 트릭, 아이디어 모든 면에서 공을 들인다. 하물며 작가의 자타공인 대표작인 가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서는 어떻겠는가. 데뷔를 <방과 후>로 했지만 실제로 제일 먼저 쓴 작품은 가가 시리즈의 첫 작인 <졸업>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게이고의 시작을 함께한 캐릭터를 영영 떠나보내는 것이니만큼 여느 때보다 집필에 힘을 준 덕분에 2010년대 게이고의 최고 걸작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다. 특유의 신파도 <용의자 X의 헌신>에 버금갈 만큼 강력하지만 플롯은 그 작품보다 더 탄탄하게 짜여져 있다. 최후에 밝혀지는 눈물 쏙 빼는 사연 못지않게 가가 교이치로라는 민완형사의 날카로운 추리가 곳곳에 돋보일 수 있도록 안배를 잘 해놓았다. 이 정도면 감동 코드와 눈물을 잘 다듬어 세일즈하는 일급의 문화상품이자, 40년 가까운 노장 추리소설가의 저력을 보여주는 회심의 한 방이 아닐까. 나 역시 게이고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가가 교이치로라는 캐릭터와 영영 작별하는 게 너무 아쉽다. 아직도 필력은 여전하니까 남은 작가생활 동안 그 못지않게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주인공이 게이고의 펜 끝에서 또다시 탄생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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