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환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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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첫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는 것은 반갑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살짝 겁도 난다.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는 주식에 투자하는 기분이랄까. 떨리는 기분으로 시모무라 아쓰시라는 작가의 <생환자>에 투자한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자못 만족스러웠다. 간략히 요약해 세계 3대 고봉 중의 하나라는 히말라야 칸첸중가 등반 중 벌어진 재난사고에 숨겨진 미스터리를 다루는 산악 모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생환자>는 작가의 섬세한 취재와 안정적인 글솜씨, 이야기 전반에 걸친 흡인력, 몇 번의 반전과 의외의 진상 등 추리소설 평가의 모든 영역에서 수준작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전문적인 영역을 다루는 추리소설은 다루는 소재의 특성상 열혈 팬과 다소 뜨뜻미지근한 독자가 나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예컨대 바둑을 주로 다루는 추리소설이라면 바둑 팬은 환장할 테고, 나 같은 바둑 문외한은 아무래도 흥미가 덜 생긴다. 이 점은 철저하게 고봉 등반에 집중한 <생환자>도 예외가 아닐 텐데 등산이라고 동네 뒷산 정도만 가본 사람들은 지레 지루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할 터. 하지만 그런 걱정은 잠시 넣어두셔도 좋을 것 같다. 꼭 등산 얘기가 아니더라도 320쪽에 불과한 분량 안에서 정말 다양한 수수께끼가 펼쳐져 끊임없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등산이라고 동네 뒷산 정도만 가본 나조차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끝까지 읽었을 정도이니까.

눈사태 사고로 칸첸중가에서 형을 잃은 프로 등반가 동생이 주인공이다. 슬픔에 잠겨 형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형의 자일을 누군가 몇 가닥 끊어놓은 것을 발견한다. 물론 형은 자일 사고로 사망한 건 아니지만 누군가 형을 살해하려 했던 것일까? 게다가 형은 4년 전 비슷한 눈사태로 애인이자 동료 등반가였던 여자를 잃고 그동안 산을 멀리했었다. 4년 만에 그것도 극한의 위험지인 칸첸중가를 다시 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는 한편 형이 소속된 등반대와 같은 장소에서 단독 등반했던 사람이 간신히 생환해 고립된 자신을 매몰차게 버리고 갔던 등반대의 비열한 행적을 고발하는 일이 일어난다. 늘 산과 산악인을 사랑했던 형의 숨겨진 진면목이 고작 그런 것이었을까? 주인공이 느끼는 마음의 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형과 같은 소속의 등반대 중 유일한 생존자가 나타나 앞선 단독 등반자와 정확히 반대되는 증언을 남긴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둘 중 한 명이 거짓말을 하는 건 확실한데 둘 중 누가,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짤막한 내용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까?, ---을까?가 몇 번이나 나온다. 대체 이 수수께끼들을 전부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해 죽겠는데 작가는 풍선 입구를 막아놓듯이 철저하게 비밀을 감춘다. 부푼 풍선이 터져나가기 직전, 이 소설의 진정한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소설의 마지막 1/3 지점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을 돕는 기자, 두 명이서 사건의 핵심 용의자를 추적하기 위해 직접 칸첸중가에 오르는 것이다. 성난 대자연이 무심하게 던지는 온갖 위험과 맞서싸우던 주인공 일행은 그 험난한 과정 속에서 형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낼 단서를 차곡차곡 모은다. 최후에 밝혀지는 진실은 마침내 정상 등반에 성공한 주인공이 마주치는 무지개 같이 선명하고 아름답다. 복잡한 여러 개의 수수께끼가 낱낱이 풀리는 쾌감이 더할 수 없이 짜릿하며, 산과 산을 오르는 사람에 대한 연대의식이 공감가게 그려져 가슴 뻐근한 감동마저 느껴진다. 다른 무엇보다 생존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따른 조금은 씁쓸한 반전도 덤으로 따라온다.

작가 시모무라 아쓰시는 일본 추리소설 신인 등용문인 에도가와 란포상에 다섯 번이나 떨어진 끝에 결국 당선되었다는 이력이 있다고 한다. 낙방 행진을 할 때 일반소설에 가깝고 추리소설적인 플롯이 약하다는 단점이 지적되었다는데, <생환자>를 읽어보니 그러한 결점은 확실히 고친 것 같다. 추리소설적인 플롯은 누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화된 데다가, 원래의 강점인 일반소설스러운 문장력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하이라이트의 등반 장면은 산악 모험소설의 고전인 <아이거 빙벽>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어느 때보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 올 여름은 휴가도 못 갔는데 13,800원에 3시간이나마 확실히 더위를 식힌 것 같다. 고작 그 가격에, 게다가 안전하게 칸첸중가를 다녀올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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