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구) 문지 스펙트럼 9
박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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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속의 서울 』에서 1969년 말에 서울 거리를 거니는 구보 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박태원의 구보 씨에 관한 글도 소개되었다. 구보 씨는 박태원에서 시작하여 최인훈,
주인석으로 이어지는데 다만, 시대만 다를 뿐 서울을 거니는 모습이나 소설가의 모습은 마찬가지다.
내가 만난 첫 구보 씨를 살펴본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

1930년 경성(당시의 서울)은 식민지 시대의 혼란과 불균형하게 일제의 목적을 위해서만 발전하고 있었
다. 그래서 주인공 구보 씨는 동경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지만 그가 서서 꿈을 펼칠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을 통해 글을 쓰는 것이 전부였다. 작가 박태원의 필명 중 하나
가 구보(仇甫)였다. 이렇듯 작가의 반영된 모습과 글 속의 구보는 하나이면서도 둘이었다. 상당부분 그
들의 의식은 하나인 듯 보이다 어느 때는 그저 소설이라 느껴진다.


이 작품이 갖는 독특함

모데로노로지오(modernology)는 일본식 발음으로 적혀있었는데 고현학으로 일컬어진다.
박태원의 이 작품이 갖는 독특한 창작법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현대인의 생활을 조사하여 현대의
세대나 풍속 등을 해석하는 학문이라 정의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1930년대 경성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더구나 줄거리 자체가 구보 씨가 집을 나서서 온종일 걸어다니는 모습이기에 작가는 마
음껏 그려내었다. 모더니즘 소설가라고 부르는 이유를 책을 읽으니 알겠다.


고독한 구보 씨와 사람들

확실히 당시의 이런 특별함이 이 책을 언급하게 하지만 글에는 작가의 의식도 반영되어 있다.

구보는 다시 밖으로 나오며, 자기는 어데가 행복을 찾을까 생각한다. ㅡ 23쪽

구보는, 자기는, 대체, 얼마를 가져야 행복일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ㅡ 33쪽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의 부류는 다양하다. 그 시대에 편승해 부유하게 사는 사람
부터 구보 씨보다 남루한 사람, 그와 상관없을듯하지만 같은 식민지 아래를 살아가는 그 누군가 등.
그렇더라도 구보 씨가 애달퍼보이지는 않았지만 딱 한 장면에서는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애닯았다.
바로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강아지 한 마리가 모두에
게 외면받아 지쳐나자빠질 때 구보 씨는 강아지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강아지는 오히려 구보 씨를 경계
한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기다리는 친구는 그가 곧 와달라 부탁까지 했으나 곧 오지 않으며 강아지
에게까지 구보 씨는 찬밥이란 말인가. 그가 매일 집을 나서 끊임없이 걸어서 배회하는 이유는 채울 수
없는 고독과 외로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유하는 청춘... 작가가 26세 때 쓴 책이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

표지사진의 박태원의 모습에서 동그란 안경테는 당시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도 보았다. 그러나 그
의 헤어스타일을 보며 잠시 웃었다. 바가지 머리? 처음 접한 그의 작품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옛언어
라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나 글도 재미있다. 8세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한문이 많이 들어 있는 그
의 글은 모르는 한문이 나오는 경우나 확실히 알고자 할 경우를 위해 옆에 전자수첩을 놓고 읽었다. 편
리한 세상이다. 고어의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와 모르고 있던 단어를 알게 된 즐거움이 좋다.
또 당시의 거리를 직접 산책하며 그 안의 사람들을 만나는 느낌이다. 그만큼 시각적으로 잘 표현했으며
등장하는 벗이 마구 지껄이는 문학이야기도 짧지만 재미있다. 나의 하루를 종일 걸어서 글로 적는다면
어떤 글이 나올까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책에 실린 다른 네 작품

딱한 사람들은 타국인 일본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며 한 공간에 살게 된 소통이 단절된 두 주인공의 이
야기이다. 그래서 곳곳에 일본어가 나오는데 물론 간단한 단어들이라 읽는 데 지장은 없으나 일어를
모른다면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괄호 안에 한국어를 써두던지 주석이라도 달았으
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최신판은 어쩌면 바뀌었을지도 모르니 넘어간다.

방란장 주인은 당시 <구인회>를 조직하여 왕성한 활동을 벌인 문인 중 이상이 경영하던 다방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싶다. 방란이란 향기 좋은 난초라는 의미인데 영업위기에 처한 방란장의 주인의 내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더구나 주목할만한 점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장거리 문장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즉,
한 문장이 마침표로 끝나지 않고 몇 페이지에 걸쳐 쉼표만으로 대체되어 쭉 글이 이어진다. 정말 재미
있는 기교라 생각된다. 이상의 시를 읽을 때 하나의 리듬을 타며 속도감을 더해 읽는 재미와 비슷하다
고나 할까?

성탄제는 오래전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법한 주인공들의 이름인 영이와 순이 자매의 이야기다.
카페 여급으로 살던 언니 영이를 비난하던 순이도 결국 그 길을 걷게 되는 내용인데 조세희의『 난.쏘.
공 』에서 옆집에 살던 모녀가 떠올랐다.

최노인전 초록(抄錄)은 입담 좋은 최노인의 이야기지만 결국 외로운 노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마지막 춘보는 조선 말기가 배경인데 고단한 삶에서 희망을 놓치 않는 춘보의 이야기이다. 우직한 춘보
는 현실과 타협하거나 꾀가 있지도 않으며 그저 묵묵히 살아간다. 아마 당시 대다수 백성은 이렇지 않
았을까 싶다. 물론 그중에는 지식인 못지않게 자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얼마나 구
체적으로 행동을 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허락하지도 않았다. 술을 먹고서야 바른말을 쏟아내
어도 그때뿐 운 없으면 발각되어 잡혀들어가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작가 박태원. 그리고 글을 정리하며

이로써 얇지만 꽉꽉 차있는 여러 작품과의 만남이 끝났다. 박태원의 작품 중 『 천변풍경 』도 읽고 싶
었는데 이 책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확실히 구보 씨로 대표되는 작가의 글은 읽기에도 재미있었다.
작가는 10세 때 『 춘향전 』등의 고소설을 섭렵했으며 18세 때 고리키, 셰익스피어, 트루게네프 등의
서양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69세에 실명하고 전신불수의 몸으로 동학
혁명을 소재로 쓴 『 갑오농민전쟁 』이란 책은 구술로 받아 적어 78세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
은해 박태원은 사망한다.

<구인회>하면 학교 다니며 배웠던 기억이 난다. 이상, 김기림 등의 유명한 이들이 속해 왕성한 창작활
동을 했던 구인회. 사실 근래에 이상의 시 말고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추천받은
책도 있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다. 이상의 시만을 읽고 그의 글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연
하게 지인의 블로그에서 읽은 그의 소설에 관심이 생겼는데 때마침 박태원의 책을 접하자 당시 작가들
에게 관심이 쏠린다.

그들의 기교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의식의 흐림이나 시대상이 알고 싶다.
내가 사는 지금과 다른 시대이나 결코 무관하지 않은 시대이며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어쩌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물론 세상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편리해진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의식
도 지속적으로 발전하는지는 의문스럽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각(自覺)이다. 자각조차 못 하
고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편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각하였더라도 현실과 부딪혀 깨내거나 해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안다. 어쩌면 스스로 부끄러워질지도 모른다. 그런 고민을 안고 살아가지 않
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그의 소설에서 지식인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글을 쓰는 것뿐이
었다.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 그의 의식은 고뇌할 뿐이다. 어떤 행동을 이끌어 내진 않는다. 이런 물음
을 내게 던져줄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말이다. 낯선 느낌이지만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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